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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사태'로 떼돈을 번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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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사태'로 떼돈을 번 사람들 [1987~2012년 경제민주화 실패의 역사·<11>] 몰락하는 중산층
IMF 사태에 따라 신규채용이 급감하면서 대졸자를 포함한 20대 실업자가 급증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마다 정리해고가 마치 유행병처럼 번져 30-50대 실업자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생산직 못지않게 사무직-전문직의 해고가 늘어나면서 고학력 실업자가 양산되었다.

자녀의 학자금 부담으로 가계지출이 많은 40-50대가 해고 돌풍의 과녁이 되어 버렸다. 여기에 집값, 땅값 폭락은 복합불황을 불러 재산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졌다. 중산층이 급속하게 붕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실채권을 정리하고 실업대책을 마련한다고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이 부담하는 간접세를 무차별적으로 인상하는 바람에 가난한 국민의 세금부담이 더욱 무거워졌다. 한편 금융자산가들은 벼락부자가 될 수 있는 호기를 맞아 IMF 사태를 즐기고 있었다.

IMF의 요구에 따라 이자제한법이 폐지되어 사채시장에서 금리가 폭등하기 시작했다. 1997년 12월 22일 이자제한법상의 최고 이자율을 연 25%에서 연 40%로 높였다. 그것도 모자라 이듬해 1월 13일 국회가 IMF의 지원조건을 이행한다는 명목으로 이자제한법을 아예 폐지했다.

이자제한법을 없애버리자 사채시장에는 연 100%가 넘는 고리대금이 성행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1999년부터는 일본의 대부업이 국내에 상륙했다. 여기에 자극 받은 저축은행 등 국내 금융회사들도 연 40~50%의 고리대금 영업을 개시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시민단체들이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은 대부업을 양성화한다며 대부업법을 제정했다.

고금리로 인해 금융자산가들이 떼돈을 버는데 이자소득세를 오히려 내렸다. 금융소득에 대한 종합과세세율은 소득규모에 따라 15∼40%였다. 이것을 일률적으로 20%로 조정함으로써 고소득자에게 20%포인트의 특혜를 줬다. 연간 2000만 원 이하의 이자소득에 대해서는 세율을 15%에서 20%로 올렸다. 반면에 그 이상 거액이자소득에 대해서는 세율을 40%에서 20%로 내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소득분배에서 역류현상을 더 깊어지게 만들었다.

이 나라 부패의 온상은 정치권이다. 그 세력이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 직전에 연대해서 금융실명제를 형해화했다. 정치자금 조달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동시에 검은 돈이 더욱 기승을 부리도록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금출처를 묻지 않는 각종 채권을 잇달아 발행하여 검은 돈의 세탁이 쉬워졌고, 또 세금 없는 증여-상속이 용이해졌다.

당시 현금을 보유한 사람들은 그야말로 떼돈을 벌었다. 초고금리를 이용해 돈놀이를 해서 떼돈 벌어도 세금이 거의 없었다. 또 폭락한 부동산을 사들여 떼돈을 벌었다. 당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은 당장 먹고살기 어려우니 살던 집을 헐값에 팔아 치웠는데 그것들을 거둬들인 것이다.

IMF 사태보다도 IMF 사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정책실패로 인해 한국사회는 극단적인 양극화 사회로 치닫기 시작했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의 심화는 사회계층을 상층부와 하층부로 이원화한다. 계층 간 갈등의 완충 역할을 맡은 중간계층의 몰락은 계층 간 대립을 유발한다. 종국에는 사회가 사상적으로 급진화하기 마련이다.

▲ 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 실업사태가 본격화하면서 거리로 내몰린 실직자들은 낮이면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 사회단체들이 제공하는 무료급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밤이 되면 지하철 통로에서 노숙을 했다(1998년 6월 22일). ⓒ연합뉴스

금융자산가 폭리, 중산층 몰락, 사회 급진화

불황과 실업을 모르고 일해 온 성장의 주역이 어느 날 갑자기 실업대열에 끼었다. 여기서 오는 정신적 거세감-박탈감과 물질적 궁핍함을 생각한다면 앞으로 전개될 사회변화를 예감할 수 있었다. 당시 실업자연맹이 태동할 움직임이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 EU(유럽연합)는 단일통화를 출범시키기 위해 회원국에 재정적자를 GDP의 3% 이내로 감축하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과도한 복지지출로 인한 과중한 세금부담에 염증을 느껴온 보수층이 반발하고 나섰다. 재정적자를 줄이려면 복지지출을 줄이라는 것이었다. 보수층의 압력이 유효하여 정책에 반영되자 실업자를 중심으로 한 소외계층이 정치적으로 연대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에서 잇따른 사회당의 집권은 이런 사회적 조류와 연관이 깊다.

경제파탄으로 많은 일자리가 한꺼번에 사라져 대량실업이 불가피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부가 나서 해고인력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럼에도 김대중 정권은 그 같은 노력을 게을리했다. 일자리는 지키기보다 만들기가 더 어렵다. 실업수당 같은 생계보조의 성격을 지닌 지원금은 일시적 효과만 지니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된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은 생계보조에 중점을 두는 쪽으로 나갔다.

일본처럼 임금보조금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고용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실업자가 100만 명 단위로 발생하는 상황에서 이 문제는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중산층의 붕괴는 장차 한 세대를 넘어서까지 영향을 끼쳐 빈곤의 세습화가 이어진다. 하지만 당시 김대중 정권은 이 점을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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