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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세월호 진실…'탁 치니 억' 떠오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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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세월호 진실…'탁 치니 억' 떠오르는 이유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27> 6월항쟁

사람들은 매우 구체적으로 잘못을 범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성은 종종 매우 추상적이다. 백주 대낮에 수백 명의 꽃다운 생명이 가라앉는 것을 온 국민이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세월호 참사는 분명 매우 구체적이고 명료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구체적인 진실에 가까이 가지 못한 채 저마다 추상적인 처방을 내놓으며 이 엄중한 국면을 지나고 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선장과 승무원들을 단죄하고, 무능의 극치를 보여 준 해경을 해체하고, 참사의 원인을 제공한 해운사와 '관피아'를 응징하고, 구조에 최선을 다하기는커녕 참사를 방조한 정부와 언론의 책임자를 갈아치우고, 대통령이 국민 앞에서 내 잘못이라며 눈물을 보이는 것 등등은 분명 대참사가 남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일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참사의 구체적 원인이 밝혀지면 그에 따른 구체적 처방 아래 재배열되어야 할 부차적 요소들일 수 있다. 대통령의 반성을 폄하할 생각은 없으나 그가 정말 무엇을 잘못했는지 밝혀지기 전까지 그것은 매우 추상적인 반성일 뿐이다.

추상적인 반성의 전형적인 사례가 종교적 반성이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이 일어났을 때 그 원인을 알 도리가 없는 사람들은 사제의 인도를 받아 '내 탓이오'를 외쳤다. 그것은 추상적이되 절실한 반성이었다. 먼 옛날에는 사제들이 멋대로 '하늘의 뜻'을 해석해 애먼 사람들을 제단에 바치곤 했다. 그런 짓에도 무지에서 나오는 '진지함'이 있었다면, 세월호 참사에 대해 하나님이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라느니 "가난한 것들이 경주로 수학여행 갈 것이지 왜 제주도로 가서 이 사단을 냈는지 모르겠다"느니 막말을 퍼부은 것으로 알려진 사제들은, 그것이 사실이라면 진지함은커녕 최소한의 인간적 연민도 없는 자들로서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치 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진실에 눈감지 않은 사람들…그해 여름은 위대했다

재앙에 맞닥뜨린 국민과 아픔을 함께하는 종교인의 전범은 1987년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추모 미사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축소 조작되었다고 폭로했다. 그때까지 이 사건은 경찰의 자체 조사에 의해 조 모 경사 등 두 명이 박종철을 고문하다 일어난 '사고'로 되어 있었다. 사제단의 폭로로 검찰은 사건을 재조사해 박처원 치안본부 5차장의 주도 아래 모두 다섯 명이 고문에 가담했으며 강민창 치안본부장도 연루되었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그러나 국민은 이 같은 표피적 사실에 만족하지 않고 살인 경찰의 배후에 있는 독재 권력 자체를 응징하기 위해 6월 민주항쟁으로 나아갔다.

그해 1월 14일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독재 권력 아래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얼마든지 진실이 은폐된 채 변사 사건으로 덮여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 사건의 추악한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난 데는 몇몇 의로운 이들의 용기가 큰 역할을 했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취조 받던 학생이 숨진 사실을 인지한 <중앙일보> 기자가 이를 보도하면서 하마터면 묻힐 뻔했던 사건이 국민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실직고하고 석고대죄를 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경찰은 역사에 남을 거짓말을 내뱉으며 위기를 모면하려 발버둥을 쳤다.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

그러나 경찰의 의뢰로 대공 분실을 찾았던 중앙대병원 내과 전문의 오연상은 사건 현장에 물이 흥건한 것을 목격하고 박종철이 고문을 받고 죽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시신을 화장해 증거를 없애려던 경찰의 음모에 제동이 걸리고 부검이 실시되었다. 부검을 담당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박사는 1월 17일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물리치고 고문 혐의를 입증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 간에 출혈 흔적이 있고 사타구니, 폐 등이 훼손되어 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진실이 드러났는데도 책임을 모면해 보려는 독재 정권의 시도는 계속되었다. 1월 19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하는 자리에서 "일부 수사관들의 지나친 직무 의욕으로 인해 이러한 불상사가 발생한 것은 매우 유감된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극소수 좌경 용공분자를 완전히 척결할 때까지 경찰은 주어진 책무를 다하겠다"라고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나친 직무 의욕'을 보였다는 수사관은 달랑 두 명이었고, 그들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구속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독재 정권은 총대를 멘 이들에게 두둑한 돈을 주어 사태를 마무리하려 했다. 시신은 가족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해 버렸다.

이것이 5월 18일까지의 상황이었다. 그동안 독재 정권은 치안본부장과 내무부 장관을 교체하고 고문 근절 대책을 내놓으며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야당과 재야 세력에 대해서도 대화를 제안하며 타협하는 자세를 보이려고 애썼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본색을 드러내고 4월 13일 호헌 조치를 내놓으며 민주 진영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때 그들은 적어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자신들이 축소 조작한 대로 잊힐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로 독재 정권과 살인 경찰의 죄상이 낱낱이 드러남에 따라 이 사건의 전말뿐 아니라 그 해결 방안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재구성되었다. 고문치사가 일부 수사관의 과잉 의욕이 아니라 정권 차원의 민주 세력 탄압과 용공 조작에서 일어난 일인 만큼 일부 각료의 경질과 경찰의 쇄신 따위는 근본적 해결책의 지엽 말단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사건의 주범인 독재 정권을 퇴진시키고 민주 정부를 구성해 독재 치하에서 일어난 모든 국가적 범죄를 규명하고 모든 책임자를 처단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정권이 이를 거부하자 5월 27일 결성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는 6월 10일을 '박종철 군 고문살인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의 날'로 정해 국민이 직접 해결하는 길로 들어섰다.

범죄자들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고 폭력에 의지해 버틴 것은 극한의 대결과 안타까운 희생을 불러왔다. 6.10을 하루 앞둔 9일 연세대 교정에서 시위를 벌이던 이한열 학생이 직격으로 날아온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끝까지 진실을 외면하다 백주 대낮에 꽃 같은 젊은이를 사경에 빠뜨린 정권을 국민은 용서할 수 없었다. 전국의 주요 도시가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고 보도블록 파편이 뒹구는 전쟁터로 바뀌었고, 공포의 대상으로 악명을 날리던 '백골단'을 비롯한 경찰력이 곳곳에서 무장해제 당했다. 위기에 처한 독재 정권이 언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투입할지 모른다는 설이 나돌았지만 시위대는 '올 테면 오라'며 결사항전의 태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벼랑 끝 대결에서 먼저 꼬리를 내린 것은 뒤가 구린 독재 정권이었다. 4.13 호헌 조치에 따라 집권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던 노태우가 전격적으로 호헌 조치를 철회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 것이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로 집약된 국민의 요구 가운데 절반만 수용되었지만, 이는 온전한 해결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한열은 이러한 전환의 계기에 동참하지 못한 채 7월 5일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다. 7월 9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문익환 목사가 전태일로 시작해 광주 2000여 영령을 거쳐 이한열에 이르는 민주 열사들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던 모습은 지금도 수많은 국민의 뇌리에 똑똑히 아로새겨져 있다. (관련 기사 : 새누리당과 뉴라이트의 '6월항쟁 탈취' 사건)

▲ 1987년 7월 9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구름처럼 모여든 시민들. 질식당한 민주공화국을 되살린 6월항쟁의 주역은 바로 이들이었다. ⓒ연합뉴스

'탁 치니 억'과 세월호 참사, 그 거리는 얼마나 될까

그리고 27년이 지났다. 미완으로 끝난 4.19혁명으로부터 6월항쟁까지가 딱 27년이었는데, 그 공백을 뒤늦게 메워 온 27년이었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희생을 밑거름 삼아 한국인은 제법 괜찮은 나라에 산다는 자부심을 키워 왔다. 그러다가 1997년에 IMF 외환 위기를 맞았고 이번에 세월호 참사를 맞아 기우뚱거리고 있다.

이번 참사는 독재 정권 하에서 일어난 학살이나 고문치사와는 성격이 다르다.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근본적인 사태이다. 그런데도 집권 세력과 지도층은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하는 '추상적 반성'과 정파적 이해에 따른 '유사 종교적 대안'만을 남발하고 있다. 이번 사건이 아이들을 '못 살린 것'이 아니라 '안 살린 것'이라는 국민적 공감대는 분명하다. 한국 정도 되는 국가의 능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이나 사고였다면 이 정도로 분노가 치솟지 않았을 거라고 모두 입을 모은다. 분명히 살릴 능력이 있었는데도 아이들을 눈앞에서 수장시킨 것처럼 보이기에 수많은 의혹이 제기되고 음모설이 비어져 나오는 것이다. 이럴 때 정부는 유언비어를 잡아 족치기 전에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런 의혹을 낱낱이 풀어 주겠다는 결의를 보여야 마땅하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서 보듯 진실은 하나뿐이며 구체적이다. 그 앞에서 추상적 반성과 격화소양의 대책을 남발하는 자들은 무능하거나 뒤가 구린 자들이다. 진실은 그런 자들에 맞선 싸움 끝에야 드러나는 것이기에 많은 사람을 답답하고 힘들게 한다. 그러다 보니 지방선거 같은 데다 '세월호 민심'을 끌어다 대는 '삽질'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의 눈에도 자명한 진실이 떠오를 때까지 세월호 참사는 진행 중일 수밖에 없다. 실종자 수색도 끝나지 않고 국정 조사도 정파적 계산에 따라 표류하고 있는 지금, 진실로 가는 역정에서 대한민국은 아직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단계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8.15처럼 한국인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들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는 기획이다. 필자는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역사 오디세이
<1> 분단에 대한 배상…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
<2> 8.29는 국치일일 뿐이다? "신한국 최초의 날"
<3> 서태지는 왜 노동당사 앞에서 발해를 꿈꿨나
<4> 김구도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 당찮은 소리
<5> 해방 공간의 '전태일'들, 망각의 늪에서 구하라

<6> '단군이 오래전 건국', 그것만 자랑할 건가
<7> 세종은 오로지 존경 대상? 세종을 질투하라
<8> 10월유신 41년…더 무서운 괴물이 솟아나고 있다
<9> 하얼빈역·궁정동…한국 근현대사 관통한 두 번의 10.26
<10> 러시아혁명의 교훈, 대중을 외면하면 진보도 없다
<11> 전태일과 박정희의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
<12> 미국이 한국 독립 낙점? 유영익의 기묘한 이승만 띄우기
<13> 개화파의 역사적 과오, 안중근이 씻어 내다
<14> 망령 되살린 수구의 '종북' 칼춤…6.29의 저주 풀어야
<15> 억압과 저항의 '선사 시대' 넘어 '민중기원'은 온다

<16> 부활하는 일제 망령…해법은 동학농민군 계승

<17> 박근혜·남재준, '푸에블로호 교훈' 잊었나

<18> 일본인들이여, 러일전쟁의 진실을 기억하라

<19> 166년 전 문서, 현대 한국의 비밀을 말하다

<20> 이것은 3.1운동이 갈구한 나라가 아니다

<21> 여성의 날, 여성 대통령 박근혜를 생각한다

<22> FTA 경제 영토 3위? 기황후가 기가 막혀

<23> 추신수 둘러싼 '가증스런 피라미드'에 대한 단상

<24> 대한민국이 한 4.3 사과, 미국은 왜 안 하나

<25> 중국·베트남에 건넬 건 '한류'만이 아니다

<26> 영웅 없는 한국 현대사, 그럼에도 위대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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