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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한 기러기 아빠, '속물'이라 비난할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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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자살한 기러기 아빠, '속물'이라 비난할 수 없는 이유 [민들레 교육 칼럼] 풍요의 역설, 어울림이 필요한 사회
'교육 불가능' 시대라고 합니다.

과열된 입시 경쟁,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학교 폭력, 공교육을 대체하다시피 팽창해버린 사교육 등. 가르침과 배움은 사라지고 오로지 '등수 매기기'에만 골몰하는 교실 풍경은 이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식상할 지경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다들 이런 식상한 이야기를 하곤 하지요. 누구나 알고 있는 현실 진단을 기계적으로 읊조리는 정책 당국자, 학자들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느끼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풍경, 그 맞은편에는 학교 폭력, 입시 부담, 혹은 어른들이 짐작하지 못하는 그밖의 어떤 이유로 자살을 고민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떠나고 싶을 만큼 심각한 문제 앞에서, 어른들은 왜 '뻔한 이야기'만 반복하는 걸까요. 어쩌면 이런 간극이야말로 우리 교육의 절망적인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진짜 필요한 미덕은 '솔직함'일 수 있겠다고 봅니다. 짧은 자기 경험으로 섣부르게 단정짓기보다 교육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아주 하찮은 수준이라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시작하는 태도 말입니다. 또 근대적인 학교 모델이 이젠 어떤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혔다는 점, 그리고 그 한계와 모순에 대한 우리의 인식 역시 한계가 있다는 점 역시 솔직히 인정하는 게 필요해 보입니다.

대안교육 격월간지 <민들레>에 주목한 건 그 때문입니다. 지난 1999년 창간된 이 잡지의 시선은 '학교 너머'를 향하고 있습니다. "학교가 바뀌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만큼 우리는 학교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만들자"라는 <민들레>의 목소리가 교육에 관한 '뻔한 이야기'들에 갇혀 드러나지 않았던 '학교의 빈 곳'을 살피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편집자>


1. 풍요의 시대와 자녀 교육

"아이 교육에 대한 투자만큼 확실한 노후 보장은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조금 이기적인가요? 그러면서 아이도 커서 명예와 부를 누릴 수 있는 능력을 얻는 거죠. 5년 전 외동아들과 아내를 캐나다로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멋진 아빠가 된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하지만 계획보다 유학 기간이 길어지면서 유학비용 송금 부담에 치이기 시작했습니다. 환율이 요동치면 시쳇말로 '멘붕' 상태가 되고요. 저축해둔 돈을 빼 쓰다 2년 전에는 살고 있던 아파트를 팔고 원룸을 얻었습니다."

이 인용문은 '풍요의 시대'를 사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인데, 5년 전 아들과 아내를 캐나다에 보낸 '기러기 아빠'의 생활고를 표현한다. 지난해 3월 대구의 어느 50대 의사가 방안에 번개탄 8개를 피워 자살했다. 그는 10년 전 딸과 아내를 미국에 보내고 홀로 사는 '기러기 아빠'였는데 외로움과 공허함을 이겨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놀랍게도 같은 일이 11월 초에도 일어났다. 역시 50대 가장인데, 4년 전 아들 둘과 아내를 미국으로 보낸 뒤 한 번도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유서엔 "몸 건강, 정신 건강 모두 잃었다"고 썼다. '풍요 속의 빈곤'이다.

1960년대 초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약 80달러였으나 국가 총력전에 준하는 '개발 독재'와 더불어 1971년 286달러, 1981년 1749달러, 그리고 1991년 6810달러 수준에 이르렀다. 1987년 여름 '노동자 대투쟁'으로 상징되는 민주노조 운동은 상대적 고임금과 고생산성 시대를 열어, 역설적으로 인간다운 삶 대신 대중소비를 촉진했다. 1995년엔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2005년엔 1만 5000달러를 넘었으며 2007년엔 2만 달러를 넘었다.

'풍요의 시대'라 해서 모두 잘 나가는 건 아니다. 통계청 가계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중산층은 1990년에 75.4%였는데 10년이 지난 2010년에 67.5%로 줄었다. 그만큼 하층 이동이 많이 생겨 사회 양극화가 심해졌다. 'IMF 위기'도 '부익부 빈익빈'을 가속화했다.

이런 변화는 사회 전반적인 풍요에도 불구하고 '까딱하면' 탈락한다는 경제적 공포를 키웠다. 이 공포와 두려움은 또다시 각 개인이나 가정을 '자기 계발'을 통한 개별 경쟁력 강화로 내몰았다. 한국 사회가 대내적으로는 사그라지지 않는 사교육 열풍으로, 대외적으로는 조기유학 열풍으로 몸살을 앓는 것도 풍요의 시대가 낳은 새 역설 중 하나일 것이다.

▲ 영화 <우아한 세계>에는 조폭이지만 충실한 가장인 강인구(송강호 역)가 등장한다. 영화 마지막에 강인구는 기러기 아빠가 된다. 그가 혼자 라면을 먹으며 아이들의 영상을 보는 장면에는 한국 사회 아빠들의 애환이 그대로 담겨 있다. ⓒ루씨필름

2. 가난의 역설과 풍요의 역설

경제적 풍요는 이렇게 새로운 빈곤과 함께 새로운 풍요도 낳았다. 일례로, 1990년대엔 기존 공교육에 안티테제를 내는 운동들이 풍성하게 나타났다. 한쪽에선 전국교직원노조로 상징되는 공교육 혁신이, 다른 쪽에선 대안학교로 상징되는 새 실험들이 늘어났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대안학교는 몇 안 되었지만, 15년 이상 흐른 지금 수백 개에 이를 정도다.

물론 전교조 중심의 참교육운동은 예나 지금이나 정부와 자본의 가혹한 탄압에 직면했지만, 공교육 밖에서의 대안학교운동은 상대적으로 순항했다. '상대적 순항'이라지만, 실은 자금이나 인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여건에서 많은 교사와 부모들이 '희생'하는 과정이었다. 대안 학교들이 힘겹게나마 확대 재생산된 것은 참여한 이들이 공유했던 '열정' 덕이었다.

이제 이 대안학교운동도 20년 가까이 되면서 새로운 조건에 놓인다. 객관적 상황도 중요하나, 주체적 태도는 더 중요하다. (이 점은 교육운동을 넘어 시민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등에도 해당한다.) 특히 운동의 초창기 주체들이 가졌던 태도와 가치를 요즘의 주체들에게선 보기 어렵다는 지적에 주목해보자.

가장 많이 얘기되는 내용이 "예전 부모들은 함께 만든다는 자세로 임했는데, 요즘 부모들은 소비자 같은 모습을 띤다"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어느 정도 사실이다. "더 이상 공교육의 지옥 같은 현실 속에 아이들을 방치할 순 없다"는 절박감 속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던 시절, '뜻있는' 부모와 교사들이 있는 돈·시간, 없는 돈·시간을 내면서 마음을 합친 이 사례는 '가난의 역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이들이 행복해야 부모도 행복하다'는 일념으로 '통 큰' 단결을 했다. 소통과 연대는 공동의 가치지향이었고 일상 실천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부모가 잘 살아야 아이도 잘 자란다'는 철학을 공유하고 서로의 입장에 공감하며 함께 모여 신나게 놀았다. "아이 잘 키우려고 대안학교를 만들었지만, 어른들끼리 좋은 친구를 만나 즐겁다"며 기뻐했다.

이런 점에서 초창기 부모나 교사들은 대안교육의 '생산자=소비자'였다. 개념적으론 생산자와 소비자가 나뉘지만 실제론 한 덩어리였다. 생산과정이 소비과정이었고, 소비과정이 곧 생산과정이었다. 교과과정이나 식구총회 같은 시간은 물론, 운영위원회, 소위원회 활동, 기말축제나 대동제, 운동회, 이동학습, 인턴십, 봉사활동, 발표회, 후원행사, 토론회 등 모든 과정들이 대체로 생산과 소비의 통일된 과정이었다. 기본 아이디어에서부터 기초 설계, 그리고 준비 과정과 실행 과정, 정리 과정 등이 '함께' 참여하는 '민주적 방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100퍼센트의 구성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인 것은 아니다. 그 와중에 다른 의견들, 다른 철학들, 다른 경험들이 부딪치기도 했다. 하지만 '없는 가운데 뭔가 만들어내야 한다'는 절박함과 더불어 '다르지만 같이 가자'는 공동체 의식이 결합됨으로써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대안교육문화의 생산과 소비를 대체로 일치시킬 수 있었다.

반면 10년 정도 지나 교실이나 기숙사 등 건물도 완성되고 각종 제도적 장치나 운영의 틀이 갖춰지면서, 이제 새로 참여하는 교사나 부모들은 주어진 틀에 적절히 적응하면서 입맛에 맞는 것만 소비하려는 경향이 생기기도 한다.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중요하다.

첫째, 무슨 일이건 처음에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야 할 때는 앞서 말한 절박함과 공동체성을 많이 요구한다. 학교 부지나 건물, 나아가 기숙사 등 가장 기본적인 인프라조차 없는 상황에서 작은 것이라도 함께 만들어냈던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는 개별적 탁월함이나 다양한 색깔들이 상호 경쟁하기보다는 상호 협동해야 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십이 구심점이 되고 참여자들끼리 '상호 공감'의 역량이 공유됨으로써 총체적 실천력을 드높였다. 그러나 학교 모습이 어느 정도 갖추어지고 제반 인프라가 정비되고 나면 주체들의 긴장감도 떨어진다. 아니, 그 이전에 피로감에 지치기 쉽다. 말이 좋아 대안운동이지,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정말 힘든 과정이 아니던가. 피로감의 누적과 긴장감의 완화가 결합되면서 질적으로 다른 상황이 도래한다.

둘째, 1990년대를 넘어 2000년대 이후로 갈수록 풍요의 시대·소비의 시대가 공고화되면서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태도가 변화한다. 이제 사람들은 휴대전화 등 일상생활에서도 '고객님'으로 호명될 뿐 아니라, (대안)교육현장에서조차 '소비자'로 간주된다. 그 고객님이나 소비자 그룹에서 배제될 위험이 높은 하층은 ('쓰레기' 같은 잉여적 존재 즉,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로서의) 패배감과 두려움을 느끼며 상승 욕망에 불탄다. 이미 VIP 고객 대우를 받는 상류층은 안도감과 과시욕 속에서 그 기득권을 공고히 하려 든다. 이 풍요 시대의 소비자들은 예전의 생산자=소비자 시절의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왜냐하면 풍요의 시대를 즐기는 소비자들은 생산과정에는 관심이 거의 없고 '백화점에서 물건 고르듯' 자기 취향에 맞는 선택을 하고 돈만 지불하면 된다는 의식을 갖기 때문이다. 요컨대, 내 돈으로 내가 사는데 누가 뭐라 하느냐 식의 '등가법칙'이 작동한다. 바로 이 등가법칙의 지배야말로 풍요의 시대가 낳은 최대 역설이다.

3. 등가법칙과 착취법칙의 일상화

우치다 타츠루 선생이 <하류지향>(김경옥 옮김, 민들레 펴냄)에서 말하는 '등가교환'의 관점이란 교육을 포함한 모든 삶의 관계를 투자에 대한 수익의 관점, 즉 비즈니스 모델로 파악하는 것이다. 육아의 경우 등가법칙은 부모가 아이를 위해 시간이나 돈, 혹은 열정을 쏟은 만큼 그에 상응하는 성과, 예를 들면 점수나 등수, 대입 등을 기대하는 데서 나타난다. 학생의 경우, 등가법칙은 교실에서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불쾌함을 무릅쓰고 수업에 집중하는 고역을 더 이상 지불할 의향도 능력도 없으니 그렇게 아세요"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엎드려 자거나 딴짓을 하는 식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불쾌함'은 곧 화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대단한 통찰력이다. 아이들은 친밀하고 우애로운 관계들이 사라진 학교나 가정에서 불쾌함을 억지로라도 견디는 것만이 상대방으로부터 일정한 양보를 끌어내는 전략임을 어릴 적부터 체득한다.

만일 일상적 생활과정만이 아니라 대안교육현장에서도 이러한 등가법칙이 지배적으로 된다면, 갈수록 대안교육문화의 생산과 소비는 더욱 분리될 것이다. 일례로 어느 대안학교의 봄 학기 개학 전 대청소의 날, 예전 같으면 교사, 부모, 학생 모두 모여 청소를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하나둘 빠지기 시작하고 참석한 사람들 사이엔 힘이 빠진다. 한숨을 쉬면서 몇 가지 제도적 장치들이 제안된다. 벌금제나 출석부를 쓰는 것이다. 심한 경우, 차라리 청소비용을 모든 구성원이 1/N씩(구성원 모두가 동일하게) 분담해 사람을 사서 해결하자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가면, 마침내 현장은 더 이상 대안의 공간이 아니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차분히 생각해볼 점은 과연 이 등가법칙이 어떤 맥락 속에서 태어난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극복될 수 있는가이다. 자본주의 등가법칙을 가장 먼저 체계화한 이는 칼 마르크스다. 그는 1867년에 출간된 <자본>에서 자본주의 상품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로 등가교환의 법칙을 정립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자본주의 상품이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통일물이다. 둘째, 상품의 (교환)가치란 그 상품에 깃든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의 크기다. 셋째, 시장에서 다양한 사용가치의 상품들이 동일 가치량으로 거래된다(등가교환). 물론, 마르크스는 노동시장에서 노동력 상품과 임금이 등가교환되는 이면에 블랙박스와 같은 노동과정에서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임금 이상의 가치를 생산하도록 노동시킴으로써 그 잉여만큼 착취한다는 '착취법칙'도 제시했다. 이로써 그는 자본주의 착취 구조를 그 누구보다 명쾌하게 해명했다. 여기서 보듯, 등가법칙이란 자본주의 상품 관계 속에서 탄생한 것으로 지난 500년 세월을 거치면서 갈수록 인간 삶의 전반에 지배적으로 침투한다.

요컨대 자본주의 사회경제 시스템은 한편으로는 등가법칙, 다른 편으로는 착취법칙이라는 두 바퀴에 의해 작동된다. 즉 우리가 시장에서 상품을 사는 경우, 겉으로는 등가법칙으로 교환을 하지만 파는 이는 그 상품을 만들 적에 그 가격보다 더 적은 비용으로 만들었기에 일정한 수익을 얻는다. 가격보다 더 적은 비용 중엔 일례로, 자연을 훼손하거나 노동을 착취하는 과정이 숨어 있다.

등가법칙과 착취법칙이 결합된 메커니즘을 맨 앞의 '기러기 아빠' 사례에 적용하면 이렇다. 기러기 아빠는 돈을 벌어 아이를 해외유학 보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이의 노동력은 아빠가 투입한 화폐와 등가교환된 상품이며, 투자에 비례한 노동력이란 면에서 등가법칙에 해당된다. 이 고급의 노동력 상품이 노동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실현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자녀는 이제 사회경제적 '사다리 질서(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사회 구조.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 수는 있지만 그 가능성이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더 높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돈과 권력, 명예를 누리게 되는 구조적 차별의 질서)' 속에서 남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이 생산한 가치보다 훨씬 더 큰 잉여를 기득권 형태로 차지한다. 이는 대체로 착취를 가하는 노동력 보유자라는 점에서 착취법칙에 해당된다. 물론, 학원으로 상징되는 사교육과 조기 유학에서 배제된 중·하층 시민들은 자녀를 중·저급 노동력으로밖에 생산하지 못하는 등가법칙 안에 놓여있다. 또한 이 중·저급 노동력은 이런저런 형태의 자본에 고용되어 생계비를 버는 정도에서 늘 허덕거리며 살아야 한다. 대체로 착취를 당하는 노동력 보유자라는 점에서 착취법칙을 보여준다. 요컨대 저급 노동력은 자본가들에게 자기 노동의 착취를 당하는 반면, 고급 노동력은 자본가와 더불어 온 사회를 착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등가법칙은 은연중에 착취법칙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즉 '등가교환' 원리가 삶을 두루 지배하면, 우리는 더불어 행복한 사회적 삶에 대한 공동의 책임감이나 공감의 역량과 결별하고 오로지 개인적 경쟁력을 드높여 출세와 성공에 이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게 된다. 성공 물신주의 태도가 득세한다. 이것은 한편으론 본전 의식에 기초한 피해의식이나 인정 투쟁("나만 고생하는데, 아무도 안 알아주네, 이런!")을, 다른 편으론 생산·노동과정의 고통을 외면하는 소비자 주권 의식 또는 기득권 의식("내 힘으로 얻은 건데, 꼽니?")을 부추긴다. 책임감 없이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 속물적 인간의 출현이 대표적 증거다.

4. 등가와 착취의 역사적 특수성

그렇다면 이 등가법칙과 착취법칙은 인간 사회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며 앞으로도 영원할 것인가? 물론,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칼 폴라니의 <거대한 변환>(2009년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의 번역으로 <거대한 전환>으로 재출판 됐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역사적으로 인류의 경제 활동이 선물, 재분배, 시장거래 등의 형태를 띠어왔다고 파악하고 선물이나 재분배가 주변화하거나 소멸되고 시장거래가 지배적으로 된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라 했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시장 거래 즉 등가법칙과 착취법칙에 기초한 사회관계는 결코 영원한 자연법칙이 아니라 역사적 특수성에 불과하다. (어쩌면 이 등가법칙조차 부등가거래, 즉 착취법칙을 위한 기초에 불과할지 모른다. 실제로 등가교환이 이뤄지는 시장에서조차 '갑을 관계'로 상징되는 권력 관계가 지배하지 않던가?) 역사의 특수태란 일시적, 과도적이란 뜻으로 영원하지 않다는 말이다.

실제로 자본주의 미국이 탄생하기 이전 북미 원주민들은 '선물의 경제'를 실천하며 살았다. 체로키 인디언의 후손인 포리스트 카터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조부모와 살면서 이렇게 배웠다.

"(향기가 좋은 사향충을 어렵사리 잡아 조부모께 향기를 맡게 해 드리자) 할머니가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주셨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기거나 좋은 것을 손에 넣으면 무엇보다 먼저 이웃과 함께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말로는 갈 수 없는 곳까지도 그 좋은 것이 널리 퍼지게 된다, 그것은 좋은 일이라고 하시면서"(<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조경숙 옮김, 아름드리미니어 펴냄) 100쪽).

그리고 백인들이 원주민 사회로 들어오면서 서서히 상품 거래가 시작될 적에조차 이랬다.

"인디언은 뭔가 팔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그것을 백인의 발 곁에 놓는다. 백인이 전혀 갖고 싶어 하지 않으면 인디언은 그 물건을 집어 들고 말없이 가버린다. (…) 인디언이 누군가에게 선물을 줄 때는 아무 형식도 차리지 않고 그저 상대방의 눈에 띄는 곳에 선물을 놓아두고 그냥 가버린다"(위 책 200쪽).

여기엔 '자원은 유한하되, 욕구는 무한하다'는 자본주의의 가설 즉, '희소성 법칙'에 토대한 효율·능률의 논리나 상품·경쟁의 논리가 깃들 틈이 없다.

"뭔가 좋은 것"을 다른 이들과 함께 '선물'로 나누는 인간적 사회로부터 "뭔가 좋은 것"이 있기만 하면 '상품'으로 만드는 속물적 사회로 변모한 것, 바로 이것이 폴라니가 말한 '거대한 변환'이자 마르크스가 말한 '상품 물신주의'의 지배다. 결국 따뜻한 인간관계 대신 일류대 강박증, 부자 되기, 자동차, 승진, 세속 권력 등 물질적 성공 욕망에 불타는 오늘날의 물신·속물주의 사회는, 등가법칙과 착취법칙을 기조로 움직이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폭력이 낳은 집단적 상흔의 결과 우리 스스로 '강자 동일시' 태도를 내면화한 상태를 보여준다(홀거 하이데 "두려움과 자본",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강수돌·홀거 하이데 지음, 이음 펴냄) 이후 2009, 103~134쪽). 원래부터 인간이 속물적 존재는 아니란 말이다. 즉, 자본주의 상품 사회, 시장 사회, 등가법칙 따위는 모두 영원무궁한 자연법칙이 아니라 한시적 역사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 법칙을 당연시한 채 성공욕망에 충실한 속물들이 대량생산된 결과, 극소수의 승자와 대다수의 잉여로 분열된 사회가 오고 말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며,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

5. 선물의 법칙 - 어울림 사회로 가는 길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식으로 이 무지막지한 상품 사회의 지배를 넘어갈 수 있을까?

무엇보다 우리는 등가법칙과 착취법칙 이전에 '선물법칙'이 인간 사회를 인간답게 한 원리임을 알았으므로, 이제 혼신을 다해 '선물법칙'이 통용되는 사회를 만들면 될 것이다. 사실,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는 공동체(community)라는 말의 어원조차 '서로(com) 선물(munus)을 나누는 관계'란 뜻이지 않던가. 결국 선물법칙이 통하는 곳이 참된 공동체 사회다. 그런데, 전국 방방곡곡에 공동체 사회를 '제도적으로' 만들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물론 그렇게 잘만 된다면, 그리하여 마하트마 간디 선생이 말한, 수십만 개의 "마을 공화국"이 형성되면 더 이상 우리는 현재의 고통을 겪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을 공화국과 그 네트워크를 우리의 이상적 미래로 설정하고 제도화한다고 '선물법칙'의 공동체가 저절로 현실화되진 않는다. 크게 두 가지 장애물이 있다. 첫째, 자본주의 국가 그리고 그와 상생하는 자본이란 장애물이다. 둘째, 자본주의 상품 사회의 진전과 더불어 우리 인간 주체들이 내면화한 '강자 동일시' 태도라는 장애물이다.

이 두 장애물 중 첫째 장애물이 우리가 넘을 객관적 대상이다. 잠정적으로 우리 모두를 속물화, 잉여화하는 사회적 폭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객관적 장애를 넘어가려면 먼저 주체적 장애부터 극복해야 한다. 인간 주체가 주어진 사다리 질서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 그 '안'에서 오로지 더 빨리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강자'가 됨으로써 더 많은 기득권의 떡고물을 차지하려는 게임을 계속하는 한, 희망은 없다.

그래서 말한다. '강자 동일시' 태도를 가진 우리 자신부터 조용히 대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몇 단계 질문을 거친다. 첫째,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더불어 행복한 삶이라 하자.) 둘째, 내가 '강자 동일시' 태도를 내면화한 까닭이 무엇인가? (자본과 국가가 만든 폭력과 상흔, 그로 인한 두려움의 결과 불가피하게 선택한 생존 전략이라 하자.) 셋째,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마음에 가진 상처의 본질은 무엇일까? (한편으로 부모로부터 조건 없는 사랑을 받지 못해 생긴 내면의 공허감, 다른 편으로 온 사회로부터 조건 없는 인정을 받지 못해 생긴 탈락·잉여의 두려움이라 하자.) 넷째, 우리가 가진 상처를 우리 스스로 치유할 방안이 있는가? (자기 내면과의 재접촉을 통한 자기 사랑과 더불어, 타자와의 소통과 연대를 통한 공동체 회복이라 하자.) 다섯째, 자본과 권력이 만들어놓은 사회적 관계들을 넘어갈 우리 나름의 독자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자기 계발을 통한 개별 노동력의 경쟁력 향상도, 권력 장악을 통한 '위로부터의' 국가 전복도 아니라면, '아래로부터의' 소통과 연대를 통한 공동체적 관계들의 활성화 과정이 대안이라 하자.)

이 정도 가닥이 잡히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보다 선명해진다. 여태껏 시기와 질투로, 비난과 욕설로 내팽개쳤던 주변을 다시 보라. '다름'을 이유로 '틀림'이라 낙인찍으며 나의 옳음을 독선적으로 주장하던 자신을 돌아보자. 요컨대, 신·구 세대 차이나 빈·부 차이보다 중요한 건 지향성이나 실천력과 같은 '삶의 태도'의 차이다. 나아가 대안적 실천에는 지식, 기술, 가치도 중요하나, "좀 손해 보면 어때, 사람을 얻는데!"라는, 일상적 '공감'의 역량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등가법칙과 착취법칙이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 자체를 담담히 바라보자. 이반 일리치 선생의 통찰처럼, 남성과 여성이라는 토속적인 젠더 차이가 소멸하고 양성 모두 동질적인 권력 게임에 편입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녹색평론> 133호, '하느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참조). 이런 현실 속에서 상처받고 고통 받는 우리 모두에 가만히 손을 내밀자.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소중히 보는, 생명의 법칙, 존엄의 법칙, 선물의 법칙이 대안의 실마리가 아닌가?

국가, 자본, 상품, 권력의 패러다임을 떠나 공동체, 자유, 선물, 호혜의 패러다임을 추구한다는 대전제에만 합의한다면, 우리는 이 '진정성'의 방향성 안에서 얼마든지 다양성을 펼칠 수 있다. '서로 손가락질하는' 상품 패러다임은 개별화와 경쟁을 낳지만, '서로 손을 내미는' 선물 패러다임은 유대감과 협동을 낳는다. 나와 너라는 존재, 나 속의 너, 너 속의 나라는, 이 상호 관계 자체가 큰 선물이다. 우리 자녀들조차 '하늘이 준 선물'로 보면 그렇게 안달할 필요가 없고 개별적 학부모를 넘어 '사회적 부모'로 거듭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눈과 귀, 몸과 마음이 열리면, 이제 비로소 우리의 다름과 다양성은 서로 어우러지면서 새로운 풍요를 낳는다. '희소성 법칙'이 지배하는 시장 거래가 아니라 '존엄성 법칙'이 통하는 호혜관계, 선물의 관계, 이반 일리치 선생이 강조한 우애와 환대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누가 뭐래도 우리가 '지금, 여기서' 실천해야 할 역사적 과제다. 이것은 당위이기 이전에 이미 우리 현실 속 즐거운 실천의 일부다. 희망버스, 촛불광장, 민들레공부방, 생협, 협동조합 카페, 마을 공동체, 인문학 모임, 작은 도서관, 노동·시민대학, 동아리 등이 그 실례다.

'비폭력대화(NVC)'로 상징되는, 경청, 공감, 성찰, 배려, 신뢰하는 태도, 그리고 (군대식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식' 조직화 방식이 새로운 관계 방식이다. "막말이나 단언하는 태도를 삼가는 것", "남보고 하라고 하기 전에 나부터 해보는 것", "내가 손해 좀 보면서 남을 덕 되게 하는 것",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 "함께 만나 재미있고 의미 있게 어울리는 것" 따위가 참된 삶의 지혜다. 이런 실천을 통해 더 이상 생산과 소비가 명확히 분리되지 않는, 더 이상 너와 내가 원자적으로 나뉘지 않는, 더 이상 이기심과 이타심이 이분법적으로 갈라지지 않는, 더 이상 공동체와 개인이 적대적으로 만나지 않는, 그런 열린 관계, 그리고 그것을 창조하는 새로운 주체 형성(공동체적 인간-homo communitas, 협동하는 인간-homo cooperaticus)이 희망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이 대안의 길이 힘들긴 하지만 '공감(empathy)'의 역량과 더불어 같이 가면 즐겁고도 행복한 여정이란 사실이다. 내면에 갇힌 협동심의 해방을 논하는 <투게더>(김병화 옮김, 현암사 펴냄)의 리차드 세넷이 "공동체가 비록 삶의 전부를 채워주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진지한 즐거움을 약속한다"고 한 것처럼 우리 모두에겐 '진지한 즐거움'을 향유할 사회적 권리와 책임이 있다.

* 위의 글은 <민들레> 90호 "초록동색(草綠同色)"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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