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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불평등·고통을 '차가운 수식'으로 푼 세계적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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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불평등·고통을 '차가운 수식'으로 푼 세계적 천재! [프레시안 books] 아마티아 센의 <자유로서의 발전>
불가능성의 경계를 넘다

'국제 서울 사회적경제 포럼'을 핑계로 한 주를 미뤘으니 더 이상 그럴듯한 핑계가 없었다. 솔직하게 "내가 아직 아마티아 센에 관해 쓸 능력이 안 된다"고 하려면 3주 전에 청탁을 거절했어야 했다. "번역본을 다 읽지 못했다. 난 한 글자도 빼 놓지 않고 꼼꼼히 읽었을 때만 서평을 쓰기로 했다"고 말하는 건 꽤 그럴듯한 이유가 되겠지만 그건 "게으름이 용서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나쁜 선례를 남길 것이다. 무엇보다도 얼굴 한번 본 적 없는(또는 스쳐 지나가며 인사해서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프레시안 books' 기자의 "타인에 대한 신뢰"를 감히 훼손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든 쓰면 될 것을.

서평이라고 하지만 이 글은 보통의 서평이 가져야 할 미덕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 이 글은 꽤 오랫동안 읽은 센의 여러 저작에 대한 내 나름의 이해라는 게 옳을 것이다. 즉 이 글은 3류 경제학자가 아마티아 센이라는 위대한 학자를 멀리서 바라본 스케치이다. 당연히 센의 저작이 지닌 미묘한 논리와 이론적 배경 등은 거의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정이니 이 책의 한계를 지적하거나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일 등, 훌륭한 서평이 지녀야 할 미덕은 전혀 갖추고 있지 못하다. 단지 이 글의 독자가 센이라는 거대한 산에 흥미를 느끼고, "아무리 어렵다 해도 한번 직접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 <자유로서의 발전>(아마티아 센 지음, 김원기 옮김, 유종일 감수, 갈라파고스 펴냄). ⓒ갈라파고스
센은 거의 모든 인문사회과학 영역에 등장한다. 그만큼 다양한 학술지(경제학, 철학, 인류학, 역사학, 생물학 등)에 기고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사회적 선택이론"에 정통한 이론경제학자고 동시에 인도와 같은 '제3세계'에 도저한 관심을 지닌 발전경제학자이며, "정의론"의 일각을 차지하는 정치철학자, 또는 도덕철학자이다. 나아가 그의 논문과 책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처럼 고대 동양철학(특히 인도철학)의 현대적 해설가이기도 하다.

놀라운 것은 그 모든 분야의 이야기가 하나의 굵은 줄기로 꿰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내 생각에 가장 중요한 축은 "사회적 선택이론"이다. 다음은 "역량이론"(capability theory, 나는 '능력'으로 번역해 왔지만 이번에 번역된 <자유로서의 발전>(아마티아 센 지음, 김원기 옮김, 유종일 감수, 갈라파고스 펴냄)에서는 '역량'으로 번역했다)에 기초한 발전경제학, 그리고 "정의론"이다. 센은 수많은 공식적(formal, 수학) 논문과 에세이를 종합한 책을 주기적으로 냈는데 위 세 축의 순서대로 1982년의 <선택, 후생 그리고 계측>(Sen, 1982, "Choice, Welfare and Measurement", Harvard Univ. Press, 전문적인 논문집이라 번역이 안 됐을 것이다. 1970년의 <집합 선택과 사회적 후생>을 꼽을 수도 있다.), 1999년의 <자유로서의 발전>(Sen, 1999, "Development as Freedom", Oxford Univ. Press), 그리고 2011년의 <정의라는 생각>(Sen, 2011, "The Idea of Justice", Belknap Press, 누군가 판권을 땄다는 데 아직 번역이 나오지 않고 있다.)으로 출판됐다.

웬만한 천재라면 이 중 어느 하나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어려울만한 주제들이다. 그가 굵직한 주제들을 섭렵할 수 있었던 데는 주위의 탁월한 인물들의 덕이 컸을 것이다. 20대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마르크시스트인 모리스 돕과 신고전파학자인 데니스 로버트슨의 공동 강의, 그리고 피에로 스라파의 강의를 들었고, 그의 논문 지도교수는 케인스의 수제자인 조안 로빈슨이었다.

30대에는 이미 세계적 명성을 떨치고 있던 케네스 애로우, 존 롤스와 하버드 대학에서 '사회정의론' 공동 강의를 했다(샌프란시스코에서 그는 "애로우와 롤스, 그리고 어떤 무명인사가 가르치는 놀랍도록 흥미로운 강좌"를 아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평생의 친구 마합 울 하크는(그는 일찍 죽었는데, 이 책 서문에서 센은 아직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훗날 그가 유엔에서 자신의 이론을 활용해서 인간개발지수 등을 만들도록 이끌었다.

사회적 선택이론, 역량이론, 그리고 정의론은 서로 얽혀있는데 그 연관을 가장 간명하게 보여주는 글은 그의 노벨상 수상 강연일 것이다(Sen, 1999, The Possibility of Social Choice, American Economic Review, 89). 이 책을 읽을 때에도 큰 도움이 될 테니 관심 있는 독자는 같이 읽어보시기 바란다(불행히도 대중 강연인데도 그리 쉽지는 않을 테니 내 블로그, "모지리의 경제방"에 있는 요약도 참조하시라).

'사회적 선택이론'은 그가 주류 경제학에서 인정받은 주제이자, 그의 수학적 능력, 논리적 치밀함을 보여준다. 애로우의 불가능성 정리는 많은 이들에게 실망과 동시에 도전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사회적 선택' 이란 개인의 선택(선호)이 사회 전체의 선호로 집계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예컨대 개인들은 소녀시대 9명의 멤버 각각에 대한 선호 순서를 가지고 있을 텐데, 이를 집계(aggregate)해서 사회적으로도 9명의 순위를 결정할 수 있는가이다. 불행하게도 애로우는 "가장 온건한 그럴듯한(reasonable) 조건조차 동시에 만족시키는 사회적 선택 과정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즉 1) 파레토 효율성(모두 좋아하는 순서는 사회에서도 마찬가지 순서로 나타날 것이다.) 2) 비독재(독재가 존재해서는 안된다.) 3) 독립성(무관한 변수에 의해 선호가 바뀌지 않는다, independence of irrelevant alternatives, IIA) 4) 무제한 영역(unresticted domain, 사회적 선호는 완전한 순서 매김이어야 하며 이행성을 가져야 한다)이라는 네 가지 조건은 누구나 받아 들일만한 공리지만 이 네 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사회적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센은 애로우의 사회적 선택이론을 면밀히 검토해서 불가능성의 경계를 허물어뜨렸다. 주류경제학의 가정을 넘어서, 개인 간 선호의 (부분) 비교가 가능하고, 명백한 부정의와 관련된 정보기초를 추가하면 우리는 불가능성의 경계를 넘어서 가능성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11장과 12장). 이 과정은 동시에 주류경제학의 공리주의 효용이론을 그들의 방법에 의해서 철저히 비판하는 과정이었으며(예컨대 "자유주의 불가능성 정리"), 또한 애로우로부터 배운 공리에 의한 논리적 전개를 훈련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개인적, 사회적 사건들을 꼼꼼히 살펴서 애로우로부터 배운 훈련으로 재정리했다. 예컨대 9살 때 자신의 정원에서 총을 맞아 죽은 남자로부터 인종과 종교의 문제를, 1950년대 대기근으로부터 기아의 문제를, 아시아의 "사라지는 여성들" 현상으로부터 성 평등 문제에 철저한 논리 기계를 들이댔다. 바로 여기에서 명백한 부정의에 관한 정보의 추가, 또는 개인 간 선호의 비교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고, 그런 가정을 추가했을 때 가능성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또한 그의 분석은 이 책의 각 장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일반적인 통념과는 다른 결론을 낸다. 예컨대 기아라는 사건(4장과 7장)은 단지 식량의 생산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규범, 또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의 문제라는 사실을 밝힌다. 즉 똑같은 식량 생산 능력을 가졌다 해도 독재 국가에서만 기아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과 출산률의 문제(8장과 9장)가 여성의 교육 수준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도 밝혀낸다. 이런 사회적 문제들은 그 어느 것도 단지 소득을 증가시켜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도대체 "발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명백한 현실의 부조리를 향한 따뜻한 시선, 또는 열정은 냉정한 수학적 분석과 결합됐다. 센을 논리적 불가능성의 세계에서 가능성의 세계로 넘어가게 한 것은 정열과 논리의 결합인 셈이다. 그리고 그 결실은 유엔 개발계획(UNDP)에서 발전경제학의 새로운 시각과 정책으로 이어졌다.

센이 어떤 식으로 학문을 했는지, 사례를 보여주는 편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사회의 빈곤 문제에 관심을 지닌다. 가장 간단한 지표로는 빈곤율이 있다.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어떤 기준을 정해서 기준 이하의 사람 수를 세어서 전체 인구로 나누면 나오는 숫자다. 가장 간단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지표다.

하지만 이 지표는 중요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빈곤 기준 이하의 사람들이 얼마나 가난한지, 또 어떤 분포를 이루고 있는지 보여주지 못한다. 이 지표를 개선하는 것이 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면 빈곤선 바로 밑에 있는 사람들의 소득을 늘려서 기준선을 넘도록 하면 된다. 심지어 더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을 이 사람들에게 재분배해도 빈곤율은 낮아질 것이다.

그래서 나온 지표가 빈곤갭이다. 이 지표는 모든 사람의 실제 빈곤과 기준선의 차이를 합해서 총인구로 나눈 것이다. 즉 가난한 사람들이 빈곤선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합한 수치이다. 이 수치는 곧 가난한 사람들을 모두 기준선 위로 올리는 데 드는 비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빈곤갭 역시 가난한 사람들 내부의 불평등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똑같은 빈곤갭을 가진 두 사회라도 내부의 불평등 정도는 사뭇 다를 수 있다.

이런 구체적인 문제점을 센은 공리(즉 애로우로부터 배운 방식)로 해결한다. 바람직한 지표라면 기준선 이하 사람들의 소득이 감소하는 경우 그 수치가 증가해야 한다(단조성 공리). 또 기준선 이하 사람의 소득이 자기보다 부자인 사람에게 재분배된다면 빈곤이 악화된 것이므로 그 수치가 증가해야 한다(이전 공리, transfer axiom) 등을 추가하는 것이다.

이런 공리를 충족하도록 만든 빈곤지표가 센지수이다 ( P = H〔I +(1-I)Gp〕,
P: 센 지수, H: 빈곤율, I: 소득갭 비율(income gap ratio), I = (z-yp)/z, yp = 1/p·∑yi,
Gp: 빈곤층 내부의 지니계수). 이 지표는 어떤 이유로든 빈곤이 심해지면 수치가 증가해서 0에서부터 1로 향한다. 또 위에서 거론한 빈곤의 원인을 모두 담고 있으므로 전체 빈곤의 정도를 표시할 뿐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 빈곤이 비롯되었는지도 알려 준다. 사람들이 빈곤으로 인해 불행해진다 해도 그 이유는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관찰하고 각각을 공리로 만들어서 종합 지표를 만든 것이다.

자유로서의 발전과 정의

센은 인도 태생이고 젊은 시절 박사과정 중간에 학칙을 어기고 인도로 돌아갈 정도로 자신의 나라, '제3세계' 국민, 특히 약한 사람들의 삶에 끝없는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현실에 대한 끝없는 관찰과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그의 글에서 'reasonable'로 표현된다) 명백한 합의를 추가 정보로 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그의 무기이다.

센은 2011년 롤스에게 바친 책(<정의라는 생각>)에서 "스승을 극복하는 것이 스승에 대한 최선의 보답"이라는 말을 증명하려는 듯, 그에 대한 종합적 비판을 제시했다. "초월적 제도주의(transcendental intsitutionalism)"라는 낙인이 그것인데, 아마도 시작은 기본재에 관한 논의였을 것이다.

롤스 정의론의 실천적 해결책은 모두에게 필요불가결한 기본재(책에서는 "기초재화"로 번역했다.)를 공급하는 건데, 이에 대해 센은 "무엇의 평등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예컨대 모두에게 필요한 기본재를 똑같이 제공하면 우리는 조금 더 평등한 사회에 가까워질 것인가? 센은 우선 장애인의 경우를 예로 든다. 예컨대 다리를 다친 장애인에게 모두가 합의한 자전거를 제공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이를 일반화하면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다 다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할까?

그 답이 역량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떤 기능(functioning)이 필요하고 그것을 갖추는 것이 역량이다. 모든 사람의 역량이 커질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발전이다("역량 확대로서의 발전"이라는 제목의 논문도 있다). 센의 자유란 곧 역량의 확대이다. 개인이 나름대로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건 곧 그의 실질적 자유가 확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발전은 "자유의 확대"="역량의 확대"로 판단해야 한다. 단순히 소득이나 또는 효용의 증대로 발전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 아마티아 센. ⓒ출처 : ko.wikipedia.org
이것은 전형적인 개인주의자로서의 센의 면모가 최대로 발휘된 논지이다. 또 이 얘기는 사회적 선택이론에서 얘기한 개인 간의 효용비교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역량의 확대가 시장에서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5장). 정부의 역할은 개개인의 역량을 확장하는 어떤 정책일 것이며 사회는 토론에 의해서(여기서 그는 숙의 민주주의론자이다) 바람직한 가치에 합의해야 한다. 개인의 선호(자유)가 단순 다수결에 의해서 집계될 수는 없지만(불가능성 정리), 우리는 몇 가지 명백한 부정의의 개선에 합의하고 개선을 위한 개인, 또는 집단의 역량을 강화하는 방안에 대해서 합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11장과 12장). 우리는 센의 논의에서 개인에서 사회로, 동시에 사회에서 개인으로의 피드백 과정이 (아주 명료하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어쨌든) 설정되어 있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과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보편적 개인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론해서 우리를 모두 행복하게 해 주는 그런 사회제도를 사전적으로 설계할 수는 없다. 즉 초월적 제도주의는 실제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역할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센이 개인에서 시작해서 사회 정의에 이르는 길을 아주 투박하게 -또는 어쩌면 나의 많은 오해를 통해서- 추적했다. 그의 정의로운 사회는 부분적으로 개개인의 역량을 확대함으로서 도달할 수 있다. 당연히 다이내믹 코리아를 사는 우리는, 또 단번에 사회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혁명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감질날 것이고 그를 단순한 자유주의자로 단죄하기 십상이다. 실제로 그는 사회가 개인의 선호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이 책 곳곳에서 강조하지만, 바로 그런 선호와 가치를 결정하는 커다란 구조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예컨대 인도의 카스트 제도 자체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의 이론으로 한국의 재벌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추론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센의 관심사가 궁극의 원리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생긴 결과겠지만, 어쩌면 그의 방법론이나 사회관에 문제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추상적인 차원에서도 개인과 사회 간의 관계, 피드백 메커니즘이 명확하게 드러나려면 현재 센의 이론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마지막으로 번역자에게 감사의 말을 드려야겠다. 몇 년 전 쯤, 이 책의 첫 번째 번역본은 도저히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내 인내심은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하지만 이 책은 약간의 여유만 주어지면 다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차분하게 번역되어 있다. 언젠가 위에서 말한 세 권을 정독해서 센에 관한 논문을 쓰겠다는 내 '야심'이 이 책 덕에 그만큼 빨리 실현될 수 있을 터다. 유종일의 해제 역시 한국 최고의 경제학자답게 센 경제학의 핵심을 꿰뚫고 있으니 미리 읽으면 도움이 될 거라는 점을 사족으로 덧붙인다.

좋은 책에 엉터리 서평을 붙인 미안함에 독자들에게 작은 선물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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