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8.15처럼 한국인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들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는 기획이다. 필자는 <한국생활사박물관>,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라인 한국사>, <민음 한국사> 등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역사 오디세이대학 시절 여러 학생이 모인 자리에서 스승인 정옥자 선생이 이런 말을 했다. "성인(聖人)은 600년마다 태어난답니다. 기원전 600년 무렵에 부처가 났고, 서기 1년 전후해서는 예수, 600년 무렵에는 무함마드, 1200년 즈음에는 주자가 났죠. 그러면 1800년 무렵에 태어난 성인은 누굴까요?" 어린 학생들이 고개만 갸우뚱거리고 있자 선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르크스래요. 다음 성인은 2400년에야 나오니까 여러분이나 나는 아예 성인 되기는 글렀지? 하지만 성인은 아니라도 현자는 60년마다 나온다니까 실망하지 말고 정진하도록 해요." 웃자고 한 얘기이고 열심히 살라는 덕담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그 얘기가 계속 귓속에 맴돌면서 떠나지 않았다. 1980년대에 대학가에서 마르크스가 가졌던 압도적 존재감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 후 세월이 30년 가까이 흐르면서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불교, 기독교 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마르크스주의도 20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갖게 되었다. 지난 30년 사이에는 마르크스의 이름을 걸고 태어났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한꺼번에 붕괴하는 미증유의 '참변'도 일어났다. 당시의 상황을 표현한 '마르크스주의 역사상 최대의 위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우스갯소리에서나마 마르크스를 성인 반열에 올리는 얘기는 쑥 들어갔다.
<1> 분단에 대한 배상…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
<2> 8.29는 국치일일 뿐이다? "신한국 최초의 날"
<3> 서태지는 왜 노동당사 앞에서 발해를 꿈꿨나
<4> 김구도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 당찮은 소리
<5> 해방 공간의 '전태일'들, 망각의 늪에서 구하라
<6> '단군이 오래전 건국', 그것만 자랑할 건가
<7> 세종은 오로지 존경 대상? 세종을 질투하라
<8> 10월유신 41년…더 무서운 괴물이 솟아나고 있다
<9> 하얼빈역·궁정동…한국 근현대사 관통한 두 번의 10.26
<10> 러시아혁명의 교훈, 대중을 외면하면 진보도 없다
<11> 전태일과 박정희의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
<12> 미국이 한국 독립 낙점? 유영익의 기묘한 이승만 띄우기
<13> 개화파의 역사적 과오, 안중근이 씻어 내다
<14> 망령 되살린 수구의 '종북' 칼춤…6.29의 저주 풀어야
<15> 억압과 저항의 '선사 시대' 넘어 '민중기원'은 온다
탄생 166년 <공산당선언>, 현재진행형으로 읽히는 이유
노동자를 일으켜 세우지 않는 이론은 한때의 지적 유희일 뿐
앞서 우스갯소리에서 언급된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인류 역사에서 성인으로 불리는 이들은 억압받고 소외된 민중의 편에서 그들이 갈 길을 제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마르크스가 성인으로 불릴 수 있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하층에 자리 잡은 노동자의 편에서 사상을 전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기존의 성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그는 신비로운 말과 행동으로 노동자를 가르치려 들거나 자기를 따르게 하지 않았다. 그 반대로 노동자가 자본주의 철폐의 주역일 수밖에 없는 역사적,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노동자가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도 할 수 없다면서 그들 자신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세웠다. 따라서 그의 저서들을 섭렵한 지식인들이 아무리 그의 사상을 설파하고 다녀도 노동자들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않는 한 <공산당선언>은 대학 도서관 구석에서나 뒹굴 쓸모없는 고문헌에 불과하다. 오늘날 한국에는 '강단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리는 지식인조차 극소수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주의자인 노동자는 더욱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공산당선언>이 예측한 '자신의 노예제 내에서 노예의 생존을 보장해 줄 능력'을 잃어 가는 자본가와 '그들의 무덤을 파는 자'로 길러진 노동자의 대립 구도는 한국 사회에서 점점 더 명징하게 드러나고 있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보는 동안 나의 주된 감정은 연민과 동정이었다. 거기에 삼성이라는 대자본의 비인간성에 대한 무기력한 분노, 나와 내 가족은 저런 상황은 아니지 않나 하는 소시민적 안도감이 곁들여 있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날 무렵 떠오른 자막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유미가 세계 최초로 반도체 공정에서 일하다 산재 판정을 받은 노동자라는 내용이었다. 영화보다 현실이 훨씬 더 끔찍했다는데 그런 악조건 속에서 용감하게 싸워 결실을 이뤄낸 사람들이 놀랍고 다시 보였다. 309일간 고공 농성을 벌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과 겹치면서 '정말 이런 사람들이 아니면 누가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상대해 승리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연민에 사로잡혀 있던 나 자신을 질책했다. 자신의 처지를 자각한 한국의 노동자들은 강하다. 강해야만 살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됐든 그 무슨 주의가 됐든 그들의 역사적 소명과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역량을 정확히 짚어내는 사상이 그들의 것이 된다면 누가 그들을 당해내겠는가? 우리 주변에는 서로 다른 처지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담론들이 범람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름 아래 벌어진 실천들이 호된 실패를 맛본 탓에 그런 담론들은 대개 공공연히 마르크스를 비판하거나 외면하고 있다. 바로 그런 연유로 1848년 유럽과 2014년 한국의 공통 요소인 자본과 노동의 대결을 직시하지 못한다. 앞에서 말했듯 이론 앞에 붙는 이름이야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분명한 것은 노동자를 주체로 일으켜 세우지 않고 그들에게 훈계나 하려 드는 어떤 이론도 부질없는 한때의 지적 유희에 불과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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