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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된 노동'의 최전선에 선 노동자 12명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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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배제된 노동'의 최전선에 선 노동자 12명의 절규 [세상이 'J'에게·⑤] "이 시대 노동의 게토지대, 재능교육 투쟁"
재능교육 학습지노동자들이 스스로의 노동권을 찾고자 거리로 나선 지 2012년 1월 28일로 꼬박 1500일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서울 한 복판, 시청광장에서 보이되 보이지 않는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 오랜 한뎃잠에 몸도 마음도 축이 나고, 바닥의 한기도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언제까지 이들이 풍천노숙을 해야할까. 재능교육 노동자들을 위해 많은 이들이 그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프레시안은> B급 좌파가, 작가가, 노동운동가가, 청년이, 혹은 당 대표가 그들에게 전하는 목소리를 릴레이로 싣는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와 재능out 국민운동본부에서 공동으로 기획했다. 그들이, 혹은 세상이 재능노동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편집자>


"따스한 집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는 당신, 집으로 돌아오면 따뜻한 음식과 다정한 얼굴을 만나는 당신, 생각해보라 이것이 인간인지."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최근 있었던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희망뚜벅이' 행사의 표제어는 "얼지 마, 죽지 마, 함께 살자!"였다. 1990년에 개봉된 비탈리 카네프스키의 영화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 거야>에서 빌려온 게 아닐까. 1940년대 후반의 강제노동막사가 있는 러시아 극동의 한 유배지의 암울한 현실이 배경인 영화의 제목이 2012년 한국의 노동현실과 결부되고 있다.

서울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에서 출발하여 평택 쌍용자동차 앞 '희망텐트'에 도착하는 이 행사 여정의 곳곳은 아닌 게 아니라 상처받고 내버려진 노동의 빙하지대, 혹은 이 시대 노동의 게토(ghetto)지대들이다. 돌아보지 않고, 기억하지 않고, 좀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찾지 않는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는 그럴수록 인간의 한계 밖으로 걸어가고픈 잔인한 유혹에 시달려야 한다. 이 기막힌 겨울여행의 출발지인 재능교육 거리농성장, 이미 몇 차례의 겨울을 넘기며 1500일을 넘게 싸우고 있는 그곳에선 지난 1월 한 사람의 해고노동자가 세상을 등져야 했다. 비록 얼어 죽지 않고 암으로 숨졌지만.

인간이라면 이렇게까지 할 리가 없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책 <이것이 인간인가>가 죽음의 수용소의 잔혹상을 고발하는 책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몇몇 측면에 대한 조용한 연구'라고 정의한 바 있다. 아우슈비츠는 인간 이성의 승리를 제창한 서구 계몽주의의 파산을 실증하는 것이었다. '인간이라면 이렇게까지는 할 리가 없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이 실제로 행해졌다는 의미에서 우선 그렇다. 그것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서구의 근대적 이성이 지닌 실체를 드러낸 것이었다.

느닷없이 무슨 아우슈비츠고 게토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죽음의 수용소나 음산한 높은 담장 안의 게토를 상상하기엔 21세기 서울 도심은 너무 말끔하고 매끄럽게 디자인되어 있으니까. <고요함의 폭력>의 저자 비비안느 포레스테의 서술처럼, 간혹 허술한 천막이나 바리게이트가 철거되는 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정치적 투쟁은 늘 치안의 문제로, 겉으로 보면 대수롭지 않은 미세한 소송으로 분절되고, 울분과 호소와 외침과 싸움의 잔해들이 분리수거된 거리에는 무표정한 표정의 사람들이 그만그만한 목소리를 내며 일정한 걸음걸이로 걷어간다.

사실은 20세기 중반에도 그랬다. 어떻게 수백만의 학살이 유럽 한복판에서 자행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를 수 있었냐는 물음에 레비는 이렇게 답했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라고. 게토라는 말의 어원에는 '절연絶緣'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간혹 게토와 바깥세상을 나누는 단절의 벽을 선의로 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그 주위엔 훨씬 두터운 무관심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다. 오늘날은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를 나누는 절연의 기교가 너무 정교하거나 혹은 너무 광범위하여 얼어 죽기 전에 35미터 상공의 크레인이나 송전탑 같은 곳에 기어오르기 전까지 사람들은 그 경계를 의식하지 못한다.

ⓒ노동과세계(이명익)

공포의 이데올로기, 특수고용노동자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을 자본은 '특수 형태 근로 종사자'라 부른다. "너희는 노동자가 아니라 사장들이다. 자신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자본의 주장은 의외로 사람들에게 잘 먹혀 들어간다. 노동자에게서 노동자성을 박탈하는 이 '특수고용 노동자'라는 잔혹한 말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유연한 노동시장'에선 꽤 매혹적인 말로 둔갑한다.

학습지 시장이 비약적으로 성공한 것은 1990년대 중반, 특히 IMF체제가 한국사회를 강타한 1997년 이후라고 알고 있다. 국제통화기금의 구조조정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김대중 정부에 와서 정리해고는 법제화되고 그에 따라 노동은 가파르게 '비정규화'되어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무렵 나타난 '국가인적자원개발기본계획'이란 것이다. '인간=자원'이란 등식을 성립시킨 이 계획에 조응하여 수립된 신교육체제와 제7차 교육과정으로 대표되는 지난 20년 간 한국 교육체제의 변화과정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언표는 '자기' '자기계발' '자기경영'이었다. '자기경영'이라, 이 얼마나 그럴듯한 말인가? 그런데 이 '자기경영'이란 말에는 '자기책임'이란 말이 언제나 따라붙는다. 이것이 이른바 그들이 말하는 '기업가정신'이다. 그래서 각각의 '소사장'인 학습지 교사들 앞에 '월급 560원'이 돌아와도 이건 어디까지나 '자기책임'이 되는 방정식이 성립하게 된다.

이 공포의 새로운 이데올로기 앞에서 사람들은 '자기계발하는 주체'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본이 던져주는 노동과제를 특근과 잔업을 마다않고 움켜잡아야 하고 비정규직 차별을 묵인하거나 때로는 더럽고 어려운 일을 아웃소싱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외주노동의 세분화에 따라 비정규 불안정 노동의 서열화도 이루어진다. 왜 조직되고 단결된 노동이 이 악랄한 자본의 공세에 저항하지 않느냐고? 그것은 민주노총이 '희망버스'에 투쟁을 외주준 것이 아니냐는 자조어린 질문처럼, 언제라도 '배제된 자'들의 경계로 밀려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기고용'이 중요한 주체들에게는 가혹한 물음이 될지도 모른다.

뻔뻔한 교육자본에 대한 절규

삶 자체가 게토화되어가는 경제적 공포의 시대에 자기계발의 강박은 사교육시장의 팽창을 가져왔다. '있는 집' 아이들은 과거의 386들이 주름잡는 강남의 학원들로 갈 수 있었지만, 대다수 '없는 집' 부모들은 아이들을 변두리 학원으로라도 보내기 위해 보험영업이나, 그도 안 되면 할인마트 계산대에라도 서야 했다. 학습지 교육자본에게 이는 황금시대를 의미했다. 우리시대의 시인 송경동은 재능교육자본을 저주하는 시에서 교육만큼은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절규했지만, 자기계발의 시대에 교육만큼 상품이 되기 쉬운 것도 없었다. 가난한 미취학 아동이나 초등학생에게 학습지는 그나마 계층상승의 사다리에 발을 올려놓는 길이었을 테다. 한편에는 가정으로부터, 광범위한 실업군으로부터 불러낼 수 있는 값싼 노동들이 존재하고 불안의 강도에 따라 시장은 넓어져 갔으니 학습지 자본이 주식상장 100위로 진입하는 일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재능교육에 노조가 만들어진 것이 바로 그 무렵인 1999년이고 한때 노조원이 3000명에 달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15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고작 10여 명의 조합원들이 거대한 교육자본에 맞서 거리에서의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대법원이 이들 학습지 교사들이 제기한 부당노동행위 인정 문제에 대해 "학습지 교사는 회사와 사용종속관계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자로 볼 수 없어 이들을 조합원으로 하는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 정한 노동조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며 "회사가 위 조합의 단체교섭요구에 응하지 않은 것을 부당노동행위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던 것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11월이었다.

이후 법원은 자본의 손을 들어주어 회사 측이 재능교육 해고 노동자들에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을 인정하여 조합원과 노조의 차량과 집기를 압류한 데 이어 실제 경매처분에 들어가기도 했다. 1500일을 싸워도 자본이 눈 하나 깜박 않고 '그래서 어쩔 건대?'라는 태도를 보이는 데는 '민주화 10년' 동안 자유주의 정권이 추진해온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이 단단히 뒷받침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부모들의 주머니를 터는 야만의 학습지 자본

혹한의 겨울과 싸우고 있는 12명의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요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이 너무 간명한 것이어서 속으로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1970년 전태일이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다면, 대부분이 여성들인 이들 조합원들이 1500일이 넘도록 "우리도 노동자임을 인정하라!"고 부르짖어도 대답이 없는 이 시대를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안정된 노동이 '특권'이 되어버린 시대에 쓰고 버려도 넘쳐나는 불안정 노동자를 노동자로 불러주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고작해야 12명의 전원복직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무어 그리 어려운가 싶지만, 이 사회를 지배하는 경제체제에 '유용한' 자들임을 끊임없이 입증하도록 강제하는 배제의 정교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쉽게 양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계약직, 임시직, 파견직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비록 불안정한 조건에 있어도 '노동자'임을 인정하지만, 그조차 인정 않고 노동의 결과 전체를 압수해버릴 수 있는 '특수고용 노동자' 집단을 존속시키는 것은 '유연한 노동시장'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서도 전체 노동에 신자유주의적 규율을 강요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불안정한 노동의 게토에 빨대를 내고 가난한 부모들의 주머니를 털고 노동을 통째로 수탈하는 학습지 자본은 야만적인 한국자본주의에 피는 더러운 꽃인 것이다.

탈취당한 노동을 되찾는 근원적 싸움

재능교육 교사들의 투쟁이 놓인 자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이리 힘들고 가혹하고 처절해야 하는 것이다. 그곳은 배제된 노동의 최전선이며 '자기책임론'으로 무장한 채 인간을 삶의 게토로 인간 한계의 밖으로 몰아넣는 신자유주의와의 가장 치열한 사상투쟁의 장이다. 단지 불쌍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라면 농성장에 오지 말라는 재능노조 유명자 위원장의 아픈 질책은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단지 재능교육이라는 한 추악한 교육자본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싸움은 그것을 낳은 구조인 자본-국가-의회의 동맹체제를 떠받치는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시작된 근원적인 싸움인 것이다.

탈취당한 노동에 다시 노동자성을 부여하는 싸움! 이것은 모든 개인을 철저히 '자기'로 쪼개고 그 속으로 몰아넣어 '자신을 제외한 만인에 대한 소모전'을 수행하게 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의 싸움에 다름 아니다. 공허한 '자기' 속으로의 후퇴를 거절하고 자신의 고단한 삶으로 되돌아와 그것을 응시하고, 고통의 원인을 캐물으며, 그것을 쉽게 운명이라 생각하여 미리부터 포기하지 않고 자본이 강요하는 허무와의 싸움을 시작하는 것, 그리하여 다시 '성난 얼굴'로 자기 시대와 맞서 참된 자유인으로 우뚝 서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빌리자면, 올더스 헉슬리와 조지 오웰이 상상했던 두 가지 디스토피아는 다음의 이유로 다르다. "오웰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헉슬리의 세계에서도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오웰의 <1984>가 박정희 시대와 닮은 면이 있다면, 오늘의 기업지배국가와 닮은 것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이다. 자본에 대한 '자발적 복종'이 완벽히 구현되는 세계 말이다. 서로에게 철두철미하게 무관심하면서.

다시 프리모 레비로 돌아가자면,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싸움은 '배제된 자'들, 또는 자본에 의해 삭제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내적 해방'을 위한 싸움이다. 자본의 명령에 의해 자신의 노동자성마저 박탈당하고 기본적인 인간적 요구조차 거부당한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규범을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반란의 규범'이며 사회적 연대의 규범이다. 이로부터 달아나는 '진보정치'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마저 거절하고 거리에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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