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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폭등-증시폭락 부른 5개 신도시 졸속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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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폭등-증시폭락 부른 5개 신도시 졸속추진 [1987~2012년 경제민주화 실패의 역사·②] 200만호 건설의 부작용
1986~1988년 저금리, 저달러, 저유가에 힘입은 3저호황은 부동산 경기의 주기로 볼 때 사상최대의 부동산 투기를 잉태하고 있었다. 여기에다 13대 대통령 선거 기간 중에는 엄청난 선거자금을 살포했고, 또 선거공약으로 지역개발 공약을 남발했다. 불난 데 기름을 붓는 격이어서 부동산 투기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노태우 정권 출범을 전후하여 2~3년 사이에 전국의 땅값이 상업용지, 택지, 임야, 농지를 가리지 않고, 지역적으로는 수도권, 서해안, 동해안을 불문하고 무차별적으로 급등했다. 집값도 폭등했다. 강남 고급아파트의 경우 평당 700만원으로 뛰었다. 아파트 한 평 값이 집 없는 서민의 전세 값과 맞먹는 수준으로 올랐던 것이다. 당시 평당 분양가는 134만원이었다. 분배의 정의를 강조하던 노태우 정권으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동산만 투기광풍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주식시장도 과열되어 돈 놓고 돈 먹는 금융투기의 장세로 변했다. 1986년 초에만 해도 160선에 불과하던 종합주가지수가 3년여 만인 1989년 5월에는 950선으로 6배나 뛰었다. 이에 따라 상장주식 시가총액도 6조 6000억 원에서 73조 3000억 원으로 무려 67조 원이나 늘어났다.

돈 있는 사람은 너나없이 부동산 시장으로, 주식시장으로 뛰어들어 온 나라가 투기판을 닮아갔다. 투기광풍은 물가앙등→노사분규→임금인상→물가앙등→노사분규의 악순환으로 이어져 산업현장 곳곳에서 격렬한 노사분규가 일어났다. 또 소외계층의 집단행동을 유발하여 계층-부문 간의 갈등과 반목은 더욱 증폭되어 온 나라가 소연했다.

온갖 부동산 투기억제책을 내놓았으나 효험이 없자 노태우 정권은 맞불작전으로 5개 신도시 200만호 건설계획을 급조했다. 물량작전은 어느 정도 주효하여 투기의 큰 불길은 잡았다. 그런데 분당시범단지 견본주택 공개 첫날 무려 20만 명의 인파가 몰려 당시의 투기열풍을 짐작케 했다. 경쟁률이 살인적이어서 최고 170대 1이었고 평균 경쟁률이 47.8대 1을 나타냈다.

무리한 200만호 건설 추진, 부작용을 낳다

200만호 건설계획을 조기에 달성한다고 무리하게 밀어붙인 바람에 이에 따른 부작용-후유증이 참으로 엄청났다. 건설기간 내내 각종 건자재 수요가 폭발하여 해외에서 저급품을 마구잡이로 수입했다. 그래도 건자재 공급난이 풀리지 않아 웃돈을 주고도 물량을 확보하지 못해 건설업체들이 공사를 중단하기 일쑤였다. 여기에 인력난마저 겹쳐 시공순서를 뒤바꿔 부실공사가 양산됐다.

중국산 시멘트는 레미콘으로 적합하지 않을 만큼 품질이 조악했다. 남미산, 터키산 철근은 강도가 낮은데다 오랜 항해로 해수에 침수되어 부식상태가 심했다. 평상시 같으면 건자재로 쓸 수 없는 불량품이었다. 모래마저 모자라, 바다모래를 미쳐 세척하지 않은 채 사용해 부실공사를 둘러싼 시비가 곳곳에서 그치지 않았다.

수년간 지속된 자재난-인력난은 물가앙등→인금상승으로 이어졌다. 웃돈을 주고도 못 사던 자재난은 진정되었지만 가격하락 경직성에 따라 한 번 올라간 물가는 내릴 줄 몰랐다. 입주민의 불만 또한 심각한 수준이었다. 졸속-급조계획을 고지점령식으로 밀어붙인 바람에 날림-부실공사에 따라 신도시 곳곳에서 갈라지고 터지고 샌다고 난리가 났었다.

자재난-인력난은 물가앙등으로 연결되어 고스란히 국민부담으로 돌아갔다. 물가앙등-임금상승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정된 자원에 대한 배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단시일 내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의 물량공세를 취함으로써 여기서 발생한 국가적 낭비가 심대했다.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에 이어 200만호 주택건설, 대전 엑스포가 맞물려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그 탓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 건국 이래 최대 규모로 양산되었다. 제염되지 않은 바다모래, 해수에 침수된 수입철근, 접착력이 낮은 수입시멘트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국가미래의 근간이 되는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의 내구력과 내하력에 심각한 문제가 제기됐던 것이다.

▲ 아파트(자료 사진). ⓒ뉴시스

증시 부양을 위한 특혜, 그것 역시 국민 부담

신도시 건설공사의 강행은 네 자리 시대를 개막한다는 증시마저 좌초시켰다. 시중자금이 신도시로 몰리니 증시는 온갖 부양책을 마다하고 침체의 늪에 빠져 헤어나질 못했다. 정계-재계는 증시침체의 원인을 금융실명제 탓으로 돌리고 난리를 쳤다. 노태우 정권이 증시부양책의 일환으로 금융실명제 실시를 포기했지만 전혀 효험이 없었다.

급기야 1989년 12월 12일 새벽 무슨 군사작전이라도 벌이듯이 경제부총리, 한국은행 총재를 배제한 채 밀실에서 급조한 증시부양책을 재무부 장관이 발표했다. 증시를 살린다며 은행으로 하여금 2조 7000억 원을 투자신탁회사에 강제로 대출하도록 해서 주식을 사라고 강압했던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12.12 조치였다.

시장경제의 원리를 무시하고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하여 인위적으로 주가를 조정하겠다는 초법적 조치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년 반 후 5조 6000억 원으로 불어난 부채를 한국은행 특별융자로 탕감해주고 도산위기에 놓인 투자신탁회사를 구조해야만 했다. 당시만 해도 금융자금을 동원해 주가를 인위적으로 조정-통제하기에는 시장규모가 너무 커져 있었던 것이다.

증시활성화를 위해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하여 투신사의 이자를 탕감한다는 발상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 문제를 떠나서도 특융금리 3%와 통화채금리 13%의 이자차익만큼은 분명한 금융특혜였다. 당시 농촌경제가 시장개방으로 위기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노태우 정권은 추곡수매에 대해서는 아주 인색했다. 하지만 주식투자에 따른 손실보전비용으로 2조 9000억 원이란 거액을 지원했다.

당시 국제수지가 크게 악화되고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은 급속한 시장개방이었다. 그중에서도 농업부문이 심각했다. 농촌경제가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개방돼 식량자급률이 34.4%로 급락했다. 식량의 65%를 해외에서 조달하다보니 1992년 1~11월 농림수산물 수입액이 65억 5000만 달러로 늘어나 이 부문 무역적자만도 39억 4000만 달러에 달했다.

5개 신도시 건설이 주택공급 확대에 따른 주택가격 안정에는 기여했지만 급조계획을 군사작전식으로 밀어붙인 결과가 낳은 후유증-부작용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갔다. 특히 물가폭등은 많은 국민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줬다. 증시부양을 위한 한은특융도 따지면 국민부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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