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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은 살아있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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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은 살아있는 시간이다 [강은 강처럼 흐르게 하라·7] 시간을 따라 걷기
더듬거리던 시간을 명확히 하고자 떠난 길이기도 했다. 강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일종의 위안이었을 것이다. 그곳에 가면 무엇인가 나를 감싸줄 수 있을 것 같은 시간이 기다려줄 것 같았다.

막연하게 '4대강 살리기'가 '4대강 죽이기'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일종의 의무감이었을 뿐, 구불구불한 강이 직선의 강이 된다고 한들 나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익숙해지면 그만이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 그렇게 시작된 낙동강 따라 걷기였다.

ⓒ노순택

습지를 헤치고 앞으로 걸어가는 것은 고역이었다. 축축한 기운들이 나를 휘감는다. 한발을 내딛을 때마다 무엇인가 걸렸다. 더 이상 가면 안 됨! 이라고 외치는 것처럼. 습지엔 수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한 생물들이 날고, 뛰고, 기고 있었다. 멀리서 보던 억새풀은 조용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았는데 억새가 흔들리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이 흔들었던 까닭이다. 육지와 물의 생물들을 이어주는 습지, 그 습지가 이제 사라지려 한다. 더 이상 들어오지 말라고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다. 습지를 가로질러 나왔다. 서울의 습기를 생각했던 나는 멍했다. 습지의 습기는 끈적끈적한 서울의 습기와는 달랐다. 설명할 순 없지만 상쾌했고 명랑했다. 4대강 살리기란 이름으로 이제 습지를 없애려 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살리기인가?

강을 느껴보라고 했다. 내성천 모래를 밟고 걷고 또 걸었다. 뜨거운 여름의 중심에서 발바닥은 서걱서걱 말랐다. 모래를 밟고 걷는 그 느낌이라니! 바다의 모래를 생각했다면 큰 오산. 신발을 가지런히 모래에 맡기고 강을 가로질렀다. 비가 온 뒤 흙탕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송사리는 건강하게 헤엄쳤고 강물은 빠르게 흘렀다. 다리 사이를 지나는 강물의 몸짓을 느껴보았을까. 내 다리는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찌릿찌릿. 이제 낙동강에서의 이런 느낌을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하는 것일까. 오래전 그런 강이 있었다고. 가로막힌 강이 아니라 조용하게 나지막하게 느리게 흐르던 강이 있었다고 단지 이야깃거리로만 들려줘야 하는 것인가.

ⓒ조우혜

아, 이건 정말 말이 안 된다. 저 강의 모래로 산을 쌓다니. 준설토는 이제 민둥산의 모습으로 떠억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푸른색들은 지워지고 있었다. 농경지는 내버려져 있어 풀이 내 허리까지 자라있었다. 저 농경지는 이제 준설토로 채워질 것이고 2년 동안 버려진 땅이 될 것이다. 준설토를 밟고 올라섰다. 모래의 힘은 아주 약해 내 무릎까지 집어삼켰다. 강물을 떠받치던 모래가 이제는 쓸모없는 흙이 되어 버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잉여집단이 된 것이다. 살아 움직이던 것들이 상주보에서는 멈췄다. 움직이는 것은 오직 포클레인과 그것을 조종하고 지휘하는 사람들 뿐이었다. 버려진 과수원에서 햇살을 받고 사과가 자라고 있었다. 탁구공만한 사과를 베어 물었다. 시큼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음에도 사과는 제 몫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더욱 나를 슬프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에 담아지지 않은 것들은 호소력이 없다고 했다. 공학적 숫자는 나는 잘 모른다. 강을 파헤치는 것이 얼마나 이익인가를 따질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사라질 모든 생물들이 잠시 왔다가 가는 공간에서 도대체 어디까지 개발할 것이며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 것인가.

ⓒ노순택

ⓒ성남훈

편리한 생활을 누리고 싶은 것은 나또한 바라는 바다. 가장 결정적으로 나는 겁도 많다. 하지만, 정도를 넘어선 권력의 횡포 앞에서 더 이상 무기력하게 있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우리는 부수는 일에만 몰두하지는 않은가. 그냥 흐르는 대로 놔두는 것도 재생의 한 방법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가. 시간은 흐른다. 내가 찾던 시간도 흘러갔을 것이다. 저 강물과 함께.

4대강 사업이 누구를 위한 사업이며, 그것이 왜 살리기가 아니라 죽이기인지 글을 통해 알려고 하지 말기를. 그 어떤 글을 통해서도 보는 것 이상의 절실함과 분노와 뉘우침을 찾아볼 수 없다. 준설토가 흘러내리고 타워크레인에 올라가 농성을 하고 살아있는 것들이 죽어나간다 해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절실함, 얌전히 있기에는 너무나도 끔찍한 이 진실을 느껴야 한다. 현장으로 가서 느껴보길 권한다. 그 어떤 글보다도 그 어떤 공학적 숫자보다도 정확한 사실을 보여줄 것이다.

이번엔 '4대강 참사'다. 막무가내식 개발 정책으로 용산에서 5명의 철거민이 목숨을 잃은데 이어, 이번엔 4대강의 현장에 기대 살아온 숱한 생명들이 정부의 4대강 사업으로 사그라지고 있다. 강가에서 오랜 세월 터를 잡아온 이름없는 풀과 벌레들부터, 이들의 죽음을 두고만 볼 순 없다며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인 수행자까지, 그렇게 꺼져가는 많은 '생명들' 앞에 개발의 삽날은 냉정할 뿐이다.

지난해 용산 참사에서 드러난 '개발 시대'의 잔혹성을 기록해 <프레시안>에 연재했던 문화예술
인들이, 이번엔 4대강의 현장으로 나섰다. '작가선언 6.9'는 지난해 용산 참사 시국선언을 계기로 결성된 문화예술인들의 모임으로, 이번엔 '4대강 참사'의 현장에서 목도한 현실을 시와 글로, 그림으로 표현해 <프레시안> 지면에 연재할 예정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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