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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중국의 '동북4성'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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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중국의 '동북4성' 일부? [1987~2012년 경제민주화 실패의 역사·<25>] 북한 경제의 중국 종속화
이명박 정권이 출범하면서 내세운 남북관계의 기조는 '상생과 공영'이었다. 그러나 고위책임자들이 북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예사롭게 내뱉었다.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하면서도 먼저 버릇부터 고치라는 투였다. 식량지원만 해도 북한이 요청하지 않는데 줄 수 있느냐, 지원해야 할 긴급한 상황이 아니라는 따위로 나갔다. 받고 싶으면 손을 내밀라는 소리였다.

'우리식 사회주의'를 말하는 그들이 느낄 굴욕감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자세였다. 대화를 말하면서 다른 한편 선제공격을 발언함으로써 대립을 자초했다. 이에 맞서 북한도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전면 부정한다", "파쇼독재를 되살리며 북남대결에 미쳐 날뛰는 남조선 집권세력"이라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남북관계는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상태로 악화됐다.

김대중-노무현 10년간의 햇볕정책은 이른바 보수세력한테서 '좌빨'이라고 심한 시달림을 받았다. 퍼주기 논란을 빚는 햇볕정책의 뿌리는 그보다 10년을 더 거슬려 올라간다. 노태우는 밀사를 통한 물밑접촉으로 남북화해를 꾸준히 추구했다. 햇볕정책은 김영삼이 먼저 시동을 걸었다. 무상지원은 안 된다는 미국 식량메이저의 제동을 뿌리치고 북한에 식량지원의 길을 텄다.

북한의 만성적인 식량난과 핍박한 외환사정은 김대중-김정일, 노무현-김정일의 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 금강산과 개성공단의 문이 열리고 경제협력의 폭이 넓어졌지만 북한은 핵개발을 중단하려는 의사를 비치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미국 부시정부의 대북강경노선과 보조를 같이하면서 화해의 물결이 급속히 냉각되었다. 남북이 험한 말을 주고받더니 공식-비공식 대화의 창구가 모두 단절되어 버린 상태다.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기조는 한마디로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경제적 지원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북한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긴장을 고조시켰다.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긴장관계가 고조되었음에도 금강산 관광이 지속되는가 싶더니 2008년 7월 금강산에서 울린 한 발의 총성이 금강산의 문을 닫아 버렸다. 3년 넘게 중단되더니 북한이 금강산 내 남한의 재산을 동결-몰수했다.

2010년 3월 26일에는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침몰하여 해군 40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합동조사단은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했다고 발표했고 북한은 모략극이라고 주장했다. 2010년 11월 23일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을 감행하자 집권세력 내에서는 전쟁불사론까지 튀어나오면서 남북관계는 되돌리기 어려운 국면으로 악화됐다.

이명박 정권 들어 연간 쌀 40만t, 비료 20만t의 지원이 중단되고 경제교류가 거의 단절되었다. 다만 개성공단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개성공단은 2002년 남북 간 경협사업의 일환으로 출발했다. 당초에는 2000만 평 부지에 800만 평의 공단과 1200만 평의 배후도시를 건설한다는 계획이었다. 3단계 공사가 완료되면 북측 노동자만도 40만 명을 수용한다는 규모였다. 이명박 정권 들어 100만 평 규모의 1단계 공사가 답보상태에 있다. 그 책임의 상당부분은 북한에도 있다.

이명박 정권은 북한을 자극하는 말을 함부로 했다. 북한은 더 자극적인 언사로 대응하며 개성공단의 문을 '닫았다', '열었다'를 되풀이했다. 해외거래에서 납기는 가격, 품질 못지않게 중요하다. 납품기일을 자주 어기면 거래성사가 어려워진다. 그런데 생산차질을 빚는 행위를 반복하면 국제신뢰를 상실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개성공단은 산업화의 전초기지로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남한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인력과 토지를 결합하면 어느 외국과 제휴하는 것보다도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남쪽 기업이 개성공단에서 얻는 이점은 북쪽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발전속도를 한층 더 높일 수 있다. 동족끼리 접촉으로 인한 사상적 오염을 걱정한다면 중국의 경제특구 선전(深汌)을 볼 필요가 있다. 30년 전 철조망을 치고 시작했지만 이제는 중국 전역이 선전으로 변했다.

이제 남한기업의 입장에서 중국진출은 매력을 잃고 있다. 임금도 크게 올랐지만 외국인투자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 북한의 임금수준은 아직도 동남아에 비해 높지 않다. 여기에다 지리적 근접성이 큰 이점이다. 화물수송 시간이 짧고 물류비용이 훨씬 싸다. 출퇴근이 가능해 중국 등지보다 인건비 부담이 작다. 같은 언어를 사용해 소통이 원활하고 기술지도도 수월하다.

무엇보다도 전쟁억지력을 발휘한다. 이웃나라끼리 경제관계가 돈독해질수록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경제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키어 상호작용(interaction)하면 서로 손해 볼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개성공단은 경제적 관점에서만 판단할 일이 아니다. 지금은 협력관계가 미미하지만 그것을 키워나가면 장차 한반도의 안정은 물론이고 공존과 공영의 기반이 될 수 있다.

▲ 개성공단. ⓒ연합뉴스

단절된 남북 교류, 북한의 중국 의존도를 높이다

개성공단 이외의 남북 간 경제교류가 단절된 상태에서 북한은 화폐개혁마저 실패하여 경제난이 더욱 악화됐다. 경제사정이 절박하게 돌아가자 중국한테 구원의 손을 내밀었다. 신압록강 대교를 중국자본으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인근의 위화도와 황금평 지역을 자유무역지구로 개발한다며 중국기업에 50년간 임대형식으로 개발권을 넘겼다.

조선대풍국제투자그룹이 100억 달러 규모의 외자 유치를 목표로 나진·선봉지구 두만강 유역의 도로, 항만, 철도를 건설하고 있다. 나진항 1호 부두의 10년간 사용권도 중국에 넘겼다. 중국이 누천년의 숙원이던 동해를 통한 태평양 진출의 길을 마련한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동해는 동북3성의 해외수출 창구로서 가치가 크다. 또 동해를 동북3성과 연안지대를 연결하는 통로로서 활용하여 지역 간의 균형발전을 도모할 계획이다. 동해를 통한 해상운송이 내륙운송보다 훨씬 경제적이다. 그동안 소비재 수출, 지하자원 개발, 사회간접자본 개발로 북한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키워온 중국의 입김이 앞으로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1980년대부터 중국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내세워왔다. 56개 민족으로 이뤄진 중국은 그 구성민족과 영토의 역사를 모두 중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중에서도 동북공정(東北工程)은 2002년 2월 28일 정부 승인을 얻어 국책사업으로서 추진하고 있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한국사에서 지우는 작업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사는 시간적으로는 2000년, 공간적으로는 한강 이남에 국한되고 그 이북은 중국사에 편입된다. 북한경제의 중국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중국에서 동북4성이란 말이 자주 들린다. 북한이 붕괴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동북3성인 랴오닝성(遼寧省), 지린성(吉林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 이어 북한이 동북4성으로 편입된다는 소리다. 역사공정은 바로 동북4성의 논리적-역사적 배경을 제공하는 작업이다.

2010년 4월 26일자 <뉴스위크>에는 '북쪽 잃기남한은 북방정책이 필요하다'란 칼럼이 실렸다. 영국 리츠 대학교의 명예선임연구위원으로서 40년 넘게 한반도 문제를 연구해온 에이던 포스터 카터의 글이다. 서울은 아직도 북한을 자국의 영토라고 생각하면서도 북쪽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동독의 갑작스런 붕괴에 따라 발생한 독일의 통일비용과 비교하면 점진적인 재통합을 위해 굶주리는 북한 동포에게 쌀을 지원하는 햇볕정책이 훨씬 싸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서울의 근시안적인 보수세력은 햇볕정책에 대한 불만이 크다고 지적했다. 통일까지 20년이 걸린 서독의 동방정책(Ostpolitik)을 배우는 서울의 북방정책이 시급하다는 의견이었다. 햇볕정책은 하룻밤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명박 정권은 이런 역사의식도 없이 남북관계를 긴장일변도로 밀어붙였다.

한반도에 긴장관계가 더욱 결빙되는 바로 그 시점에 중국과 대만의 양안(兩岸)관계는 급속하게 해빙되고 있었다. 경제교류가 양안의 대화를 이끌어내더니 중국이 대만에 군사교류까지 제안해 양안에 감돌던 전운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화평이 찾아왔다. 이어 중국에 진출한 대만기업에 대한 10대 지원방안을 발표했다. 큰 골자는 1300억 위안(24조5000억 원 상당)의 금융지원이었다. 중국이 자국의 중소기업에 지원하는 세제-금융 우대조치를 대만기업에도 적용한다는 것이다.

2009년부터는 대중문화의 문호도 활짝 열렸다. 중국 가수가 대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중국 탤런트가 대만 드라마에도 출연한다. 그동안 대만 가수가 대륙 무대를 장식한 것에 대한 호혜적 개방이다. 2008년 12월 25일 대만은 고위공무원의 대륙방문을 허용하는 한편 중국도 정당인의 대만방문의 길을 열었다.

2008년 7월에는 59년 만에 하늘 길도 열렸다. 매주 금요일, 월요일 직항 전세기를 띠우고 있다. 양국의 항공업계는 단계적으로 양안 간의 여행이 상시화-간편화-정기화할 것이란 기대에 차있다. 그동안은 직항로가 없어 4대 명절에 한해 홍콩, 마카오 등지를 거치는 임시 항공기를 운행해 왔다.

2008년 11월에는 이른바 '3통'(三通)이라고 일컫는 통상(通商), 통항(通航), 통우(通郵)가 실현됐다. 전면적인 교류협력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2008년 12월 31일 적대상태를 끝내고 평화협상을 달성하자며 대만에 군사교류를 전격적으로 제안했다. 또 그는 하나의 중국을 전제로 대만의 WHO(세계보건기구) 가입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자세를 취했다.

남북 화해-공존이 비핵화 유도하는 길

남한의 체제우월성은 경제적 성취가 이미 입증했다. 북한과의 대화는 많은 인내심을 요구한다는 사실도 체험적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극단적인 대립이 북한경제의 중국종속화를 부르면 종국에는 한반도의 북쪽을 잃을 수도 있다. 적대관계는 북한의 핵개발 포기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핵개발에 집착하도록 만든다. 남북 간의 화해-공존이야말로 비핵화를 유도하는 길이다.

따라서 개성공단을 중심으로 남북경제협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책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남북경제협력은 북한에 대한 일방적인 지원이 아니라 상호 간의 이익이다. 남쪽은 해외로 나가는 노동집약적 산업을 북쪽으로 돌리면 가격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다. 장차 북한시장을 확보한다면 내수시장의 한계를 확장하는 길이다.

이 시점에서는 냉정하게 거시적 안목에서 역사의식을 갖고 설득을 통해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지혜가 중요하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권은 냉전체제의 소아병적인 사고방식에 갇혀 남북관계를 긴장국면으로만 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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