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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도망친 '거짓말' 대통령이 구국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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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도망친 '거짓말' 대통령이 구국 영웅?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29>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정전협정

60년 넘게 이어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것은 한국 사회의 최대 현안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날 한국인의 대부분은 정전 체제를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온 터라 막상 평화협정이 맺어지면 공황 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 마치 공항에 비상착륙하고 나서야 자신이 타고 온 비행기가 줄곧 추락 위기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승객들처럼.

정전협정은 전쟁의 당사국들이 평화협정을 맺고 끝을 내기 전에 우선 무력 대결을 중단하는 '임시' 협정이다. 정전협정은 전쟁을 지휘한 양쪽의 군인들이 맺고, 평화협정은 정치인들이 체결한다. 그때 정전협정을 맺은 군인들은 평화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적대 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할 책임이 있다. 한반도에서는 유엔사와 공산군이 공동 구성한 군사정전위원회가 그 책임을 맡았다.

나폴레옹전쟁이나 1, 2차 세계대전처럼 승패가 명확하게 갈린 전쟁에서는 평화협정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승전국의 요구를 패전국이 거부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으니까. 그런데 6.25전쟁은 십수 개국이 참전해 수백만의 인명을 살상하고도 '무승부'로 끝난, 매우 이례적인 국제전이었다. 정전협정 체결도 748일이라는 오랜 시간을 끌었거니와 평화협정이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끌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니다. 사생결단의 혈투 끝에 비기고 말았는데 누가 누구 말을 고분고분하게 듣겠는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통일 없는 정전'에 반대한다면서 북진 통일을 완수한 뒤에 정전이든 휴전이든 하자고 부르짖은 '간 큰 남자'가 있었다. 정전을 추진하는 미국에게 한국군을 따로 움직여서라도 통일을 이루고야 말겠다고 떵떵거리던 이 남자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었다. 그는 정전 회담에 반대하면서 정전에 반대하는 관제 데모에 여고생까지 동원하고, 미국이 체결한 포로 송환 협정을 어겨 가면서까지 반공 포로를 석방해 초강대국의 역린을 건드렸다. 미국은 그런 이승만을 어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다가 정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 주겠다는 당근을 주고 '주저앉혔다.'

이런 이승만을 한국의 보수 우익 세력은 놀라운 담력과 탁월한 정치력으로 미국을 끌어들여 침략군을 물리치고 안보를 튼튼하게 다진 구국의 영웅으로 치켜세운다. 이승만 자신도 정전 직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자 "우리의 후손이 앞으로 누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은 많은 혜택을 누릴 것"이라며 감격해 마지않았다. 그가 말하는 '우리의 후손'은 지금과 향후의 한국 국민을 가리킬 것이다. 과연 그럴까?

▲ 2012년 제헌절에 남산에 있는 자유총연맹 광장(서울시 중구 장충동)에서 이승만 동상 너머로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본래 1956년 남산에 세워졌으나, 1960년 4월혁명 때 시민들의 손에 철거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자유총연맹은 2011년 남산에 다시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연합뉴스

북진 통일 외치더니 총알 도주에 일본 망명 구상까지

이 말의 진위를 가리려면 이승만의 '배짱' 행적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해방 공간에서 이승만은 '단정'의 화신이었다. 모든 국민과 정치 지도자가 오매불망 통일 독립을 바라던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전라북도 정읍에서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자는 배짱 좋은 발언을 했다. 얼마 후 남북을 아우른 임시정부 수립을 협의하던 미소공동위원회가 깨지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고, 유엔 한국위원회는 서서히 38선 이남 지역에서 우선 총선거를 치르는 쪽으로 선회했다. 그때 정치의 중심에 선 것은 당연히 이승만이었다.

좌우 합작을 추진하던 여운형은 암살당하고 끝까지 남북 협상에 기대를 걸었던 김구는 분단으로 가는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를 거부했다. 좌익 세력은 월북하지 않으면 투옥되었다. 이승만이 남한의 '국부'가 되는 데는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다. 건국 후 반민특위의 활동이 친일파 일색의 이승만 정부를 위협했으나 이 역시 '반공'을 앞세운 이승만의 반격으로 좌절했다. 일찍이 이대로 분단되면 남북 간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거라 예언했고 그러한 참극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던 김구도 같은 시기에 암살당했다. 최근 김구 암살범 안두희의 평전을 펴낸 김삼웅에 따르면 그 배후에는 이승만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김구의 예언이 있었지만 이승만은 배짱 좋게도 '북진 통일'을 입에 달고 살았다. 1949년 1월부터 1950년 6월까지 남북한 간에 600회에 육박하는 전투가 벌어졌고, 그중 상당수는 남한이 도발한 것이었다. 소련이 멸망한 후 공개된 비밀문서들은 6.25전쟁이 스탈린의 재가를 받은 김일성의 남침이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이승만은 이 전쟁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민중의 총의를 모아 통일 정부를 수립했더라면 그 수반은 김일성도 이승만도 아니었을 것이고 당연히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의 놀라운 배짱은 정작 전면전의 발발로 그가 호언장담하던 '북진 통일'의 기회가 왔을 때 발휘되었다. 북한 인민군이 예상치 못한 기세로 진격해 오자 그는 주한 미국대사 무초의 만류도 '배짱 좋게' 뿌리치고, 6월 27일 새벽 내각, 국회, 군 어디에도 알리지 않은 채 서울역에서 비상 열차를 타고 줄행랑을 쳤다. 그날 밤 서울 시민은 라디오에서 '우리가 이기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이승만의 거짓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다. '멘붕'에 빠진 군은 다음 날 새벽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한다면서 피란민으로 가득한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 교도통신에 따르면 서울이 함락되기도 전에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 정부를 세울 구상까지 했다. 궁지에 몰리면 별 생각이 다 드는 법이지만, 일본으로부터 막 독립한 나라의 대통령이 일본 망명이라니? 도대체 그가 독립 운동을 하기는 한 걸까? 전쟁 직후인 1954년 월드컵 지역 예선 한일전을 앞두고 이유형 감독은 이승만 앞에서 "일본에 지면 선수단 모두 대한해협에 몸을 던지겠다"라고 했다는데 당시 이승만의 표정이 궁금하다.

이승만의 배짱 시리즈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 주도의 유엔군이 꾸려지기도 전인 7월 14일 그는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 일체를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군 지휘권은 권력의 핵심 요소이다. 고려 우왕은 요동 정벌을 위해 이성계에게 지휘권을 맡겼다가 목숨도 잃고 왕조도 잃었다. 나라 안에서도 그러한데 외국인에게 지휘권을 넘긴다는 것은 정말이지 보통 '배짱'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행동을 두고 미국을 끌어들여 나라를 살린 '구국의 결단'으로 칭송하는 보수 우익 세력의 '배짱' 또한 보통은 아니다.

작전권부터 내준 이승만이 정전 반대를 외친 속내

다시 이승만의 정전 반대로 돌아가 보자. 정전협정을 다룬 책들은 그 성향이 보수든 진보든 이승만이 정전을 반대했다고 말한다. 현상은 물론 그랬다. 이승만은 적어도 공식 석상에서는 '통일 없는 정전' 결사반대를 입에 달고 살았으니까.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어떤 사람을 평가하려면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봐야 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이승만이 실질적으로 정전을 반대했는가? 그에게 정전을 반대할 의지와 능력이 있었는가? 입버릇처럼 북진 통일을 외치더니 북한군이 밀고 내려오자마자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사람이? 역사학자 서중석에 따르면 개전 초기 북한군 병력이 더 많긴 했지만 병력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또 남한의 대통령이 그토록 북진 통일의 의지가 강했다면 어느 정도의 전쟁 준비는 되어 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적지 않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개전 초기의 한국군은 마치 군 지휘부에 간첩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고 일패도지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 "공산군 물리친 이승만의 공? 잘한 게 없다") 이승만이 외친 북진 통일은 명분이 약했던 단정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선전 수단에 불과했던 셈이다.

그런 이승만이 정전을 반대했다니 삼척동자가 웃을 일이다. 해방 공간에서 이승만이 아니었어도 미국은 한반도 전체를 잃을 의사가 없었다. 6.25 개전 직후 이승만의 편지가 없었어도 미국은 자국의 젊은이들을 희생시키더라도 한반도를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만방에 과시하고 있었다. 정전협정 과정에서 이승만이 떼를 쓰지 않았어도 미국은 수만 명의 젊은이를 잃고 막대한 전비를 써 가며 지켜 낸 남한을 이승만 같은 무능한 권력자에게만 맡겨 둘 의사가 전혀 없었다.

이승만이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는 바람에 이후 평화협정으로 가는 과정에서 한국은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는 시각이 많다. 보수보다 진보 쪽에서 더 많은 것 같다. 오히려 최근 전시 작전권 환수 논란과 관련해 보수적 시각에서 이를 반박하는 '합리적' 방어 논리가 나오기도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정전협정 당시 미군 사령관 존 퍼싱은 독일의 무조건항복을 주장하며 서명하지 않았지만, 미군을 포괄하는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쉬가 서명한 것으로 미국은 정전협정 당사자가 되었고 이후 평화협상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유엔군 사령관이 정전협정에 서명했기 때문에 한국은 협정의 당사자로서 평화협정에 참가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정전협정은 정치적 평화협정에 앞서 무력 충돌을 중단하는 군사적 협정이므로 군 지휘관들 사이에 조인된다. 당시 한국은 작전 지휘권을 유엔군에 넘긴 상태였다. 따라서 이승만이 찬성하든 반대하든 유엔군의 실질적 대표인 미군 사령관이 서명하는 것으로 정전협정의 요건은 충족된다. 북한 인민군 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 유엔군 사령관인 클라크가 서명한 정전협정에 한국인의 서명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정전협정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논란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1970년대 들어 유엔사가 해체 수순에 들어갈 무렵 북한은 한국이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고 미국과 자신이 실질적인 정전협정의 당사자이므로 평화협정도 미국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그렇게 주장하는 정치적 맥락이야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미국이 정전협정에 서명한 순간 이승만이나 한국 정부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한국은 그 협정의 당사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평화협정을 논의하는 1954년 제네바회담에 한국이 대표를 파견하고, 1990년대에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4자회담을 벌인 것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것이다.

▲ 정전협정 문서. 만약 이승만이 정전협정에 찬성했다면 한국이 협정문에 서명할 수 있었을까? 물론 필요하다면 못할 것도 없었겠지만, 1953년 7월 27일 최종 조인된 정전협정문을 보면 판문점에서 서명한 양측 군 실무자와 각각 문산, 평양, 개성에서 서명한 유엔, 북한, 중국의 군사령관 자리만으로도 서명란이 비좁아 보인다. ⓒ연합뉴스

한국인들이 평화협정의 주역으로 우뚝 서야

결국 이승만의 정전 반대는 실질적인 의지도 능력도 없으면서 정전 이후 자기 자신의 권력과 안위를 보장받기 위한 정치적 연출에 불과했다. 이를 위해 그는 이미 수많은 젊은이가 쓰러져 간 전장에 더 많은 목숨을 바치라며 여고생까지 동원해 국민을 겁박했다. 국민의 비원(悲願)을 짓밟은 채 단정을 추진하고, 수많은 애국지사의 죽음을 딛고 선 채 북진 통일을 부르짖고, 서울 시민을 내팽개친 채 도주하던 그의 '배짱'은 이처럼 주어진 정세에서 권력을 쟁취하고 놓치지 않으려는 예민한 정치적 감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일부 지도자들이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과 정권만 지키면 된다며 벌여 온 후안무치한 행동들을 보면 이승만의 정치적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 같아 소름이 끼친다.

인간은 자신이 속할 시대와 나라를 선택할 수 없다. 태어나고 보니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 있었던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대한민국은 이승만이 건국했다는 분단 독재 국가가 아니다. 나의 대한민국은 이승만을 몰아내고 3.1운동에서 비롯된 건국이념 실현의 대장정을 시작한 1960년 4월에 비로소 탄생했다. 그 대한민국이 바로 서고 해방 공간에서 참혹하게 짓밟힌 국민과 애국지사들의 비원을 뒤늦게나마 풀어 주는 일의 단초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마무리 짓는 상식적인 과정에 주역으로 참여하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8.15처럼 한국인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들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는 기획이다. 필자는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역사 오디세이
<1> 분단에 대한 배상…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
<2> 8.29는 국치일일 뿐이다? "신한국 최초의 날"
<3> 서태지는 왜 노동당사 앞에서 발해를 꿈꿨나
<4> 김구도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 당찮은 소리
<5> 해방 공간의 '전태일'들, 망각의 늪에서 구하라

<6> '단군이 오래전 건국', 그것만 자랑할 건가
<7> 세종은 오로지 존경 대상? 세종을 질투하라
<8> 10월유신 41년…더 무서운 괴물이 솟아나고 있다
<9> 하얼빈역·궁정동…한국 근현대사 관통한 두 번의 10.26
<10> 러시아혁명의 교훈, 대중을 외면하면 진보도 없다
<11> 전태일과 박정희의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
<12> 미국이 한국 독립 낙점? 유영익의 기묘한 이승만 띄우기
<13> 개화파의 역사적 과오, 안중근이 씻어 내다
<14> 망령 되살린 수구의 '종북' 칼춤…6.29의 저주 풀어야
<15> 억압과 저항의 '선사 시대' 넘어 '민중기원'은 온다

<16> 부활하는 일제 망령…해법은 동학농민군 계승

<17> 박근혜·남재준, '푸에블로호 교훈' 잊었나

<18> 일본인들이여, 러일전쟁의 진실을 기억하라

<19> 166년 전 문서, 현대 한국의 비밀을 말하다

<20> 이것은 3.1운동이 갈구한 나라가 아니다

<21> 여성의 날, 여성 대통령 박근혜를 생각한다

<22> FTA 경제 영토 3위? 기황후가 기가 막혀

<23> 추신수 둘러싼 '가증스런 피라미드'에 대한 단상

<24> 대한민국이 한 4.3 사과, 미국은 왜 안 하나

<25> 중국·베트남에 건넬 건 '한류'만이 아니다

<26> 영웅 없는 한국 현대사, 그럼에도 위대한 이유

<27> 표류하는 세월호 진실…'탁 치니 억' 떠오르는 이유

<28> '총기 참사' 재발 방지를 위한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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