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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소리치던 김영삼, IMF 위기를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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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큰소리치던 김영삼, IMF 위기를 부르다 [1987~2012년 경제민주화 실패의 역사·⑤] 위기의 도화선, OECD 가입
김영삼 정권이 OECD 가입을 추진할 즈음 멕시코의 재판(再版)이 될까 우려하는 소리가 높았다. OECD에 서둘러 가입했다가 잘못하면 멕시코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니 뒤로 미뤄 대비책을 마련한 다음 가입해도 늦지 않다는 비판여론이 비등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김영삼 정권은 "한국경제는 멕시코와 비교도 안 될 만큼 건실하다"는 따위의 말로 일축하곤 했다.

멕시코는 1980년대부터 금융-자본시장을 과감하게 개방했다. 미국자본의 유입이 곧 현대화라고 믿었던 까닭이었다. 미국은 멕시코의 개방정책에 만족하여 1994년 1월 캐나다와 멕시코를 잇는 자유무역지역인 NAFTA를 출범시켰다. 멕시코는 뒤이어 1994년 6월 경제선진국 모임인 OECD에도 가입했다.

그런데 그해 12월 하순 난리가 났다. 페소 가치가 이듬해 1월 초순까지 무려 70%나 폭락하면서 거액의 외화유출을 촉발하여 국제금융시장에 위기를 몰고 왔다. 멕시코 사태의 원인은 경제적 요인 말고도 정치적 요인이 겹쳐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NAFTA가 출범할 시기에 치아파스의 남부 고원지대에서 빈민반란이 일어나 민심이반이 컸다. 여기에다 집권당 대통령 후보의 암살사건 등 정치적 테러리즘이 잇달아 터져 정치혼란이 가중됐다.

이런 와중에도 당시 대통령 살리나스는 퇴임 후 WTO 최초의장이 되겠다는 개인적 야망을 달성하려고 국가경제를 악용했다. 페소 가치절하를 막으려고 외화를 과도하게 매각했던 것이다. 외환부족이 경제-정치불안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급속한 외화유출을 촉발하면서 페소 폭락을 동반한 것이 멕시코 사태였다.

위기 경고에도 '한국은 멕시코와 다르다' 묵살한 YS

김영삼 정권이 OECD 가입을 추진하던 시점에도 경제-정치불안이 극도로 고조되어 있었다. 당시 세계의 TV화면에는 한국의 노동법 파동이 곧 경제파탄을 몰고 올 듯이 심각하게 비쳤다. 노동법 파동도 따지고 보면 OECD 가입이 원인이었다. 김영삼 정권은 노동법을 OECD 규범에 맞춘다고 복수노조를 인정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사용자 집단인 재계가 드세게 반발했다. 그 무마책으로 정리해고제를 도입하려고 하다가 노동자 집단한테서 거센 반동을 불러일으켰다. 집권세력이 노동관련법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켰지만 결국 사실상 원인무효를 선언하는 사태까지 일어나고 말았다. 1996년 12월 김영삼 정부가 OECD에 가입했다고 환상에 빠진 순간에 한보그룹이 도산했다. 금융부채 5조 원을 달러로 환산하면 50억 달러가 넘는 규모였다.

한보사태는 정치권력이 재벌한테서 돈을 상자째 받은 대가로 금융자금을 수조원이나 끌어다 쓰게 한 사상최대 금융부정사건이었다.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의 국정농단과 맞물려 이 사건은 미증유의 정치-경제사건으로 확대되어 수습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반년이나 표류했다.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국이 갈수록 혼미해져 그 시계가 안개 속에 갇힌 형국이어서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이런 정치상황에 금융불안이 고조되면서 기업도산이 속출하고 여기에 따라 대량실업이 발생하고 있었다. 여기에 겹쳐 기아그룹이 부도를 냈다. 금융부채가 10조 원이니 달러로 치면 100억 달러가 넘는 규모였다.

국내은행의 취약한 재무상태는 국제금융시장에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150억 달러를 상회하는 부실채권이 일시에 발생했으니 국제금융시장이 놀라 버렸다. 외국은행들이 국내은행의 지급능력에 의문을 품고 만기연장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사태가 이렇게 급변하는데 같은 시기에 태국에서 외환위기가 터졌고 뒤이어 인도네시아까지 확산됐다. 이들 두 나라에는 국내의 제조업체들이 많이 진출해 있었지만 은행, 종합금융사들도 나가서 돈놀이를 하고 있었다. 국제금융시장에서 3개월짜리 단기대출을 얻어 1년 이상 장기대출을 해주고 2~3%의 이자차익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동남아에서 외환위기가 터지자 국내 금융회사들은 외자조달이 중단된 상태에 빠졌고 대출회수는 불가능해졌다. 외국 금융회사의 부채상환 독촉에 몰린 종금사들이 국내에서 대출을 회수해 외채를 상환하기 시작했다.

▲ 김영삼 전 대통령. ⓒ연합뉴스
하지만 김영삼 정권은 종금사들이 동남아 시장에서 어떤 영업행위를 하는지, 대출규모가 얼마인지 파악조차 못하고 있었다. 외환위기가 터지고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가 도입된 이후 끝내 많은 종금사들이 폐쇄조치를 당하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이런 정치-경제상황은 국제금융시장에 즉각적으로 반영되었다. 국가신인도가 하락하는 가운데 경상수지도 계속 악화하고 있어 해외차입조건이 점점 불리해졌다. 결국 단기적인 대외지급능력을 나타내는 외환보유고가 줄기 마련이었다. 동남아를 휩쓴 금융위기의 여파가 몰아치자 시중의 자금사정은 더욱 경색되어 기업들이 집단도산 위기에 처해 있었다.

여기에다 은행의 실정도 비슷하게 돌아갔다. 대출중단에 이어 대출회수에 주력함으로써 여신업무가 마비됐다. 연쇄도산으로 부실채권이 급증하자 대출여력은 더욱 줄어 금융위기를 촉발하고 말았다. 외채가 급증하는 가운데 금융회사의 도산이 우려되자 외국 금융회사들이 융자회수에 나섰다.

국제금융시장의 이런 동향에 따라 국가신인도가 추락하면서 외자조달이 더욱 어려워져 외환위기가 터졌다. 외채규모가 과다하다는 점에서 외환위기의 가능성은 상존해 있었고 그 위험성에 대한 경고는 그치지 않았다. 1994년 12월 멕시코에서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에도 닮은꼴을 걱정하는 소리가 높았다.

그럴 때마다 김영삼 정권의 답변은 간단했다. 경제체질이 멕시코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튼튼해서 그런 사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모르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투였다. 경청은커녕 묵살만 일삼는 자세였다. 외환위기의 거대한 파고가 몰려오고 있었으나 예감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 기능 못한 언론도 외환위기에 일조

김영삼 정권은 집권 5년 동안 외채에 관해 한 번도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없었다. 가끔 외채규모에 관한 보도가 있었지만 그 정확성에 대해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았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외채규모는 1996년 말 현재 두 가지 숫자가 있었다. 하나는 1110억 달러이고 다른 하나는 1040억 달러였다.

외환위기가 터진 다음 밝힌 외채규모는 1606억 달러였다. 최소한 500억 달러 이상 차이가 났다. 의도적으로 외채실상을 은폐하려고 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그 결과 국민들이 외채의 심각성-위험성을 모르고 흥청망청하다 외환위기를 맞게 된 꼴이다.

김영삼 정권은 외채규모를 공표하지 않으면서도 보도자료를 통해 외환보유고 300억 달러를 유지한다고 수시로 발표했다. IMF는 적정 외환보유고를 전년도 월평균 경상지급액의 2.5배 이상을 권고한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최소한 380억 달러 이상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외환위기가 발생한 다음에 드러났지만 300억 달러 가운데는 유동성이 없는 자산이 상당히 포함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외환보유고는 단기적인 대외지급능력을 표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언론은 외채증가의 심각성을 보도하지 않고 외환보유고의 허구성도 간과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언론도 제 기능을 못해 외환위기를 초래하는 데 일조하고 만 것이다.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기 직전인 1992년 12월 말 외채규모는 428억 달러였다. 그런데 1996년 말에는 1607억 달러로 급증하여 4년 동안 무려 1179억 달러나 늘어났다. 1997년 들어서는 6월 1635억 달러, 9월 1706억 달러로 늘다가 11월 들어서는 1569억 달러로 줄었다. 9월 이후 외환위기가 현실화되자 외국은행들이 만기연장을 거부하여,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그만큼 상환했다는 뜻이다.

그 결과 외환보유고가 고갈되어 대외지급불능상태(moratorium)에 빠지는 중대한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결국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여 대외거래가 중단되는 사태는 겨우 모면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하여 고금리 체제 이외에도 경제주권이 제약당하는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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