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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한 4.3 사과, 미국은 왜 안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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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한민국이 한 4.3 사과, 미국은 왜 안 하나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24> 4.3 학살은 미국과 한국이 함께 저지른 범죄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8.15처럼 한국인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들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는 기획이다. 필자는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역사 오디세이
<1> 분단에 대한 배상…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
<2> 8.29는 국치일일 뿐이다? "신한국 최초의 날"
<3> 서태지는 왜 노동당사 앞에서 발해를 꿈꿨나
<4> 김구도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 당찮은 소리
<5> 해방 공간의 '전태일'들, 망각의 늪에서 구하라

<6> '단군이 오래전 건국', 그것만 자랑할 건가
<7> 세종은 오로지 존경 대상? 세종을 질투하라
<8> 10월유신 41년…더 무서운 괴물이 솟아나고 있다
<9> 하얼빈역·궁정동…한국 근현대사 관통한 두 번의 10.26
<10> 러시아혁명의 교훈, 대중을 외면하면 진보도 없다
<11> 전태일과 박정희의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
<12> 미국이 한국 독립 낙점? 유영익의 기묘한 이승만 띄우기
<13> 개화파의 역사적 과오, 안중근이 씻어 내다
<14> 망령 되살린 수구의 '종북' 칼춤…6.29의 저주 풀어야
<15> 억압과 저항의 '선사 시대' 넘어 '민중기원'은 온다

<16> 부활하는 일제 망령…해법은 동학농민군 계승

<17> 박근혜·남재준, '푸에블로호 교훈' 잊었나

<18> 일본인들이여, 러일전쟁의 진실을 기억하라

<19> 166년 전 문서, 현대 한국의 비밀을 말하다

<20> 이것은 3.1운동이 갈구한 나라가 아니다

<21> 여성의 날, 여성 대통령 박근혜를 생각한다

<22> FTA 경제 영토 3위? 기황후가 기가 막혀

<23> 추신수 둘러싼 '가증스런 피라미드'에 대한 단상

정현종 시인은 <제주도에게>라는 시에서 제주도더러 국가 없는 데로, 국가 아닌 데로 아주 멀리 떠내려가라고 노래한 적이 있다. 그의 노래처럼 국가로부터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고 떠내려가는 제주도를 대한민국 정부가 붙잡고 나섰다. 제주도 4.3사건 희생자에 대한 추념을 결심하고 이날을 국가의 공식 기념일로 지정한 것이다. 그것도 보수 우익으로 꼽히는 박근혜 정부에서 최종 결정이 이루어졌다. 만시지탄은 있으나 역사상 유례가 없는 끔찍한 비극을 겪은 희생자와 유족을 위해 다행한 일이다. 여러 부문에서 대선 공약을 파기했다는 비난을 받아 온 박근혜 대통령이지만 4.3 공약을 지킨 것은 환영할 일이다.

4.3사건의 진상 규명과 역사적 화해를 위한 국가 차원의 노력은 김대중 정부에서 시작되었다. 그 최초의 결실은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한 것이다. 그해 8월 28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진상조사위원회가 발족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신고도 이뤄졌다. 지금까지 희생자 1만4032명, 유족 3만1253명이 심사 의결되고, 추가 신고에 대한 의결도 곧 이뤄질 거라고 한다. 제주도에는 12만 평의 4.3평화공원이 건립되어 매년 20만여 명이 방문하는 평화와 인권의 성지로 자리 잡았다.

국가원수로서 4.3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공식 사과한 이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그는 2003년 10월 31일 진상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와 토벌대의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국가 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2006년에는 제주도 현지의 위령제에 직접 참석해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사과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과거사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을 천명했다.

이처럼 4.3사건의 상처를 씻으려는 국가 차원의 노력은 이명박 정부 5년간 주춤하다가 박근혜 정부 들어 재개되었다. 아직도 수만 명의 희생자를 '빨갱이'로 보는 비인간적인 보수 우익이 득시글거리는 나라에서 결단을 내린 박근혜 대통령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주문을 하고 싶다. 4.3사건은 분명 대한민국의 국가적 폭력이었지만 그에 앞서 미국의 범죄였다. 대한민국이 사과와 화해의 깃발을 든 이상 미국에 대해서도 반드시 응분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자는 것이다.

시작도, 평화적 해결의 좌절도 미국과 떼놓을 수 없는 4.3

4.3사건의 발단은 미군정 치하이던 1947년 3월 1일 일어난 경찰의 발포 사건이었다. 관덕정 마당에서 벌어지던 3.1운동 기념집회 때 한 어린이가 기마경찰이 탄 말의 발굽에 치였다. 그러자 분노한 군중이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고,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발포해 여섯 명의 주민이 죽었다. 이를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당은 반경찰 활동을 시작했고, 그달 10일 벌어진 총파업에는 경찰관 66명을 포함한 제주도 내 직장의 95퍼센트 이상이 참여했다.

미군정은 진상 조사에 나서 주민들의 불만과 남로당의 선동에 모두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남로당을 분쇄하는 데만 힘을 쏟아 제주도 군정 수뇌부를 외지인으로 바꾸고 경찰과 서북청년단 단원을 동원해 무력 진압에 나섰다. 그들은 약 1년간 파업 주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펼쳐 나갔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은 350여 명의 무장대를 조직해 제주도내 지서 열두 곳과 우익 단체를 공격하고, 무자비한 탄압의 중지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의 중단을 요구했다.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태가 커지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국방경비대(국군의 모체로 미군정 때 창설됨)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경찰과 주민 사이에 벌어진 일에 군대가 개입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장대 측과 협상을 시도했다. 그달 28일 김익렬은 무장대 지휘자인 김달삼과 만나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데 합의했다. 4시간에 걸친 협상 끝에 이뤄진 합의는 세 가지였다고 한다.

첫째,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둘째, 무장해제는 점진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셋째,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김익렬과 김달삼은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 동기생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평화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중요한 합의를 이뤄낸 직후 오라리라는 곳에서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김익렬은 현장 조사를 벌여 이 사건이 우익 청년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무시했다. 그 대신 지상과 공중에서 방화 현장을 촬영해 만든 기록영화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를 통해 이 사건을 무장대의 짓으로 몰고 갔다.

오라리 방화 사건 이틀 후인 5월 3일 미군정은 경비대에 총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김익렬은 진압에 반대했다. 5월 5일 제주중학교 미 군정청 회의실에서 수뇌부 회의가 열렸다. 경무부장 조병옥은 김익렬이 김달삼과 동기생이고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폭로해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끝까지 진압에 반대한 김익렬은 이튿날 해임된 뒤 여수 주둔 제14연대장으로 전출되었다.

▲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 ⓒ<지슬> 공식 페이스북

이처럼 4.3의 평화적 해결은 미군정의 시나리오에 따라 좌절되었다. 미군정이 강경 진압을 서두른 것은 5.10총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였다. 그들에게는 한반도의 38선 이남에 자신의 세력권을 구축한다는 '거창한' 전략만 있을 뿐 '하찮은' 제주도민의 인권과 생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5.10총선거에서 제주도의 선거구 세 곳 가운데 두 곳이 투표자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다음달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수포로 돌아갔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제주도 문제 역시 미군정에서 대한민국으로 이관되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그해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제9연대장 송요찬은 해안에서 5킬로미터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민족도 아닌 동족의 민간인에 대한 잔인한 소탕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미증유의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짓이었다고. 중산간 마을의 95퍼센트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최소한 3만 명에서 8만 명까지 추산되는 죄 없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을 집단 사살하는가 하면,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해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였다. 이른바 '대살(代殺)'이다. 여자는 옷을 벗겨 나무에 매달아 놓고 창으로 찔러 죽이고 어린아이는 개구리처럼 패대기쳐 죽였다.

1949년 6월 김달삼의 후임자인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무장대는 궤멸했다. 군경도 하산하는 자는 살려주겠다는 포고를 내렸다. 그러나 이 포고를 믿고 내려와 새 삶을 시작한 사람들 중에도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예비검속을 당해 처형당한 이가 적지 않았다. 결국 제주 4.3사건은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1947년 3.1절 발포 사건 기준).

4.3 학살은 미국과 한국이 함께 저지른 역사적인 범죄

이처럼 4.3 학살은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가 함께 저지른 역사적인 범죄였다. 미국은 그 시작과 확산에 모두 깊숙이 개입해 있었다. 1948년 11월에 시작된 국군의 소탕 작전 때에도 작전권을 쥐고 있던 것은 미 군사고문단이었다. 4.3사건은 단순히 국가의 탄생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저지른 잘못일 뿐 아니라 미국의 냉혹한 세계 전략 속에서 수만 명의 한국인이 희생당한 국제적 범죄였다. (관련 기사 : 고마운 미국? "한국인들 죽이거나 학살 방조")

대한민국은 사과했다. 탄생 과정의 원죄를 씻고 국가다운 국가로 나아가는 작은 걸음을 내디뎠다. 심지어 미국 언론이 '독재자의 딸(the strongman's daughter)'이라고 비아냥거리던 대통령도 그 걸음을 이어 디뎠다.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임하는 미국은 왜 침묵하고 있는가? 4월 3일은 대한민국의 국가기념일에 그치지 않고 미국이 자유의 이름으로 제3세계에서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들을 통렬하게 반성하고 진정한 자유의 벗으로 거듭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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