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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이 떠난 그 학교에, 저는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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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예슬이 떠난 그 학교에, 저는 가고 싶습니다" [쌍용자동차 파업, 그 후⑨] 스무 살, 쌍용 앞에서 울다
2009년 8월 6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77일간의 옥쇄 파업을 마치고 공장 문을 나섰다. 직접적으로는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의 여파로 시작된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 더 원인을 파고 들어가면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된 해외자본의 국내기업 인수의 예고된 비극, 노동자 입장에서 따지면 한국사회에 깊게 뿌리 내린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성에 낳은 칼바람이었던 쌍용차 사태는 한국사회에서 큰 상징성을 갖고 있다. 그로부터 200여 일이 지난 지금 파업 참가 노동자들은, 쌍용 공장은,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어디쯤에 서 있는 것일까?

미행(美行)과 쌍용 파업 참여 노동자, 가족들 그리고 금속노조를 비롯한 다양한 노동, 정치, 사회 단체들과 현장 활동가, 르포작가, 교수, 작가, 블로거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각각의 관점에서 오늘을 진단해본다. "파업 그 후"부터 "88만원 세대와 쌍용"을 거쳐, "한국 사회와 노동자 파업"에 이르기까지 그들과 우리가 처한 오늘을 기록한다. 편집자

어지간한 아르바이트는 다 해봤습니다. 전단지 돌리기, 프렌치 레스토랑 서빙, 노점에서 꽃 팔기, 지하철에서 귀걸이 판매 등등. 고등학교를 그만 두고 난 다음에 먹고 살기 위해 일을 시작했습니다. 일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일은 할만 했고 어떤 일은 정말이지 '내가 이 돈 벌려고 이렇게 일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개중 가장 고달팠던 일은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서빙하는 일이었습니다. 최저임금에도 한참 못 미치는 2280원짜리 시급에 하루 평균 노동시간이 13시간을 찍는 일을 하고 있자니 참 남의 돈 먹는 게 어렵다는 게 실감이 났습니다.

공장아르바이트를 잠깐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통장 잔고 까먹으면서 살다가, 잔고는 언제나 0에 수렴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때였습니다. 공장에 다녀 본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다른 알바자리 많은데 왜 공장에 가니? 요즘 다 비정규직에 최저임금이야." 어차피 최저임금인 거, 그냥 집 근처 가까운 아르바이트자리면 족했습니다. 제겐 자기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는 일터가 필요했으니까요.

하루 일과가 자유시간만으로 꽉 채워질 때쯤, 저는 우연히 기륭과 동희오토에 가게 되었습니다. 기륭에는 '할일도 없는데 릴레이단식에 참여하러 가볼까!' 하고 갔는데, 공교롭게도 그 날이 릴레이단식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딱 하루만 굶었습니다. 다음날, 정말 맛있게 갈치속젓에 밥을 비벼먹었습니다. 기륭분회원들 음식솜씨가 장난 아닙니다. 막 들어갑니다. 충남 서산의 동희오토에는 "전어회 사준다"는 말에 낚여서 갔습니다. 가을전어는 날백수도 투쟁사업장에 가게 만들었습니다. 제철 음식은 언제나 옳습니다.

기륭에서도, 또 동희오토에서도 밥은 늘 맛있었습니다. 다만 보고 듣는 것은 맛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는 기업"이란 말이 참 상투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상투적인 말만큼 진실에 가까운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적개심에 불타는 투사들"이란 소리를 들으면서 '웃기고 있네' 하고 넘길 수 있는 담대한 기륭 분회원들이나, 자동차 트렁크로 공장에 잠입한 동희오토 조합원들을 보고 있자니, 노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만약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더라면 그냥 울고 말았겠지요. 화는 나더라도, 그렇게 버틸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마음이 강건해야 사람이 참 건전하게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물론 시간은 화살처럼 지나갔고 저는 슬슬 대학수학능력시험이란 것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2009년 3월부터 고등학교 3학년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잠시 학원에 등록하여 난생 처음 입시공부라는 걸 해봤습니다. 아시다시피 입시학원 종합반에 다니다 보면 세상과 단절됩니다. 도대체 바깥세상에서 뭘 하는지 모릅니다. 작년의 핫이슈였던 노무현 서거도 학원에서 정치수업 듣다가 '학감'이 들어와서 툭 한 마디 던지고 나가서 알았습니다.

그런 중에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에서 파업을 시작했단 말을 들었습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래도 쌍용차노조는 정규직 노조니 다른 비정규직 사업장보다야 상황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점점 사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역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습니다. 수능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충격과 공포에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공부 안 하는 애들이 스트레스는 더 받지 않습니까.

▲ "수능이 가까워지는 것과 동시에 수도와 전기가 끊겼다는 말이, 그런데도 공장에 생수통 하나 반입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어릴 적 서바이벌 백과사전에서 봤던, <사람이 물이 없을 때 버틸 수 있는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프레시안(손문상)
수능이 가까워지는 것과 동시에 수도와 전기가 끊겼다는 말이, 그런데도 공장에 생수통 하나 반입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어릴 적 서바이벌 백과사전에서 봤던, <사람이 물이 없을 때 버틸 수 있는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뜨악했습니다. 인터넷 뉴스의 사진 속에는 공장을 빙 둘러싸고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청년들과 생수통을 앞에 놓고 울부짖는, 노조원들의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그 수많은 이름 모를 실명들에 대해 저는 망연함만 느꼈습니다. 공장에 인화물질이 가득한데, 강경진압을 하다 불이 붙으면 근방 수십 킬로미터가 죄다 불바다가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할 말이 없었습니다. 수학 문제를 푸는 짬짬이 그저 그들이 몸 성한 채로 살아서 공장을 나오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모의고사를 두 번 치르고 나니 어느새 파업이 끝나 있었습니다. 며칠 된 인터넷 뉴스를 살펴보며 한숨을 쉬다가, 분노하다가, 무기력해지다가, 마침내 안도했습니다. 그래도 다행이었습니다. 목숨 붙이고 나온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저는 그때 먹는 '입'이 떠올랐습니다. 공장 안에서 밥을 먹는 노조원들, 또 남편을, 아버지를 기다리며 가슴 졸이는 가족들의 식사시간. 이런 것들과 제가 먹는 한 그릇의 밥, 가족이, 친구들이 먹는 밥이 연상되었습니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때문에 영영 먹지도 살지도 못한다면, 이 무슨 슬프기 짝이 없는 일입니까.

물론 시간이 지나자 쌍용은 점점 제 머릿속에서 잊혀갔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이슈가 생기다 사라지는 세상에서 여러 가지 이슈에 일일이 반응하며 희로애락을 하나하나 보이다가, 사상 최악의 물수능과 비전략적인 원서접수까지 겹쳐 저는 재수를 할 형편에 놓였습니다. 이제 와서 '공부 좀 할걸' 하고 후회해봤자 별 거 없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언제나 하던, 그리고 지금 바로 코앞에까지 들이친 고민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가? 재수를 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집에서는 돈을 대주지 '못할' 것이고, 나는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냥 시집이라도 가버릴까? 근데 나랑 결혼할 사람이 있기는 있을까? 아니 그냥 나는 왜 사는 걸까?

뭐 이런 실존적이면서 비루한 사유를 하던 도중 <당신과 나의 전쟁>이라는 쌍용자동차 옥쇄파업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거기서 다시 '입'들을 보았습니다. 식재료가 변변치 않아 그저 고추장 바른 주먹밥을 앙 먹는 입, 치킨과 맥주가 먹고 싶다는 입, 아내를 꼭 안아주고 싶다고 말하는 입, 입, 입들. 그렇게 말하는 입들에게 물 한 모금 허용치 않고, 물 대신 최루액이 비처럼 내리게 했던 일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쌍용차 노조에 대해 한 조합원이 말했습니다. "노조가 아니라 친목모임"이었다고요. 노동조합이 친목모임이 될 정도로 별 일 없이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공장 바깥에다 기중기와 컨테이너박스를 갖다 놓고, 컨테이너 박스 안에 특공대를 집어넣고 기중기로 공장 옥상에 운반하는 그 장면이 잊히지가 않습니다. 좁디좁은 한국사회에서 몇 다리만 건너면 서로 아는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싶은, "친목모임" 회원들과 특공대 젊은이들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치킨, 맥주, 소맥, 곱창과 같은, 먹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적으면서 "나가면 꼭 먹을 거예요" 하고 히히 웃는 입들에 '오버랩'되면서.

저는 여태까지 아무리 '공장'이라도 정규직이면 그나마 먹고 살만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휴일도 없이 일해 가면서 "너는 제사도 안 지내느냐"는 소리 들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순식간에 해고통보를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세상은 조금씩 바뀌었다지요? 저 91년생입니다. 소련 무너지던 해에 태어났습니다. 저는 '바뀌기 전의 세상'이라는 걸 알지 못합니다. 그건 제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들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아직도 불합리하고 부조리합니다. "으아악! 이게 뭐야!"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 이제 꼬박 스무 살입니다. 공부도 못하고 모아둔 돈도 없고 학력은 고교중퇴에 검정고시 졸업뿐입니다. 도대체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누가 고려대 다니다 자퇴 선언 했다는데, 제 입장에선 "그나마 고대생이니까 이슈라도 됐구나…."하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녀가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그놈의 대학에 그렇게 가고 싶습니다. 대학에 안 가면 당장 돈을 벌어야할 텐데, 제가 지금 갈 수 있는 '직장'은 공장 밖에 없을 테지요. 비정규직으로 채용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운이 좋아 정규직으로 채용되더라도, 글쎄요. 제가 안정적으로 계속 일할 가능성이 높을까요, 일방적인 해고통보를 받을 가능성이 높을까요? 세계적인 경제위기라고 떠들어대는 이 세상에서? 저는 후자가 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 통장잔고는 0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당장 휴대전화 요금을 내야 하는데 그 돈이 없습니다. 하지만 공장에 가지는 않을 겁니다. 계속, 먹고 살고 싶으니까요. 겨울밤 동치미 국물에 국수 말아서 후루룩 먹는 맛을 아는 사람들, 그러니까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그냥 안온하고 평범하게 살고 싶지만 그렇게 사는 게 제일 힘들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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