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로 민간 소비가 위축되어 성장률이 둔화되고 경제 회복 속도가 더딘 편이다."
올해 2분기 경제 동향에 대해 한국은행, 한국개발연구원(KDI) 등이 발표한 자료에는 항상 이런 표현이 포함되어 있다. 세월호 참사 핑계를 대는 측면은 잠깐 제쳐두도록 하자. 이런 표현을 볼 때마다 분명한 철학을 확인하게 된다. '소비'가 경제도 살리고 성장도 견인하는 미덕이라는 것.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소비'의 지위에는 정반대의 개념인 '저축' 또는 '절약'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박정희 개발 독재와 군사 독재 시절, 한국 경제를 수출 중심의 대기업과 재벌 위주로 재편하기 위해서는 '과소비'를 악한 것으로, 그리고 근검절약과 저축을 선한 것으로 포장해야만 했다. 서민들의 저축이 있어야만 재벌 대기업을 육성할 종잣돈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소비가 최대의 미덕이 되어 있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 2기 최경환 경제팀이 대출 관련 규제(이른바 DTI, LTV)를 완화해줄 테니 빚을 내서라도 부동산을 사고 소비에 나서라고 권장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거대한 토사물, 사내 유보금
자본주의 시스템을 최대한 단순화해보면 '생산'과 '소비' 두 부문으로 나눠볼 수 있다. 자급자족 부문이 없다고 전제하면, 이 체제에서 상품은 타인에게 판매될 목적으로만 생산된다. 노동자들은 임금, 자본가들은 이윤의 형태로 생산을 통해 돈을 번다. 이 돈으로 상품을 사거나 혹은 향후 생산을 위해 재투자하는 방식으로 소비가 이뤄진다.
이 시스템의 특징은, 생산된 상품이 모조리 소비되어야만 다시 생산이 이뤄질 수 있는 순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상품이 다 소비되려면 노동자건 자본가건 벌어들인 돈(임금과 이윤)을 모조리 소비(구매와 재투자)해야만 한다. 인체로 비유하자면 완전 소화 능력, 즉 먹은 것(생산)을 모조리 소화(소비)해낼 수 있어야만 자본주의 시스템은 성장할 수 있다.
물론 현실에서 이런 완전 소화는 벌어지지 않는다. 번 돈을 다 쓰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는 법이다. 하지만 1년을 단위로 봤을 때, 올해 다 쓰지 않고 남겨둔 돈이 있다면 아껴뒀다가 내년에 다 쓰면 된다. 그렇게만 되면 시스템에는 별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년 반복해서 돈이 남는 일이 벌어지고 축적되기 시작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앞서 얘기한 것처럼 개발 독재와 군사 독재 시절, 가계 부문은 상당한 돈을 다 쓰지 않고 절약해 은행에 저축을 했다. 하지만 '다 쓰지 않았다'는 것은 가계 부문만 봤을 때 성립하는 얘기일 뿐이다. 이들이 은행에 쌓아둔 저축은 재벌 대기업들에게 낮은 이자율로 빌려주게 된다.
재벌들은 가계 부문이 모아준 충분한 실탄을 지급받아 위험해 보이는 투자도 과감하게 집행한다. 즉, 가계 부문이 다 쓰지 않은 돈을 재벌 대기업들이 쓰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 전체로 보면 가계 부문의 저축은 쌓여 있는 돈이 아니라 결국에는 자본가들에 의해 소비가 이뤄진다.
그런데 기업 부문에서 다 쓰지 않고 남겨둔 돈, 즉 사내 유보금은 어떠한가? 이 돈은 주주에게 배당도 하고, 노동자에게 임금도 주고, 향후 생산을 위한 투자를 하고도 남은 돈이다. 즉, 말로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생산적인 부문에 투입될 가능성이 높지 않은 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내 유보금의 상당 부분은 각종 펀드나 파생 금융 상품 등 금융 자산으로 존재한다. 생산적인 곳에 투자되는 게 아니라 '돈 놓고 돈 먹는' 주식 거래, 선물 거래, 외환 투기에 사용된다. 때로는 업무와 상관없는 부동산 매입에 쓰이기도 한다. 사실 이런 식의 자산 보유가 매우 위험천만한 것이기도 한데, 왜냐면 경제 위기 한 방으로 주식 시장과 부동산 시장이 곤두박질치면,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평가되어 있는 사내 유보금의 상당 부분이 증발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개별 기업을 뛰어넘어 경제 전체에 이런 사내 유보금이 쌓인다는 것은 뭘 뜻하는 걸까? 그만큼 소비되지 않는 상품이 많아진다는 것을 말한다. 생산 과정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상품을 다 소비해줘야 다음 생산이 원활한데, 다 쓰지 않고 남겨두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니 당연한 일 아닌가? 인체로 비유하면 먹은 것(생산)을 모조리 소화(소비)해내지 못해 다시 토해낸 거대한 토사물이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체제가 유지되나?
그렇다. 이건 기적이다. 지난 글(바로 가기)에서 사용한 그래프를 다시 보자. 사내 유보금이 매년 놀라운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면, 그만큼 시장에는 팔리지 않는 상품으로 넘쳐나야 정상이다. 그런데 한국 자본주의는 아직 건재하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그 답은 762조에 달하는 한국 기업 전체 사내 유보금 규모의 상대편에 있는 가계 부채 1000조에 있다. 즉, 팔리지 않는 상품은 가난한 노동자·서민들이 빚을 내서 소비해 왔다는 것이다. 20세기에는 저축을 통해 재벌 대기업 성장의 종잣돈을 모아준 가난한 노동자·서민들은, 21세기에는 팔리지 않는 상품을 빚까지 내가며 소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빚을 내서 소비를 해줄 수는 없는 법이다. 빚내서 소비해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자본주의 최강국인 미국에서 2008년에 여실히 보여주지 않았던가. 집값이 떨어지고 서민들이 빚 갚는 능력이 떨어지자, 민간 소비가 곤두박질치며 부동산 담보 대출 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하며 미국발 금융 위기로 발전한 바 있다.
박근혜 정권도 현재의 구조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DTI, LTV 등 대출 관련 규제를 풀어 빚을 더 내서 소비하라고 권장하는 한편, 기업들에게도 사내 유보금을 쌓아두지 말고 투자나 배당 등을 통해 소비를 늘릴 것을 권하고 있다. (이른바 '기업소득 환류 세제'라는 것을 통해서 구체화되고 있는데, 이 제도는 나중에 세금 문제를 다루면서 자세히 파헤쳐 보도록 하겠다.)
세계 경제 위기에도 아랑곳없이 증가한 사내 유보금
그런데 위 그래프에서 놀라운 대목은 한 가지 더 있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성장 관련 수치가 2008년 9월 리먼브라더스 파산 이후 잠시 하향 곡선을 그리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의 사내 유보금은 미국발 금융 위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거침없이 상승곡선을 타고 있다.
세계 경제 위기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한국 자본주의는 상대적으로 위기의 흐름을 덜 탔다고 볼 수 있다. 사내 유보금이 계속 늘었다는 것은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도 상당히 증가해 왔다는 얘기니까 말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한국 자본주의가 저임금 비정규직 사용이란 점에서 세계 최첨단을 달려왔기 때문이다. 1998년 IMF 위기 당시 엄청난 구조조정을 거쳤는데, 그때 비정규직 비율을 전체 노동자의 무려 60퍼센트 수준까지 높였다.
김대중 정권 시기의 엄청난 비정규직 양산으로 노무현 정권 시기에 자본가들의 이윤율은 더 오르기 시작했다. 이윤을 축적한 자본은 다시 엄청난 힘으로 비정규직을 늘려왔다. 이 때문에 2008년 세계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비정규직을 일시에 해고하는 방식으로 자본가들과 한국 자본주의는 위기에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로 대표되는 한국 주력 제조업 부문에 찾아온 '행운'이 있었다. 미국발 금융 위기 이전부터 현대차는 '소형차' 부문에 주력하며 경쟁력을 쌓아왔다. 이와 달리 미국의 빅 3를 비롯한 글로벌 업체들은 SUV·픽업트럭 등 이윤이 더 많이 남는 큰 차에 집중해왔다. 하지만 경제 위기는 소비자들이 소형차로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고, 빅 3는 파산 위기로 내몰린 반면 현대차는 이 시기에 극적으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었다.
삼성전자의 경우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 열어준 새로운 시장, 즉 스마트폰 시장의 덕을 톡톡히 봤다. 애플이 가장 먼저 시장을 연 '개척자(Pioneer)'인 반면, 삼성전자는 '그 뒤를 바짝 뒤쫓는 후발자(Fast Follower)'였다. 그러다보니 두 회사 사이에 서로 기술을 베꼈다며 특허 소송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어쨌건 스마트폰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시장이었고, 이걸 한동안 애플과 삼성전자 둘이서 갈라 먹었다. 삼성전자의 막대한 영업이익 대부분이 스마트폰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셋째, 이명박 정권이 적극 개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고환율 정책'이다. 환율이 올라가면, 즉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 그만큼 수출 대기업의 수익성이 크게 개선된다. 물론 반대로 수입 업체 수익성은 나빠진다. 하지만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수출 부문이다. 고환율이 유지되는 동안 수출 대기업은 해외 시장에서 막대한 돈을 긁어모을 수 있었다.
수출 기업엔 혜택 안긴 고환율, 하지만…
위 그래프는 지난 10년간 원-달러 환율의 변화 추이를 그려본 것이다. 노무현 정권 말기에 900원 수준까지 떨어졌던 환율은 이명박 정권 초기에 1400원 대까지 올라간다. 그러다 리먼브라더스 사태가 터지자 잠시 1500원 대까지 급등했다가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2008~2010년 기간 동안 원-달러 환율은 평균 1200원 대를 기록했다. 그 이전 시기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수준이다.
그러면 이런 고환율이 수출 기업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가격 1000원짜리 음료수를 생산해 수출하는 기업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기업은 음료 1개당 인건비 300원, 원재료비 300원, 기타 비용 300원을 들여 제조원가는 900원이다. 그러니까 음료 1개를 팔면 100원의 이윤이 생긴다고 해보자.
그동안 환율이 달러당 1000원이어서 이 회사는 해외 시장에 음료 1개당 1달러의 가격을 책정했다. 그런데 갑자기 환율이 달러당 1200원으로 20퍼센트 급등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똑같은 1달러를 받고 음료 1개를 팔지만 이걸 원화로 바꾸면 1200원이 되어 음료 1개당 이윤이 300원으로 껑충 뛰어오르게 된다. 아무 노력도 한 게 없는데 환율 상승만으로 이윤율이 무려 3배로 뛴 것이다.
물론 수입품의 가격도 상승한다. 그래서 음료 1개를 만드는 데 들어간 원재료비 300원도 오른다. 하지만 그래봐야 360원으로 뛰는 수준에 불과하다. 따라서 음료 1개당 비용이 60원 추가되는 것일 뿐이기에, 여전히 음료 1개당 이윤은 240원으로 기존 100원의 2.4배를 기록한다. 그러니 수출 기업 입장에서 2008~2010년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며, 이 시기에 사내 유보금이 큰 폭으로 상승한 것도 고환율 덕을 톡톡히 본 결과다.
하지만 가난한 노동자·서민의 입장에서 살펴보자. 임금이 오르는가? 아니다. 이윤을 저만큼 벌어들여도 임금을 올려준 사장들은 없다. 그러니 사내 유보금이 저렇게 쌓여온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환율 상승으로 기름값은 전보다 20퍼센트나 급등했다. 기름값만이 아니라 석유를 사용해 만드는 모든 상품 가격이 다 뛰어올랐다. 이 상품들을 소비해주는 뒷감당은 항상 가난한 노동자·서민의 역할이다.
사내 유보금, 누구의 피땀으로 모인 돈인가
자, 그렇다면 세계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사내 유보금이 매년 엄청난 규모로 쌓여온 진짜 이유가 뭔지 분명해진다. 간단하다. 가난한 노동자·서민들의 피땀이다. 끝도 없이 몰아치는 비정규직 양산의 희생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이 책임져야 할 위기를 이들이 대신 짊어졌기에, 762조에 달하는 사내 유보금이 쌓여 있는 것이다.
고환율을 이용해 수출 대기업들이 돈벼락을 맞고 있을 때, 가난한 노동자·서민들은 빚을 내서 소비를 유지해 경제를 떠받치느라 1000조 가계 부채라는 날벼락을 맞았다. 이들이 비싼 기름값을 감당해주지 않았다면 세계 경제 위기는 한국에 더 심각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현대차와 삼성전자에 행운이 다소 작용했다 하더라도 위기를 기회로 뒤바꾼 것은 탁월한 경영자의 능력 때문이 아니냐고? 그래, 행운이 오더라도 그걸 발로 걷어차는 바보들이 간혹 존재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 정도의 천운을 갖고 기회를 만들지 못하는 게 바보지, 그걸 기회로 만든 게 그리 특별한 능력인가?
그럼 이들 사내 유보금에 세금 찔끔 매기는 것에 엄살떠는 자본가들의 사정을 봐줄 이유가 없다. 본래부터 가난한 노동자·서민들의 몫으로 왔어야 할 돈을 부당하게 저들이 가로챈 것에 불과하니 말이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사내 유보금 과세보다 훨씬 멀리 나아가야 한다.
헌법 119조 2항, 즉 경제 민주화 조항을 활용해 762조에 달하는 사내 유보금을 징발 또는 몰수해 국민경제의 '균형'을 맞추고 '건전한 발전'이 이뤄지도록 하는 발상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수십 년 동안 가난한 노동자·서민들의 저축을 징발하여 재벌 대기업을 키워주는 데 사용했고, 서민들로 하여금 신용을 팔아 빚을 내서 소비하도록 만들어오지 않았던가.
위 그래프는 프랑스 파리경제대학의 세계 상위 소득 데이터베이스(The World Top Incomes Database) 사이트에서 추출해낸 한국 관련 데이터이다. 위의 푸른색 선은 한국의 상위 10퍼센트 소득자들의 평균 소득을 나타내고, 아래 붉은 선은 한국 전체 국민의 평균 소득을 가리킨다.
본래 위 데이터베이스에는 OECD 국가 대부분의 자료가 보유돼 있었지만, 유독 한국 데이터는 갖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동국대학교 경제학과 김낙년·김종일 교수가 공저한 '한국의 고소득층(Top Incomes in Korea, 1933~2010)'이라는 논문이 위 데이터베이스에서 공식 인정받게 되어 비로소 한국 관련 데이터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프만 쳐다봐도 입이 딱 벌어진다. 전체 국민의 평균 소득은 연 2000만 원 아래에서 20년 가까이 제자리걸음인데, 상위 10퍼센트의 평균 소득은 1998년 IMF 위기와 2009년 미국발 금융 위기 시기 잠깐만 제외하면 계속 상승해 이제 연 8000만 원 수준에 육박하니 말이다.
상위 10퍼센트 소득이 저렇게 가파르게 상승하고, 전체 평균은 제자리걸음이다? 이게 말해주는 것 또한 분명하다. 나머지 하위 90퍼센트의 소득은 지난 20년 동안 가파르게 하락해왔다는 얘기이다. 김낙년·김종일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2012년 현재 상위 10퍼센트의 소득은 국민 전체 소득의 절반에 가까운 44.87퍼센트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머지 90퍼센트의 소득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5퍼센트 남짓이란 얘기.
상황이 이런데 부자들에게는 증세가 아니라 세금을 깎아주려 하고, 담뱃값·주민세·자동차세 인상으로 가난한 노동자·서민의 등골만 휘어지도록 만드니, 이게 과연 정상적인 나라인가? '인사이드 경제'는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이와 유사한 데이터와 그래프가 앞으로도 수십 개 기다리고 있는데, 글을 쓸 때마다 울컥울컥하니 몇 회나 더 쓸 수 있을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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