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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시인 김남주가 김진숙에게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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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시인 김남주가 김진숙에게 쓴 편지 [사람을 보라]<8> 김남주의 버킷리스트
한진중공업 김진숙의 외롭고 절박한 투쟁, 이를 응원하는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뜨거운 발걸음을 기록해 사진가들이 책 를 펴냈습니다. 이 연재는 이에 호응하는 젊은 시인들이 사진을 보고 보내온 글입니다. 책의 인세는 희망버스 주유비로 쓰입니다. <편집자>

이보오 스물네 살의 용접공 아가씨
다섯 손가락에 불꽃을 달고 강철의 굳은 표정을 멋대로 자르고 이어대는
사랑스런 당신
당신은 먼 후일
더 높은 곳에 오르게 될 것이오

이봐요 아가씨
삶은 정말 주머니들로 가득한 옷 같소
이렇게 많은 감정들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전부 담을 수 있다니

이것은 마야코프스키의 말투라오
나는 당신과 닮은꼴인 시인들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여럿 번역했지
물론 감옥에서 말이오
죽음의 발길질이 언제 시작될지 모른 채
가장 빛나는 은빛 양동이에 모든 노래와 소망을 다 담으려 했지
제일 낡은 변두리에서 흘러나오는 더운 하수 같은 노래를
모든 거리에서 일제히 떠오르는 빨간 풍선 같은 소망을

ⓒ이명익

거짓 없는 흰 발로 올라선 나의 양동이가 차이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작은 수첩에 적은 말은
해방
제국으로부터의 해방
모든 제국으로부터의 해방
이보시오 영리한 아가씨
당신은 서로 다른 풍경 뒤에 놓인 동일한 원인을 잘 알고 있다오

수빅의 노동자를 착취하려는 손길이
亞제국의 노동자를
제국, 亞제국의 어두운 거리들에 물끄러미 세워놓는다는 것을
비정규직의 양동이를 걷어차는 발길이
정규직의 양동이를 걷어차는 거친 발길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이정선

금지된 일터로부터 망명한 당신
다시 돌아가기 위해 17년을 기다리게 될 당신
이보오 올해가 그 마지막 해라오
힘을 내요 당신은 꼭 돌아가게 될 것이오

이봐요. 환하게 웃는 반백의 아가씨
당신의 삶은 정말 주머니들로 가득한 옷 같소
얼마나 많은 슬픔
얼마나 많은 기쁨
얼마나 많은 분노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지

ⓒ정택용

당신을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사람들은 점점 높아가는 가을의 고요하고 무거운 하늘을
올려다볼 것입니다
당신이 야윈 목에 매달고 찰랑이며 올라가는 슬픔과 기쁨의 양동이를

ⓒ정택용

나는 그들과 함께 올려다볼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할 일
나의 마지막 소망

1994년 2월의 대학병원 병실에서…

버킷 리스트(bucket list):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 'kick the bucket(양동이를 걷어차다)'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이 말은 중세시대 교수형을 집행할 때 사형수가 딛고 올라선 양동이를 걷어차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뜻한다.

김남주(1946∼1994): 시인. 1980년 남민전사건으로 15년형을 언도받고 10년여간 감옥생활. 수감후유증과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1994년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췌장암으로 그해 2월 사망. 창작 시집 이외에도 네루다, 마야코프스키, 브레히트 등의 진보적 시들을 번역한 시선집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를 출간.

김진숙(1960∼): 한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 21세에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하였으나 1986년 해고당함. 회사가 부도처리로 한진중공업에 통합된 뒤에도 부당해고에 저항하며 17년간 복직투쟁.

※ 위의 시는 진은영 시인이 쓴 것으로, 1994년 타계한 김남주 시인이 지금의 상황을 예견하고 당시의 젊은 여용접공인 김진숙씨에게 썼을 법한 편지를 가상으로 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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