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쌍용차 노동자와 88만 원 세대, 같으면서 다른 그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쌍용차 노동자와 88만 원 세대, 같으면서 다른 그들" [쌍용자동차 파업, 그 후⑩] 77일의 파업 후 내가 달라진 것
2009년 8월 6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77일간의 옥쇄 파업을 마치고 공장 문을 나섰다. 직접적으로는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의 여파로 시작된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 더 원인을 파고 들어가면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된 해외자본의 국내기업 인수의 예고된 비극, 노동자 입장에서 따지면 한국사회에 깊게 뿌리 내린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성에 낳은 칼바람이었던 쌍용차 사태는 한국사회에서 큰 상징성을 갖고 있다. 그로부터 200여 일이 지난 지금 파업 참가 노동자들은, 쌍용 공장은,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어디쯤에 서 있는 것일까?

미행(美行)과 쌍용 파업 참여 노동자, 가족들 그리고 금속노조를 비롯한 다양한 노동, 정치, 사회 단체들과 현장 활동가, 르포작가, 교수, 작가, 블로거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각각의 관점에서 오늘을 진단해본다. "파업 그 후"부터 "88만원 세대와 쌍용"을 거쳐, "한국 사회와 노동자 파업"에 이르기까지 그들과 우리가 처한 오늘을 기록한다. 편집자

88만 원 세대. 과연 현재 나는 어떠한가 생각해 본다. 1993년 6월 그 당시의 대기업인 쌍용자동차란 회사에 입사했다. 젊고 젊은 20대 중반. 대기업에 입사해서 3개월 만에 정규직으로 채용이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자동차 회사가 있어 다행 이였는지도 모르겠다. 회사가 대기업이고 당시의 국내열손가락 안에든 모 그룹에 속해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노동조합이 있다. 내가 일하면서 어려운 일이나 고충이 있으면 언제든지 노동조합에 찾아가 고충을 이야기하고 고민을 털어 놓으면 그것을 해결해 주는 곳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복지 또한 적지 않다. 결혼해서 자녀 나면 학자금 나오고, 내가 야간대학에 들어가면 학자금까지 나오는 단체협약이 있고 다치면 공상과 산재로 인정해주는 곳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다니고 있는 직장이 평생직장이요 젊음을 이곳에 바쳐도 된다는 생각에 빠진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88만 원 세대란 단어 자체가 없었다. 한국 사회가 하루가 다르게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던 시대였던 것 같다. 내가 다니는 직장 만해도 차를 판매할 때, 영업사원이 고객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영업사원을 찾아가 사정하는 모습까지 목격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고 기막힐 노릇이다.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세월이 흘러 김영삼 정부 때였던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고 한국 사회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내 직장 또한 자금난으로 위기가 돌아오고 결국에는 인수 합병되는 처지의 신세가 되었다. 쌍용차를 인수한 기업은 바로 대우그룹이었다. 당시 총수였던 김우중 회장의 헐값 인수 소문이 돌았고 사내 분위기는 흉흉했지만 노동자인 우리들로서는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쌍용차에서 대우로 인수 합병된 후 관리직 포함 현장 근무 동료들은 희망퇴직으로 직장을 떠나야 했고, 영업으로 전직을 하는 동료들이 많았다. 당시 쌍용차와 대우차의 임금격차가 심했는데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급여 차이가 왜 나야 하는지에 대한 차츰 분노가 일어나는 분위기였다. 결국엔 동일노동과 동일임금 쟁취는 하지 못하고 임금격차를 조금 줄이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아마도 이때부터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날로 늘어나는 형국이었을 것이다. 2001년 대우 사태로 인하여 쌍용자동차는 대우에서 다시 쌍용차로 되돌아오고 워크아웃 기업 상태로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법정관리 이후 바로 급여체불이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평택시의 경제 또한 가게 문을 닫는 식당들이 즐비하였고 아예 평택시를 떠나는 자영업자도 많았다. 이로 인해 쌍용차는 다시 살아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고 법정관리 1년이 지난 후 워크아웃을 졸업하는 경이적인 힘을 발휘 하였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성과급을 받고 우리사주를 받아 다시 한 번 지갑이 두둑해지는 행복한 직장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법정관리 전 쌍용차 노동자들은 법정관리에서 벗어나려 피나는 노력을 다했다. 내가 다니는 내 직장 내가 지킨다는 신념이었던 거다. 그러고 나니 정부는 쌍용차를 해외 자본에 매각해 버렸다. 2001년 전 대우차에서 다시 쌍용차로 돌아오면서 2004년에 이르기까지 매년 흑자를 냈던 기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매각을 서둘렀다. 이에 쌍용차노동조합은 기술유출의 위험성을 알리고 해외 매각은 절대 안 된다고 주장했으며, 더욱이 중국 같은 외국계 기업은 더욱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는 노동조합의 요구에 불응하고 2004년 11월에 중국 상하이차라는 기업에 매각을 하고 말았다.

상하이차는 쌍용차를 인수하면서 매년 3000억 원씩 4년 동안 1조2000억 원을 투자하겠다고 약속을 하였으나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것이 2008년 12월 법정관리 신청 과정에서 드러났다. 3년 동안 쌍용차를 경영하면서 상하이차는 기술을 빼가는 데만 열을 올렸다. 그로 인해 2006년부터 흑자였던 쌍용차는 적자로 돌아섰고 그 적자가 매년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인 신차개발을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차 없이 쌍용차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로 인해 쌍용차 노동조합은 상하이차에 신차개발 촉구와 투자약속 이행하라고 주장했지만 묵살되었다.

2008년 말 노동조합 임원 선거를 틈타 진보적 성향의 노동조합 임원이 당선되자 노동조합 길들이기를 시작하였다. 임금체불은 물론 복지축소로 노동조합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임금체불로 인해 쌍용차 노동자들의 생활은 힘겨웠으며 은행에 대출을 받아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와 돌이켜 보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힘겨움은 그 이전부터였다. 그동안 쌍용차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불법파견을 눈감아 주었으며 더 나아가 사측에 의한 도급화를 도와주는 노동조합이, 노동자가 해서는 안 되는 배반을 수없이 해왔다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노동조합은 정규직 중심이었고, 그나마 진보적인 성향의 노동조합은 선출되지 못했었다.

노동조합을 떠나 우리들 자신이 과거 임금격차에 분노했으면서, 같은 일을 하지만 우리보다 훨씬 낮은 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을 책임지지 못했다. 그저,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며 바라만 보았던 것 같다. 현장 라인에서 일하는 바로 옆 동료가 비정규직이고 동일 노동을 하면서도 그들은 정규직의 70%가량 밖에 되지 않는 급여를 받았고 노동법과 단협은 정규직만의 것이었다. 구조조정을 하게 되면 정규직보다 비정규직 동료들이 먼저 떠나고 그 모습을 보면서 남의 일이 아닌데 나 또한 저럴 수 있겠구나 하고 늘 생각해 왔는데 결국 그런 현실은 너무 빨리 찾아오고야 말았다.

▲"정리해고를 당해보니 가정생활은 한없이 궁핍해지고 허리띠를 더 이상 졸릴 수도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프레시안(여정민)

임금체불 때문에 나와 동료들은 이곳저곳 은행들을 전전 긍긍하면서 어떻게든 대출을 받아 살아보려고 노력하였으나 허사였다. 정리해고를 당해보니 가정생활은 한없이 궁핍해지고 허리띠를 더 이상 졸릴 수도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실업급여를 받고도 모자라 막노동을 나가 벌어도 비오는 날은 집에서 쉬어야 하고 저녁 늦게 대리운전을 해도 경제가 어려워 대리운전 하는 사람도 드물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도 기껏해야 60~70만 원 아니 그 정도면 많이 타는 거라는 얘기에 도대체 얼마를 벌어야 많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 달이면 실업급여 수급이 끝나는 달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고민해 보지만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정부는 300만 개 일자리 창출을 한다는데 그 300만 일자리 중에 나에게 돌아올 일자리는 과연 있을까?

희망퇴직을 했던 어느 동료의 하소연이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자기는 노동운동의 '노'자도 몰라, 그저 두려워서 희망퇴직을 했고 다시 취업해 열심히 일하면 된다고 생각 했는데, 이력서에 쌍용차에 다녔었다고 하면 서류전형에서 그 즉시 퇴짜란다. 한번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열 번 넘게 이력서를 넣은 곳에서 조차도 서류전형에서 바로 탈락했다 한다. 어이없어 쌍용차 경력을 뺏더니 면접 후 바로 일하게 되었는데 어찌 알았는지 사측에서는 왜 쌍용차 경력을 쓰지 않았냐면서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라고 했다 한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쌍용차에서 적게는 10년 많게는 20년 이상 다녔던 곳이고 젊은 청춘을 받쳤던 곳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져야 하는지 어디서 하소연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쌍용자동차와 88만 원 세대. 너무나 막연하다. 과연 세대 간의 불균형일까. 아니면 현 정부의 정책의 불균형일까? 아니면, 한국사회 자체의 불균형일까?

상위 10%가 남한사회를 이끌고 있으며, 기득권이 득실거리는 사회에 88만 원이 아닌 그 이하의 세대가 늘어나는 현재의 모습에 과연 나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빠진다. 87년 민주화 운동으로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를 맞이했다지만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시절에도 서민들의 삶은 여전했던 것이 아닐까?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자고 떠들어 대는데 그가 공약을 내세운 747은 허공에 불과하고 국가부채 700조, 단기시간근로자 500만, 빈부격차 7.8배로 OECD국가 중 최하위다. 그러면서 잃어버린 10년을 찾는다고 떠들어 대고 있다. 진정 우리 사회가 잃어버렸고, 되찾아야할 사람들은 88만 원 세대라 불리는 20대와 지금에 와서 제2의 88만 원 세대가 되어 가고 있는 비정규 노동자와 생산직 노동자, 나이 먹고 폐품 처리 되듯 버려지고 있는 늙은 노동자들 아닐까?

예전 쌍용 자동차 공장 안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우리가 제대로 고민하지 못했던 것처럼, 지난 10년 동안 조금씩, 조금씩 빼앗겨 이제는 88만 원 세대라는 이름까지 생겨버린 청년과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나이 많은 고령 노동자들을 소홀히해왔던 것은 아닐까? 공장 안에서 비정규직과 연대가 부족했듯이, 88만 원 세대와 고령 노동자, 정말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과 연대하지 못했던 것이 문제 아닐까? 그리고 그 대가를 지금 치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이런 기억도 난다. 지난 대선 때 우리 동네 시장에서 장사하는 할머니는 "이명박이 시장을 활성화 시키고 살려준다고 해서 찍었다"고 하셨다. 그 순진한 시장 할머니는 이 대통령이 말하는 '시장'이 어느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래시장인줄 아셨던 모양이었다. 이렇듯 서민들은 순진하고 노동자 또한 순진한데 언제까지 순진하게만 살 것인지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노동자 서민은 서로가 같은 처지인 걸 잊고 연대하지 못하고, 함께 하지 못해 결국은 모두가 고통스러운 지경에 처한 것은 아닐까?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 걸까?

내가 보는 단체들은 너무도 관료화 되어있다. 민주노동당이 그렇고 민주노총, 금속노조가 그렇고 각 단위 지부의 노동조합이 그렇다. 난 그것이 두렵다. 벼는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인데 사람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뻣뻣해지는 현실이 난 두렵다. 나는 국민파가 무엇이고, 중앙파가 무엇이고 NL과 PL 그리고 전국회의가 뭔지도 모른다. 글 안에서만 싸우고, 글 밖에서는 실천하지 않는 것도 같다.

내가 존경 하는 분이 한 분 계신다. 김진숙이란 여인이다. 우리의 든든한 아줌마요 누나요 여장부라 생각한다. 지난 2월 4일 한진중공업을 찾았을 때, 그 여인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맞서기 위해 23일째 홀로 단식을 하고 있었다. 누구를 위한 단식이었을까? 빼빼마른 몸으로 우리 일행을 맞이했을 때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말로써, 글로써 어느 누구 못지않게 입담이 좋으신 그 여인은 홀로 천막을 지키고 있었다. 몇 마디 말은 하지 못했으나 쌍용차 동지들도 힘내라고 하신 그 한마디가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다. 힘없는 그 모습에 악수를 청했을 때. 그녀의 손은 힘이 넘쳐났다. 23일을 단식하고도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그 당당한 모습 그 어느 누가 따라가랴. 그녀는 그랬다. 너무 존경스러웠다. 일행이 떠나는 모습을 텐트 밖에서 지켜보는 그 모습이 아직도 나의 가슴에 잊혀 지지 않는다.

전국 어디에서 투쟁의 현장을 찾노라면 연맹 간부들 그리고 노조 간부들이 즐비하다. 나 같은 작은 노동자는 그들의 눈에 그저 투쟁현장에 있는 조합원일 뿐이다. 아는 척도 간부들끼리만 하고 그저 투쟁의 현장에 모여 있는 조합원은 안중에 없다. 이것 또한 일부분이겠지만 난 그렇게 늘 느낀다.(나만 그럴까?) 그들도 내 위치에선 나 같은 마음이었을 텐데 어쩌다 조합원에게, 노동자 서민들에게 신뢰받지 못했던 것일까?

어쩌면 시작은 나부터, 우리부터 반성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공장 안의 비정규 노동자가 남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노동자라는 것을 망각했던 것, 88만 원 세대와 고령 노동자, 최저임금 노동자, 우리 사회의 많은 또 다른 힘없고 고통스런 노동자들이 남이 아니고 우리라는 것을 잊었던 것을 반성하는 것. 그것부터가 시작이 아닐까?

난 17년을 직장생활한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였다. 88만 원세대를 어떻게 볼인지 이제야 조금 눈을 뜨고 있다. 그들은 결국 우리 옆자리에서 같은 일을 했지만 적은 임금을 받아야했고, 먼저 떠나야했던 비정규직 같은 것 아닐까? 그 비정규직이 하나의 세대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 아닐까?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은 요즘 모이면 이런 얘기를 한다. "이제 갚아야 한다." 그동안 제대로 연대하지 못하고, 제대로 함께 하지 못했던 우리들에게 세상은, 다른 노동자 동지들은 함께 해주었다. 우리가 좋아서가 아닐 것이다. 우리 싸움을 그들의 싸움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그때서야 깨달았던 것을 그들은 진작부터 깨닫고 함께 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갚아야 한다.

88만 원 세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는 것은 알겠다. 우리가 그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수많은 비정규직과 힘 없는 노동자들, 서민들이 그렇듯이. 그래야만 권력 있고 돈 있는 사람만 살만한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것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2-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