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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가장 아름다운 자동인형, 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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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우리 시대 가장 아름다운 자동인형, 샤이니 [분석] 샤이니의 'Everybody' 안무가 보여주는 몇 가지 징후
최근의 어떤 아이돌의 무대도 샤이니의 'Everybody' 안무만큼 인터넷 세상을 술렁거리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음원이 발매되고 뮤직 비디오가 발표되기도 전, 팬들이 '강남한류페스티벌' 무대에 등장한 샤이니의 'Everybody' 첫 무대를 촬영하여 업로드했고, 곧바로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다섯 아이들은 공기와 같이 가볍게, 그리고 쉬지 않고 격렬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때로 중력을 초월한 듯 하늘을 날아다녔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리듬에 맞춰 조직적으로 따로 또 같이 움직였는데, 이건 칼 군무라는 명칭으로는 도저히 다 표현할 수가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샤이니는 인간이 아닌 하나의 변신 합체 로봇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실상 너무나 가늘고 가볍게, 시간을 잘게 쪼개면서 움직여서, 인간이라기보다는 마치 애니메이션 캐릭터, 아니 심지어 천수관음보살처럼 보였다. 물질성이 제거된 몸은 아름다웠지만 무성적이었다.

▲ 샤이니의 뮤직 비디오 중 한 장면. ⓒSM엔터테인먼트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지만 동시에 경악했다. 우리 모두는 그들이 그려진 캐릭터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단하다 못해서 기이하기까지 한,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듯한 퍼포먼스의 의미는 곧 공개된 뮤직 비디오 안에서 드러났다. 뮤직 비디오 안에서 샤이니는 인간이 아닌 춤추는 인형이었다. 모두가 잠든 밤, 기묘한 분위기의 인형이 전기 콘센트를 꽂는다. 전원이 들어오자 무생물처럼 널브러져 있던 샤이니의 멤버들은 하나 둘 일어나 화려한 춤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 즐기자고 유혹하지만, 이들의 춤은 함께 즐기기엔 너무나 난해하다. 그들은 자동인형이기 때문이다. 안무 콘셉트 안에서, 전원이 들어와 있는 한, 그들은 격렬하게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퍼포먼스가 끝나고 전원이 꺼지자 샤이니-자동인형들은 다시 무생물의 신체로 돌아가 덜그럭거리며 땅바닥에 쓰러진다.

▲ 샤이니의 뮤직 비디오 중 한 장면. ⓒSM엔터테인먼트

인간이 잠든 동안 장난감 혹은 무생물들이 생명을 얻어 춤추고 노래하며 사랑하고 모험한다는 이야기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 작품에서 다루어져 왔다. 가령 <호두까기 인형>이나 <코펠리아> 같은 낭만주의 발레에서부터, <장난감 병정>이나 <피노키오> 같은 소설, 그리고 <토이 스토리> 같은 애니메이션들은 모두 비슷한 아이디어 아래에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샤이니의 보도 자료에서는 'Everybody'의 안무가 장난감 병정의 콘셉트를 가지고 있다고 밝힘으로써 위 퍼포먼스가 '살아 움직이는 인형'의 계보에 서 있음을 확실히 하고 있다.

그런데 위에 열거한 작품들의 목록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우리는 다소 흥미로운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위의 작품들은 19세기 낭만주의 예술작품에 주로 원전을 두고 있으며, 처음에는 소설로 창작되었지만, 발레 작품으로 생명을 얻었고, 최근에 와서는 주로 애니메이션으로 창작되는 주제라는 것이다. '장난감 병정' 모티브만 해도, 안데르센과 호프만의 동화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발레로, 그리고 최근에는 <토이 스토리> 등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특히 애니메이션에서 장난감 병정을 비롯한 움직이는 인형 이야기들은 반복되어 묘사되었다.

사실, 애니메이션은 '움직이는 인형'을 재현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예술장르일 것이다. '영혼 없는 무생물에 혼(anima)을 불어넣어 살아 움직이게 한다는(amimate)' 개념 자체가 애니메이션의 역사적 기원과 장르의 존재 양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애니메이션 영화사 초기인 1900년대 초반, 카툰 애니메이션보다도 먼저 만들어진 것은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stop motion animation), 즉 무생물이 살아 있는 듯 보이게 만드는 일종의 트릭 필름이었다. 물론, 이러한 먼 옛날의 작품 이외에도 우리는 클레이부터 바비 인형, 그리고 디지털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인형과 로봇들이 연기하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수없이 만나 왔다.

그런데 우리는 위 애니메이션과 발레, 그리고 샤이니의 퍼포먼스가 같은 원작을 공유하면서도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인형이 사람을 연기하는가, 사람이 인형을 연기하는가라는 비슷하면서도 정반대인 아주 근본적인 차이이다.

인형이 사람을 연기할 때, 무생물이 영혼(anima)을 얻은 듯 생기 있어 보인다면, 사람이 인형을 연기할 때, 그들은 반대로 마치 혼이 없는 듯 움직인다. 움직이는 인형이 일종의 삶의 창조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 것이라면, 사람이 인형을 연기한다는 것은 정 반대로, 인간의 몸에서 영혼이 있음을 상징하는 몸짓을 배제하고, 죽음, 혹은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가 지닌 운동의 성격을 부여하는 과정이다.

▲ 발레 <코펠리아> 중 한 장면. (출처 //tintorettodance.com/)

무용수가 이러한 다른 차원의 존재를 모방한다는 것은 몸에서 인간의 동작을 빼고, 신체의 동작을 인위적으로 움직이는, '리애니메이팅(reanimating)' 즉, 일종의 애니메이션 과정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가령 발레 <코펠리아>에서 여주인공은 인형을 모방한 동작을 연기하는데, 이 퍼포먼스는 생기 없는 눈, 딱딱하게 굳은 관절, 19세기 유행했던 자동인형(automata)의 실린더 운동에 기초한 반복적 운동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비슷한 사례를 우리는 로봇 춤 등 현대의 대중무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발레나 로봇 춤들이 인간의 동작에서 많은 것을 생략한 무생물의 모습이라면, 샤이니의 과잉 동작의 퍼포먼스는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샤이니는 무엇으로 '애니메이팅' 된 것일까?

이 의문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뮤직 비디오와 무대 퍼포먼스를 통해 샤이니가 연기하는 것은 호두까기 인형이나 코펠리아 같은 기계장치 인형이 아닌, 디지털 애니메이션일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실마리는 도처에 있다. 가령 'Everybody'의 뮤직 비디오의 처음과 끝에서 샤이니의 멤버들은 마치 죽어 있는 듯 쓰러져 있었으며 전기 콘센트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앞서 언급한 관점으로 바라보았을 때, 이는 생기를 빼고 다시 인간을 애니메이팅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안무 도중 '피리 부는 소년'으로 설정된 민호는 아이들을 차례로 깨우는데, 이들은 줄-태엽-콘센트-리모컨으로 마치 자동인형의 역사에서 동력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듯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리모컨으로 움직이는 이 소년들은 마치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아름답지만 무성적이며 근육의 부피감을 비롯한 신체의 물질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 샤이니의 뮤직 비디오 중 한 장면. ⓒSM엔터테인먼트

무엇보다도 샤이니의 안무와 디지털 이미지의 관련성은 바로 안무가인 토니 테스타 자신이 인터뷰에서 밝힌 전작 '셜록'의 콘셉트에서 나타난다.

"'셜록'의 중심 개념은 멤버 전원이 사실은 한 명이라는 겁니다. 영화 <매트릭스>의 다중 그림자 효과처럼 스냅 사진 같은 분절을 표현했죠." (2013. 1.1. <동아일보> ☞바로가기 : )

토니 테스타의 이 발언은 그가 'Everybody'의 안무에서도 마찬가지로 디지털적 시각을 표현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셜록'에서의 <매트릭스> 모티브를 먼저 살펴보는 것은 샤이니의 안무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토니 테스타가 언급한 영화 <매트릭스>에서의 '다중 그림자 효과'는 짧은 순간의 움직이는 이미지를 연속 동작으로 분할하여 공간 안에 나열하는 기법으로서 죽은 시간(bullet time)또는 시간 분할(time slice)라고 불리는 기법이다.

<매트릭스>에서 워쇼스키 형제는 여러 개의 카메라를 배우의 주변에 원형으로 배치하고, 동시에 촬영한 사진을 시간적으로 연결시킴으로서 인간의 감각으로는 감지하기 어려운 시공간 감각을 영화 속에서 구현해 내었다. 같은 기법으로 KBS의 <슈퍼 피쉬>에서는 중국의 전통적인 물고기 잡는 방법을 포착해 낸 바 있다. 이 기법을 통해서 바라보는 영상은 사실상 인간의 자연스러운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시에 여러 개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리고 시간을 멈추고 대상을 관찰하는 기법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잘게 쪼개는 이러한 기법은 필름 카메라의 발전 과정에서도 이미 발견된 바 있었다. 1800년대 중반, 에드워드 머이브리지는 여러 대의 카메라를 이용해 달리는 말의 연속 사진을 찍어내었는데 이와 같은 기계적 시각은 이제껏 인간이 감지한 바 없는 것이었다. 유사한 실험이 에티엔느 쥴 마레이에 의해서도 실행되었다. 마레이가 개발한 사진총은 시간 안에서 움직이는 형상의 궤적을 하나의 화면에서 구현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었다.

▲ 에드워드 머이브리지의 'The Horse in Motion'(1878) (출처 wikimedia common)

▲ 마레이의 크로노포그래피 (1880)

이들 사진과 <매트릭스>, 혹은 <슈퍼 피쉬>와 같은 디지털 영상에서의 타임 슬라이스 기법을 비교해 보자. 머이브리지와 마레이가 평면적 차원에서, 혹은 순차적인 시간 안에서 '죽은 시간'을 표현해 낸 데 반해, 디지털 영상에서는 3차원적 공간과 시간 안에서 정지한 시간을 표현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 이들이 근본적으로 같은 아이디어를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기계적 시각-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드러나는 새로운 시공간 감각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 분절된 동작들이 샤이니의 '셜록'과 'Everybody'에서 어떻게 드러났는지 기억한다.

샤이니의 퍼포먼스에서의 다소 과잉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동작들은 이 안무가 디지털 미디어로 감각 가능한 시공간 감각을 표상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비로소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셜록'과 'Everybody'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시간적으로 분절된 동작들이 타임 슬라이스에서 드러난 분절적 시각이라면, 때로는 지나치게 빠르게, 때로는 허공을 달리듯 지나치게 느리게 표현된 안무들은 디지털 영상에서 리모컨과 편집 기계로 조작 가능한 영상에서의 시간을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소위 '풍차 돌리기'로 불리는 퍼포먼스를 마레이의 사진, 그리고 타임 슬라이스 기법에서 활용된 여러 대의 카메라, 그리고 안무가인 토니 테스타의 발언과 비교해보면, 이 장면이 프로펠러 비행기나 풍차가 아닌, 디지털 미디어 안에서 잘게 쪼개진 시간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흥미롭게도, 그 '풍차 돌리기' 장면은 천수관음보살의 도상과도 닮아 있다. 이 도상이 인간의 시간을 초월하여 동시에 여러 곳에 편재하는 신적 존재를 상징한 것이라고 볼 때, '풍차 돌리기' 장면은 말 그대로 '하나이되, 동시에 여러 명인, 하나의 시간을 잘게 쪼개어 존재하는' 디지털 미디어시대의 아이돌 자신을 상징하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 샤이니의 뮤직 비디오 중 한 장면. ⓒSM엔터테인먼트

한 아이돌의 퍼포먼스가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 시공간 감각을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놀라우면서도 새롭지만은 않은 사실인데, 지난 시대의 무용들 역시 그 시대의 주요한 시공간 감각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안무(choreography)는 시간 안에서 일련의 움직임을 디자인하는 활동이다. 그 시대의 주요한 시공간 감각, 그리고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안무가, 그리고 공간 안에서 인체와 세상을 다루는 예술가들의 작품 안에 반영이 되어 온 것이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머이브리지와 마레이의 연속 사진들 역시 근현대의 예술작품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카메라에 의해 드러난 이미지의 시간적 배열과 잔상은 시간, 그리고 속도감을 공간 안에 제시하는 새로운 시각 언어였으며, 새로운 미래 시대의 시공간 감각을 암시하는 이미지였다.

가령 20세기 초 러시아의 구성주의 연출가 메이에르홀리드(Meyerhold)는 진보적인 미래를 표현하기 위해 머이브리지와 마레이의 연속 이미지를 무용과 무대 연출을 통해 표현하였으며, 마르셀 뒤샹이나 미래파의 시각예술 작품에도 사진의 영향이 드러나 있다. 잔상의 아름다움은 영화를 통해서도 드러났는데, 캐나다의 애니메이션 작가인 노먼 맥러렌(Norman Mclaren)은 <파 드 두(Pas de Deux)>라는 단편영화()를 통해 마레이의 잔상 사진에서 나타난 운동의 궤적을 영상으로 표현하였다. 영상으로 표현된 무용수의 운동의 잔상은 'Everybody'의 '풍차 돌리기'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샤이니의 새로운 안무가 위의 작품들의 뒤를 잇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시공간 감각의 표현인 동시에 세계적인 안무가와 K-POP 스타의 야심적인 작품이라고 해도, 이 작품은 여전히 '모두 다 함께 흥겹게 즐기기'에는 여전히 난해하고 불편한 점을 가진다. 아주 단순한 질문을 던져보자. 샤이니는 리모컨을 돌리면 움직이는 디지털 미디어 속 캐릭터인가? 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많은 관객들은 그들을 디지털 영상을 통해 만나게 되지만, 사실상 그들은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아닌 피와 살, 뼈로 구성된 인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들은 생명이 없는 디지털 이미지처럼 디지털 미디어의 시공간을 몸으로 연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디지털 이미지인 것처럼 애니메이팅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영상 이미지는 지치거나 다치지 않는다. 이들은 숨이 차지도, 살이 찌지도 않는다. 더욱이 인간이 영상 이미지를 연기한다는 것은 중력이나 속도감 같은 물리적 법칙을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아이돌 그룹 샤이니. ⓒSM엔터테인먼트

샤이니의 안무의 아름다움 이상으로 안무의 고난이도가 화제가 되었고, 심지어 안무 연습 영상이 공개되어 스펙터클화되었음을 떠올려보자. 온유는 무대 공연 중 부상을 당했고, 샤이니 멤버들은 어떤 누나 팬이 "얘들아 밥은 먹고 다니니"라고 절규할 정도로 혹독한 다이어트 중인 것으로 보인다. 아마 그것은 우리가 'Everybody'의 가사처럼 모두 함께 즐길 수 없는 중요한 이유라고도 할 수 있다. 전 세계인이 다 함께 즐길 수 있었던 싸이의 '강남 스타일'의 단순한 안무, 자연스러운 신체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명확히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샤이니의 뮤직 비디오가 19세기의 발레 예술을 계승하고 있음을 스스로 암시하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낭만주의 발레 역시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해야 가능한 대표적 예술 장르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코펠리아>나 <호두까기 인형> 등 샤이니의 안무와 관련된 발레 작품들의 원작자인 호프만의 소설 작품들은 서구 근대를 형성한 주요 사상인 '인간 기계론'을 논할 때, 가장 자주 언급되는 작품들이다. 인간 기계론에 의하면 인간은 스스로 동력 장치를 가동시키는 하나의 기계이며, 각각의 기능을 가진 기관들의 총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인체에 대한 연구는 지속되어 인간을 닮은 기계를 만들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이 바로 자동인형(automata)이었다.

기계장치로 제작되어 플루트를 연주하거나 글을 쓰거나 하는 자동인형은 동시대인들에게 감탄을 자아내고 큰 인기를 끌었지만 동시에 공포를 불러왔다. 호프만의 소설 <모래사나이>나 <호두까기 인형>에는 그러한 동시대인들의 두려움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1870년대, 요정과 신화의 세계를 다루던 낭만주의 발레가 새로운 주제로 자동인형과의 사랑을 다루게 되면서, 호프만 소설 속 자동인형에 대한 공포는 인간이 연기하는 자동인형을 구경하는 즐거움으로 변형된다.

▲ 피에르 자크-드로가 1770년대에 만든 글씨 쓰는 자동인형. (출처 //www.thisiscolossal.com/)

가령 <모래 사나이>를 원작으로 삼은 발레 <코펠리아>에서 여주인공 스와닐다는 자동인형을 묘사한 딱딱한 팔다리의 동작에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더 나아가 점점 더 빠른 스텝의 민속춤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동작을 연기하며 관객에게 기량을 과시한다. <호두까기 인형>에서도 역시 많은 종류의 인형들이 등장하여 다양한 테크닉을 보여주었다. 자동인형의 모티브는 무용수의 기량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양한 특징의 안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발레는 무용수를 하나의 기계로 보는 당대의 관점을 가장 잘 반영한 대중 예술 장르였다. 1820년대에 정착된 푸앵트(발 세우기, point) 기술은 한없이 가벼운 존재로서 여주인공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흰 치마들은 이들 발 기술을 효과적으로 전시하는 동시에 여주인공의 순결함과 비육체성(비물질성)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19세기 내내 여자 무용수들의 기교 경쟁은 점점 더 심해졌다. 대규모의 공연에서는 엄청난 출연진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위한' 훈련을 계속했고, 무용수들은 고도로 발전하는 기교들을 익히기 위해 노동자처럼 훈련해야 했던 것이다. (도윤정,'벨 에포크의 춤-두 선구자와 발레 뤼스'(2013,프랑스 문화예술학회 가을 학술대회 논문 참고)

자동인형의 모티브를 연기한 발레리나들의 잔혹한 훈련의 역사를 그대로 한국의 아이돌의 상황으로 보아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이들이 동시대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엔터테이너이며, 자의식을 가진 예술가라기보다는 기획사에 소속된 일종의 예술 노동자라는 점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자동인형을 연기하였으며, 그 자신이 자동인형처럼 다루어진 발레리나와 마찬가지로, 샤이니 역시 디지털 애니메이션에서의 인형을 연기하기 위해 부상을 입을 정도의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그 연습 과정이 공개되어 시선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는 것이다. 'Everybody'는 디지털 시대, 한국의 <코펠리아>인 것이다.

기계의 몸짓과 시공간 감각을 인간의 몸에 적용하는 것이 발레뿐 아니라 근대 이후 현재까지의 인간의 삶과 문화에 적용되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따라서 'Everybody'의 안무로 인한 온유의 부상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걱정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신체 한계를 초월하는 디지털 미디어적인 시공간 감각이 인간 기계론적 패러다임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중첩되어 적용될 때 우리에게 닥쳐올지도 모르는 재앙에 대한 일종의 경고일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과대망상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우리 사회의 미의식이 소위 '카메라빨'이라는 미디어적 시각에 맞추어져 가고 있으며 많은 구성원들이 혹독한 다이어트와 성형이라는 신체 손상과 억압으로 자신을 규제해 가고 있음을 떠올려 보시기 바란다. 인간 기계론을 수입하여 가장 뿌리 깊게 내재화시킨 한국사회가 동시에 가장 디지털화의 속도가 빠른 사회라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뮤직 비디오 안에서 샤이니는 플러그를 꽂기 전에는 영혼 없는 무생물처럼 묘사되며, 그들의 몸은 어떤 존재에 의해 무대에 세워진 순간 비로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디지털 미디어적 감각으로 애니메이팅된다. 이것은 최첨단 미디어를 통해 가장 인간-기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K-POP의 아이돌, 혹은 더 나아가 한국 사회의 모습과 닮아있다. 어떤 사회는 자동인형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지만 어떤 사회는 같은 이야기를 아이돌의 퍼포먼스로 표현하는 것이다. 샤이니의 'Everybody'의 기이한 안무와 음산한 뮤직비디오는 어쩌면 외국인인 토니 테스타가 한국의 연예 산업에서, 그리고 한국 사회 전체에서 읽어낸 징후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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