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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를 딛고 강은 흘러야 한다, 반짝이며 유전자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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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불우를 딛고 강은 흘러야 한다, 반짝이며 유전자 속으로" [강은 강처럼 흐르게 하라·4] 양지꽃은 빛을 머금고 있었다
마애습지를 지나 병산서원 가는 길에서 생전 처음 만나게 된 양지꽃은 자그마했지만 몸속에 빛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우거진 수풀 때문에 조금 어둑해진 길을 밝혀주는 길라잡이 꽃 같았다. 나는 노랑 양지꽃의 손을 잡고 첫 순례에 나섰다. 낙동강 순례 길에 만난 양지꽃은 빛의 기원으로 느껴졌다. 공사가 진행되기 전의 강 주변의 자연 풍경은 인간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고유의 아름다움을, 야생의 아름다움을 우주의 기원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준설이 시작되기 전인 낙동강 39공구 주변을 둘라보며 꽃의 낱낱을 들풀의 낱낱을 모래의 낱낱을 읽고 새기고 싶었다. 언젠가 책을 펼쳤을 때 섬진강의 모래가 와르르 쏟아졌던 것처럼 덕분에 오래전에 가졌던 섬진강의 시간을 다시 기억하고 마주하고 새로운 걸음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처럼 강은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마주보며 성찰할 수 있는 자의식의 심연 같은 것이다. 고라니가 물을 마시려 입을 댈 때마다 흔들리는 강의 수면은 기억이 아니라 거울이다. 은유이고 정신이다. 나는 병산 서원의 누각 만대루에서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상징적 의미 속에 존재하는 아버지처럼 강, 그것은 은유이다.

ⓒ조우혜

서고가 숨어 있다는 만대루에는 두보의 시 한 구절이 남아 있었다. "푸른 절벽은 해질 무렵 마주하기 좋으니, 만대루에서 저녁 무렵에 푸른 절벽을 마주하다"라는. 온종일 강학에 힘쓰던 서원의 옛 선비들이 저녁 무렵에야 휴식을 취하며 마주본 것은 강변의 푸른 절벽이었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절벽을 마주 바라보았다는 것은 학문적 실존적 깨우침은 중단하는 일이 없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강물을 바라보며 절벽을 바라보며 책을 읽는 동안의 사유를 다시 가다듬고 정진하고 그랬다는 뜻일 거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마주보는 강은, 푸른 절벽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인류의 과거가 마주하던 것이고 인류의 미래가 마주할 자산이다. 푸른 척추가 반듯한 시간이 병산서원의 만대루에는 숨겨진 서고와 마찬가지로 숨겨진 정신으로, 사유로 흘러가는 것이다. 내가 걸어본 낙동강 유역에는 유네스코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지만 함부로 파낼 수 없는 푸른 절경들이 만대루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낙동강 23공구, 29공구, 30공구, 33공구, 35공구, 39공구, 혁신의 이름으로도, 토건의 이름으로도 모두가 공유해야 하는 강물을 휘저어 흙탕물로 만드는 일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유전자 속에서도 강물은 맑게 흘러가야 한다. "녹색 뉴딜 4대강 살리기" 혹은 "한반도 젖줄을 살린다"는 문구의 표지판을 버젓이 내건 채 강을 거꾸로 뒤집어서 창자까지 훑어 내리는 생태계 참사현장에서 아직 빛을 품고 있는 노랑 양지꽃을 만나게 된 것은 다행이었고 행운이었다.

ⓒ김흥구

낙동강 순례를 나선지 반나절도 되지 않아 비경과 절경을 지나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파헤쳐진 풍경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상주보에는 녹색 뉴딜 낙동강 33공구라는 플랜카드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준설 작업이 이루어진 주변에는 나무 한 그루 남아 있지 않았다. 청강부대가 투입되어 밤낮으로 파헤치고 밀어붙인 덕분에 낙동강 35공구는 초토화 되어 있었다. 높이 쌓아 올린 준설 토 위에 나무들의 무덤, 꽃들의 무덤, 수생생물들의 무덤이 패총처럼 쌓여 있었고 역사가들의 무덤, 천문학자들의 무덤, 조류학자들의 무덤, 시인들의 무덤, 계절마다 찾아오는 철새들의 무덤, 나비들의 무덤, 야생 동물들의 무덤이 환각처럼 겹쳐 보였다.

구미에서 가장 아름다웠다는 구미강변은 좌우로 상처의 데칼코마니를 이루고 있었다. 마을 하나가 완전히 소실되고 없었다. 훼손되기 전의 낙동강변이 얼마나 반짝반짝 살아 있었는지 이미 보아온 터라 전면적이고 공격적이고 광적인 개발이 실감났다. 포클레인이 한창 날을 대는 강 유역은 너덜너덜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아 있는 생물들은 궁기에 시달리고 주눅 들어 있었다. 수중 식물, 수중 물고기, 강 인근의 동식물들이 대량 살생의 고통을 단말마의 고통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감내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다 집에서 기른 호접란과 독대했을 때 좌심방 우심실처럼 올라온 둥그런 새순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이 콩닥이는 느낌을 분명히 가졌던 경험이 있다. 지평을 향해 낮고 낮은 자세로 기어가는, 모래바닥에 뿌리를 내리는 습지 식물들의 악착같은 생명력, 생존 본능, 근성을 절단 내고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일이 수개월 동안 밤낮으로 자행되고 있는 현장에서 초록의 피비린내를 맡았다.

내가 본 낙동강 물줄기들은 대체로 맑아 보였다. 반짝이며 흘러가는 적요를 뒤집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반경 2km에서 4km까지, 그 반경 안에 있던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나무든 습지이든 바위든 사과나무 과수원이든 마늘 농사를 짓던 농지이든 포클레인으로 허물고 찢고 밀어내고 내던지고 뽑아버려 콘크리트로 봉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강의 심장부에 철근 구조물을 박고 물을 가두고 수위를 높여 배를 띄우지 않는다면, 운하가 아니라면 그렇게 대대적으로 생태계와의 전쟁을 치르듯 무리하게 속도를 낼 일은 없을 것이다.

ⓒ낙동강지키기부산시민운동본부

우리 생의 표본들, 살아 숨 쉬는 생태 표본을 없애고 그 자리에 인공 생태 습지나 공원을 만든다면 공연장이나 전시장이나 운동장이나 자전거 도로를 만든다면 생태계가 어떤 히스테리를 부릴지 어떤 재앙을 몰고 올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인간은 때로는 유리에 붙은 나방보다도 꽃보다도 새보다도 더 약할 때가 있다.

생명의 표본은 나비채집이나 곤충채집하듯 망으로 포획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유리너머로만 볼 수 없는, 생태 박물관에 가둘 수도 없는 생명의 표본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다. 때로는 생명의 표본이 미학의 표본이 되기도 한다. 다른 종과 속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도 인간 자신의 생의 에너지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강을, 자연을 생명의 표본으로 남겨 놓아야 한다. 끊임없이 인간의 욕망을 성찰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고 겸허하게 하는 자정작용을 강이 아니라면, 자연이 아니라면 누가 하겠는가. 인간은 유구하게 흐르는 강의 역사에 자신들의 역사를 비추며 불우를 견뎌왔다. 이기심에서라도 인간을 위해서라도 손대지 않아도 되는 강은 깨끗한 강은 표본으로, 은유로 남겨둬야 한다.

상주보로부터 물길로만 따져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낙동강의 절경 중의 하나인 경천대가 있었다. 순례하던 걸음을 멈추고 콘크리트 속으로 곧 파묻히게 될 경천대 모래밭에서 문수 스님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108배를 하며 모래무지에 이마를 묻으며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연민과 슬픔이 있었다. 뉴를 탐하고 딜을 탐하고 패키지를 탐하는 인간의 욕망이 슬펐다. 나는 모래밭에 이마를 더 깊이 수그린 채 강이 불우를 딛고 살아 흐르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이번엔 '4대강 참사'다. 막무가내식 개발 정책으로 용산에서 5명의 철거민이 목숨을 잃은데 이어, 이번엔 4대강의 현장에 기대 살아온 숱한 생명들이 정부의 4대강 사업으로 사그라지고 있다. 강가에서 오랜 세월 터를 잡아온 이름없는 풀과 벌레들부터, 이들의 죽음을 두고만 볼 순 없다며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인 수행자까지, 그렇게 꺼져가는 많은 '생명들' 앞에 개발의 삽날은 냉정할 뿐이다.

지난해 용산 참사에서 드러난 '개발 시대'의 잔혹성을 기록해 <프레시안>에 연재했던 문화예술인들이, 이번엔 4대강의 현장으로 나섰다. '작가선언 6.9'는 지난해 용산 참사 시국선언을 계기로 결성된 문화예술인들의 모임으로, 이번엔 '4대강 참사'의 현장에서 목도한 현실을 시와 글로, 그림으로 표현해 <프레시안> 지면에 연재할 예정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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