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상곤 혁신위'부터 총선까지의 복기
총선과 대선을 통해 나라의 기본 틀을 바꾸려면 대안 수권 정당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2015년 6월 (구)새정치민주연합 '김상곤 혁신위'에 참여한 이후 지난 총선까지 현실 정치에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호모 아카데미쿠스'보다 '호모 폴리티쿠스'로서 사고하고 행동해야 했던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1) 새정치민주연합의 분당, (2)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체제의 성립, (3) 일여야대 구도 하의 총선 등 격동을 경험했던바, 사적으로건 공적으로건 이를 간략히나마 총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둑에서나 정치에서나 '복기'(復棋)를 잘해야 다음 판을 위한 실력을 키울 수 있으니까요.
(1)의 경우 정치적 지향에서 큰 차이가 없는 정치인들이 모인 연합정당에서 유력 정치인들이 당적 절차에 따라 정당하게 확정된 당헌 당규를 준수하지 않고 탈당하는 행태가 안타까웠습니다. 그 핵심 이유는 공천, 당권, 대권 등 권력의 문제였지요. 권력 욕망과 의지는 제도를 넘는 법이고, 또한 제도를 무너뜨리기도 한다는 진리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당시 당헌·당규화된 '김상곤 혁신안'과 '안철수 10대 혁신안'의 차이는 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더민주와 국민의당의 정강·정책을 비교해보더라도, 양당의 이념과 노선의 차이는 미미합니다. 탈당과 신당 창당은 정치적 자유이지만, 여러 번 이름이 바뀐 '2번 당'에서 대표 등 중임을 맡고 여러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갑자기 '3당 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의아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분당을 막고자 문재인-안철수 공동비대위원장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수용되지 못했습니다.
(2)의 경우 문재인의 선택에 따라 김종인이라는 초강력 권한을 위임받은 '계몽절대군주'가 대표로 영입되자, 더민주는 급속히 안정화되었습니다. 내부 전쟁에 골몰하던 더민주 계파는 김종인의 '군주적 리더십' 앞에서 침묵했습니다. 정당에서는 무질서보다는 권위 있는 질서가 낫다는 입장을 가지는 저로서는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김상곤 혁신위'가 만든 '시스템 공천'의 상당 부분이 수정되었지만, 이 역시 수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례대표 공천은 상황을 바꾸었습니다. 예컨대, 저는 "경제정당"을 내걸고 승부를 건 더민주의 비례대표 1번이 왜 박경미 교수가 되어야 하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더민주 중앙위원회가 '공화정'의 정신에 따라 비례대표 선발 방식과 순위를 교정하였습니다. 누가 저에게 무슨 파라고 묻는다면, "중앙위파"라고 답하겠습니다. 그리고 안심번호제를 통한 경선, 신인가산점, 결선투표 등 '김상곤 혁신안'의 골간은 유지되었다는 점도 다행이었습니다.
(3)의 경우 저는 야권 승리에 '불리한 구도'가 만들어졌다는 판단 아래, 새누리당의 압승을 유권자의 힘으로 막아내자고 '교차투표'를 호소하였습니다. 일여야대 구도가 원래부터 '유리한 구도'였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객관적 분석이 필요합니다. 아무튼 유권자는 적극적 '교차투표'를 통하여 더민주를 '수도권 1당'이자 호남에 의존하지 않는 '전국 1당'으로, 국민의당은 '호남 1당'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호남의 경우 더민주와 문재인에 대한 정당한 불만, 이를 자신의 기득권 유지에 활용하려는 '정치 호족(豪族)'의 의도, 더민주의 광주 공천의 실패 등이 혼융되면서, 더민주의 대패를 낳았습니다. 영남권에서는 새누리당 일당독재가 깨지는 일대사건이 만들어졌습니다. 오랫동안 "빨갱이", "전라도, 김대중 앞잡이"라는 비방을 들으면서도, 끈질기게 버티고 싸운 결과입니다.
이러한 전 과정에서 저는 여러 방향으로부터 공격과 비방과 욕설을 잔뜩 들었습니다. 덕분에 "마음의 근육"(<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공지영 지음, 한겨레출판사 펴냄)이 많이 생겼습니다. 저 역시 과열되어 '오버'한 일이 있었습니다. 의지 과잉으로 마음의 거울이 흐려졌던 탓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정치는 아름다워!"(La politica è bella)입니다. '민주공화국'을 '입헌국주국'처럼 운영한 "혼용무도"(昏庸無道)한 박근혜 정권, 오만하고 무능한 새누리당이 패배하고, 범야권이 승리를 하지 않았습니까!
2. 야권에게 승리를 안겨준 유권자는 경고합니다.
이번 총선에서 더민주, 국민의당은 각각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한계는 분명합니다. 먼저 더민주가 '전국 1당'이 된 것은 유권자가 더민주를 전적으로 지지해서가 아닙니다. 새누리당 정권을 응징해야겠다는 판단으로 당선 가능한 후보를 많이 가진 더민주를 밀어준 것입니다. 더민주는 이번 총선에서 얻은 낮은 정당득표를 생각하면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호남 민심은 더민주를 응징하고 국민의당을 '호남 1당'으로 만들어 주었지만, 호남 민심은 국민의당이 '호남 자민련'이 되어 새누리당의 하위 파트너로 '연합정부'를 구성하거나―김대중이 아니라 김종필의 길―, "호남 세속화"(<아주 낯선 상식> 김욱 지음, 개마고원 펴냄)를 추진하라고 밀어준 것은 아닙니다. 호남과 비호남 민주진보세력을 갈라 치고, 후자에게 "친노패권"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입니다. 더민주, 국민의당 모두 한순간에 훅 갑니다. 예컨대, 새누리당이 유승민을 앞장세우고 혁신한다고 가정해보십시오.
한편, (a) 새누리당 지지에서 국민의당 지지로 이동한 것으로 추측되는 숫자, 그 이동으로 새누리당 후보가 낙선한 것으로 추측되는 숫자와 함께, (b) 국민의당 후보의 존재로 갈라진 야권 지지표 숫자 및 그로 인하여 낙선된 것으로 추측하는 야권 후보의 숫자를 잘 계산해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양자를 상쇄하여야 정확한 대차대조표가 나오니까요. 향후 각 정당/파는 (a)과 (b)를 각각 과잉강조하면서 평행선을 그을 것입니다. 저는 양 입장은 각각 '부분적 진리'와 '상황적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2017년 분명 3자 구도로 벌어질 대선에서 (a)에 해당하는 숫자는 늘리고, (b)에 해당하는 숫자는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더민주의 호남 참패를 두고 문재인 정계 은퇴를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경쟁자에게 흠집을 내겠다는 의도가 읽힙니다. 17년 정권교체는 가용(可用) 자원을 모두 다 모아야 가능할 것인데, 문재인을 끌어내리면 누가 제일 좋아할까요. 원래 정치인의 언약은 정태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미래 행위를 통한 이행을 전제로 하기 마련인바, 동태적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제가 문재인에게 아쉬운 것은 자신이 당 대표직을 수행할 때 호남 방문을 더 자주하면서 민심 경청과 교감을 더 많이 하지 못했던 점입니다.
3. 민생우선 '저클릭' 노선으로 갑시다.
유권자는 총선에서 야권에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야권 정당은 이제 입법적 성과로 보답할 차례입니다. 테러 방지법, 세월호 특별법 등 문제 있는 법률을 개정해야 합니다. 쉬운 해고를 보장하는 노동 개악 법안의 통과를 막아야 합니다. 민생 복지를 강화하고 경제 민주화를 보장하는 법률을 제정해야 합니다. 또한 박근혜 정부의 '행정부 독재'에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추진하고 '세계언론자유지수'를 역대 최하위(180개국 중 70위)로 만든 정부에 책임을 준엄하게 물어야 합니다.
이 모두 중요한 사안이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민생 복지와 경제 민주화입니다. 작년 '김상곤 혁신위'는 야당의 정체성으로 "민생 복지 정당"을 제시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한 바 있습니다.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이 시대 최고의 개혁이며 혁신이다. 오로지 민생 제일주의로 통합된 '민생파'만 존재함을 선언한다. 민생은 좌와 우, 중도 그 어떤 이념적 단어나 말의 성찬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구체적 방안으로 (i) '갑질 경제' 타파와 민주적 시장경제체제, (ii) 선(先) 공정조세-후(後) 공정증세, (iii) 가계 소득 증대를 통한 국가 경제 성장 원칙 확립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심각한 청년문제 해결을 위하여 청년발전 기본법 제정, 청년정책 협의회의 활성화 등을 제안했습니다.
이러한 비전과 정책은 더민주, 국민의당, 정의당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국회가 개원하면 야 3당은 적극 공조하여 올해 내에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합니다. 상설적 정책협의체를 운영하면 제일 좋겠습니다. '좌클릭' 또는 '우클릭' 등 추상적 이념 논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로지 민생복지를 위하여 아래로, 또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저(低)클릭'만이 민생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야권 정당은 유권자에게 투표를 제대로 하면 삶이 바뀐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들이 각자도생하면서 "먹고사니즘"에 급급하지 않도록 제도적 틀을 바꾸어야 합니다.
4. 경쟁하고 협력하여 대선에서 승리합시다.
(1) 판을 키웁시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분당도, 이번 총선의 다야(多野)경쟁도 모두 대선의 전초전이었습니다. 곧 2017년 대선이 다가옵니다. 10년간 대한민국의 살림을 맡았던 '보수정권'의 밑천은 바닥을 드러냈었고, 두꺼운 화장으로 감추었던 민낯도 드러났습니다. 이제 바꿀 때가 되었습니다.
먼저 저는 야권의 대권 후보가 많으면 좋겠습니다. 더민주 소속 후보의 경우 현재 문재인이 1위를 달리고 있지만, 혼자로는 불안하고 위험합니다. 박원순, 안희정 등 유능한 광역자치단체장들이 자장(磁場)을 넓히고 나아가 경선에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대구라는 '적지'에서 돌파를 이루어낸 김부겸이 풍운이 일으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성남에서도 선명한 기치를 내걸고 전국적 주목을 받고 있는 이재명 시장은 또 어떠합니까. 정계 은퇴를 선언한 손학규가 복귀하는 것도 환영입니다. 국민의당의 경우 안철수가 제일 유력해 보입니다. 지난 대선의 양보 이후 절치부심하였다가 이번 총선에서 최대의 수혜자가 된 안철수가 이제 자신의 "새정치"가 새누리당과 더민주와 어떻게 다른지 이번에는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야권의 판이 커지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입니다. 국민의 주목을 끄는 경주(競走)가 벌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멋지게 승복하고 단결해야 합니다. 이번 총선에서 벌어진 일여다야 구도는 대선에서도 재현될 것입니다. 1997년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3자 구도를 다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남은 것은 누가 '제2의 김대중'이 되고, 누가 김대중과 연합한 '제2의 김종필'이 되고, 누가 '제2의 이회창', '제2의 이인제'가 될 것인가입니다.
(2) 야3당은 대선 결선투표 공동법안을 준비해주십시오.
저는 표의 등가성을 높이고 연합정치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국회의원 선거제로는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또는 그 변형태인 '권역별 비례대표제', 대통령 선거제로는 '(프랑스식) 결선투표제'가 필요하다는 점, 여러 번 강조해왔습니다. 통상 전자는 의원내각제, 후자는 대통령제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더민주는 새정치민주연합 시절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당론으로 채택한 바 있으며, 국민의당도 '정당명부비례대표제'를 찬성하고 있습니다. 문재인은 지난 대선 공약으로 '대선 결선투표제'를 내건 바 있고, 안철수도 근래 이 제도 도입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두 제도 하에서는 소수정당이 정당한 제 몫을 찾을 수 있기에 정의당 등 진보정당이 이 두 제도를 동의하고 있음을 물론입니다.
그런데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또는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의 경우 개정 선거법에 따른 선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새로운 논의가 되기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현 의석 상황에서 새누리당이 반대하는 한, 이 제도 도입은 불가능합니다. '대선 결선투표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러나 야3당이 공감대를 이룬 이 주제를 이번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하고, 공동법안을 발의하면 좋겠습니다. '대선 결선투표제'의 경우 개헌사항이라는 강한 의견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법안 제출 자체는 금지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새누리당 내부 사정이 변화하여 부분적 공감이 이루어진다면, '대선 결선투표제'를 위한 '원 포인트 개헌'도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3) 야권 지지자분에게 부탁합니다.
지난 대선 시기 단일화 과정과 (구)새정치민주연합의 분당을 경험하면서, 야권 지지자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과 정당에 대한 사랑과 지지가 과도하여 경쟁 정치인과 정당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표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저 역시 비판을 넘어 감정적 언동을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화이부동'(和而差异)해야 하는데 '동이불화'(同而不和)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감정의 동물입니다. 감정이 상하면 합리적 선택을 그르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역시사지'(移地思之)할 시간입니다. 저부터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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