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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노인들은 폐지를 줍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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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노인들은 폐지를 줍지 않는다 [조성복의 '독일에서 살아보니'] 독일의 사회복지 ①
혹시 어렸을 때 학교에서 서구 선진국들은 개인주의 사회이고, 한국은 이웃과 정이 두터운 공동체 사회라고 배우지 않았었는가? 그때 배운 것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들은 공동체에는 관심이 많지 않고 개인만을 중시하는 반면에, 우리는 옛날부터 계(契), 두레 등 서로 돕는 정신이 충만하여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한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랫동안 독일에서 살아보니 ‘그와 같은 내용이 과연 맞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동시에, 도대체 어떤 사회가 진정한 ‘공동체 사회’인지 궁금해졌다. 

독일 거리 곳곳에 장애인…한국은?

독일에 가서 그곳 생활에 어느 정도 정착하면서 느낀 점 중의 하나는 거리에 장애인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버스, 지하철, 기차 등의 교통편이나 학교, 관청, 식당, 박물관 등등 가는 곳마다 이들을 배려한 시설이나 장치들이 눈에 띠었다. 대부분의 장소가, 그들이 이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장애인들이 한국보다 훨씬 더 많다고 느껴졌다. 처음에는 ‘독일이 그래도 선진국인데 왜 이렇게 장애인들이 많은 것일까?’하고 의아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아, 독일에서는 장애인들이 자유롭게 나다니는 것이구나! 이 사회에 장애인이 특별히 많은 것이 아니라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별 차이 없이 생활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눈에 많이 뜨였던 것이다. 반대로 한국의 거리에서 장애인들을 자주 볼 수 없었던 것은 특별히 그들의 수가 적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로 집안에만 있기 때문에 거리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한 가지 더 눈에 띈 점은, 가는 곳마다 노인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노인들을 위한 주택, 옷가게, 레스토랑, 공연, 여행상품 등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이것은 노인들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소비 계층으로서의 역할이 크다는 방증일 것이다. 우리보다 일찍이 연금 제도가 발달한 독일의 노인들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 증거는 독일사회 어디를 가든지 노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기차역이나 전철역 앞, 또는 대형  마트 주변이나 주요 거리의 도로변 등에서 먹거리나 소소한 물건들을 파는 노인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동네 가게에서 폐지를 줍거나 빈 병을 모으기 위해 손수레를 끄는 노인을 본 적도 없다. 물론 간혹 일하는 노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우리의 경우 멀쩡하게 잘 살다가도 본인 자신이나 식구 중에 누군가 ‘암’과 같은 큰 병에 걸리면 가족 전체가 나락의 길로 떨어진다. 갑자기 큰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빈곤층은 말할 것도 없고, 웬만큼 사는 사람들도 살던 집을 내놓든지 하여 정상적인 삶이 무너진다. 그래서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참거나, 돈이 많이 들 경우에는 치료를 포기하기도 한다. 점차로 의료보험이나 복지체계의 보강으로 조금씩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어디가 크게 아플 경우 우리의 삶은 곤경에 빠지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반면에 독일에서는 어디가 아프다는 이유로 자신이나 가족의 삶이 망가지지는 않는다. 갑자기 병에 걸리더라도 돈이 없어서 참아야 하거나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의료 보험에 가입했을 경우, 암을 비롯하여 아무리 큰 병에 걸리더라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데 거의 돈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와는 달리 대부분의 사람이 비싼 보험료를 부담해야 하지만, 대신에 아프기 때문에 정상적인 삶이 몰락하는 경우는 없다.

실업자에 생계위협 없어야 진정한 공동체 사회

누구에게나 일자리를 잃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커다란 시련이다. 우리의 경우, 구조 조정에 의한 대량 해고를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시위는 마치 사활을 건 투쟁처럼 대단히 격렬하고 치열하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렇게 과격하지 않다. 시위 문화에 차이가 존재함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국민성이나 노사 문화의 차이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 해석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 독일에서 노동자들의 시위가 극단적이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설사 실업자가 되더라도 당장 생계의 위협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실업급여 및 사회보조금 등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의 한 여학생이 임신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우리사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못된 짓을 했다고 그 여학생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빗발칠 것이고, 그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아이를 지우라는 부모들의 성화가 있을 것이다. 또 애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부유한 집안일 경우에는 그것이 가능하겠지만, 가난한 집안일 경우에는 어려움이 많고, 사정에 따라서는 가출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여학생이 어떤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우리 사회는 그녀를 범죄자로 취급할 가능성이 크다. 

독일에서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경우, 그러한 여학생들을 보호하는 공공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그래서 비슷한 상황의 다른 학생들과 같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해주고, 계속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 애를 낳은 다음에도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아이를 돌보아 주고 같이 살 수 있도록 배려한다. 당연히 범죄자 취급을 하지 않고 다른 사회적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보호하며, 동시에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다양한 지원을 제공한다. 

독일에 살면서 알게 된 그들의 개인주의란 자신의 자유가 소중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고 존중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버스나 지하철, 거리 등에서 지나가다가 상대방을 접촉할 경우 반드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데, 사소한 것 같지만 이런 것이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행동의 시작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또한 그 사회 구성원으로서 연대 의식을 가지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충분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바로 그러한 정신이 그들로 하여금 많은 세금과 사회 보험료를 부담하는 데 동의하도록 만들었다고 본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지원 시스템을 구축했다. 아프거나 장애가 있거나 나이가 들거나 실업자가 되는 등의 어려움에 처할 경우 적절한 도움을 주게 된다. 바로 이러한 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 사회’가 아닐까?

반면에 우리는 그러한 어려움에 처할 경우, 각각의 개인들은 스스로 알아서 그 난관을 헤쳐나가야 한다. 물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지원 방안이 조금씩 제도화되고 있기는 하지만, 경제 규모에 비해 우리의 복지 시스템은 아직 크게 미흡한 상황이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이 그 증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공익 광고나 기업들의 홍보물 등을 보면, 우리사회는 사회 구성원들을 서로 위하고 돌보는 공동체 사회라고 끊임없이 강조한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우리사회가 공동체 사회라고 말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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