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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찍은 사진 내가 봐도 걸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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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찍은 사진 내가 봐도 걸작이에요~ [최원호의 朵朵하우스] 아라키 노부요시의 <천재 아라키의 애정 사진>
결론부터 말하겠다. 아마추어 사진가를 자처하거나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지난 1년간 발간된 사진 책들 중에 딱 한 권을 추천해야 한다면 나는 이 책, <천재 아라키의 애정 사진>(아라키 노부요시 지음, 이윤경 옮김, 포토넷 펴냄)을 별 고민 없이 권할 것이다. 아, 아라키가 혹시 '에로 광대' 아라키 노부요시 말인가? 변태 사진 많이 찍은? 그렇다. 그 사람이다. 그러나 여자를 벗긴 뒤에 결박하고 찍어야 좋은 사진이 나온다는 뜻에서 추천하는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천재 아라키의 애정 사진>(아라키 노부요시 지음, 이윤경 옮김, 포토넷 펴냄). ⓒ포토넷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다른 모든 '아마추어를 위한 사진 책'들이 하나같이 놓쳐버린 사진 작업의 핵심적인 한 축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축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사진을 배우는 과정에서 꼭 마음에 새겨두어야 하지만, 지금껏 내가 읽어본 사진 입문서 또는 초급 교양서 중에 이 과정을 강조한 책은 하나도 없었다.

그 축이란 바로 단 한 장의 멋진 장면에 목매달지 않는 튼튼한 사진 데이터베이스의 축성 작업, 즉 아카이브 제작을 뜻한다.

결국 문제는 한 장만으로 사진의 질과 완성도를 평가하는 구조에 있다. 잘 찍은 사진 한 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물론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한 장의 사진에 모든 것을 농축시키고자 했을 때, 그리고 그런 방식이 지속적으로 되풀이되어 스타일로 굳어질 때 정형화는 피할 수 없는 부메랑이다. (…)
하지만 예술작품은 상식을 뒤집는 파격과 과감성, 인습적 사고에 균열을 주는 기발한 착상, 평범한 생각의 여백을 파고드는 새로운 실험 등을 통해 인간의 사유와 감성을 확장해줄 수 있어야 한다.
-<사진가의 우울한 전성시대>(박평종 지음, 달콤한책 펴냄, 232쪽)


거창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저 글에서 박평종이 좋은 사례로 꼽은 책은 얼핏 하나도 안 예술적으로 보이는 사진집 <윤미네 집>(전몽각 지음, 포토넷 펴냄)이다. 결정적인 한 컷, 즉 구도와 빛에 승부를 건 사진들이 아니라 사진집 전체를 통해 애정을 발산하는 드문 사례기 때문이다. 같은 주제를 가진 가족 사진집 <다카페 일기>(모리 유지 지음, 권남희 옮김, 북스코프 펴냄)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금방 알 수 있다.

이거는 아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이거는 딸의 예쁜 자태 하는 식으로 각각의 사진들이 귀여운 비주얼이나 재미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데에만 급급하면, 사진은 그 자리에서 '감상하기 좋은' 이미지로 소비되며 그 즉시 휘발한다. <다카페 일기>가 그렇다.

귀여운 아이들과 동물로 가득한 행복한 장면들로만 이루어진 <다카페 일기>는 마치 행복한 가족을 등장시키는 광고들처럼 매끈해서 '감상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의문'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늘 부드럽고 고운 빛과 잘 정리된 인테리어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 가족의 어머니는 감상자에게 어떤 '인간'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다카페 일기>는 거기에는 관심이 없다. <다카페 일기>의 촬영자인 아버지는 가족의 일부이기 이전에 마치 광고 사진가와 같은 역할을 맡았고, 결국 가족이기에 앞서 모델-사진가로 역할이 나뉜 이 관계의 풍경은 마치 무슨 프로모션 화보를 찍은 듯한 비현실감을 안겨준다. 따라서 감상자는 <다카페 일기>를 일종의 광고 이미지처럼 소비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대부분은 그걸 원했겠지만 말이다.

▲ <윤미네 집>(전몽각 지음, 포토넷 펴냄). ⓒ포토넷
그러나 <윤미네 집>에는 빗나간 구도와 실패한 노출, 때로 피로가 엿보이는 가족들, 딱히 눈을 잡아끄는 주요 사물이 보이지 않는 몇몇 광경들이 손쉬운 해석을 거부한 채 멀뚱히 감상자를 바라본다. 감상자는 그제야 "그런데 이건 무슨 장면이지? 이런 사진이 왜 사진집에 수록됐지?"라고 묻게 된다. 난해한 현대미술처럼 아예 파악 불가능한 비주얼이어서가 아니다. 분명히 다 아는 오브제들로 구성되었음에도 '이건 이런 사진이야'라고 말할 수 없는 생경함, 익숙한 사물들이 풍기는 모호함이다.

이 수수께끼 같은 시선들이 감상의 초점을 사진의 '화면' 바깥으로 이동시킨다. 즉,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 사진의 프레임을 벗어난 상상력은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추상적인 공간을 만든다. 감상자는 그때부터 사진 감상의 다음 단계로 진입한다. 시각적인 즐거움을 감상하는 데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이 사진으로부터 촉발되어 움직이는 모습을 주시하는 것이다.

그쯤 되면 이미 '그 사진에서 그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어디를 향했느냐'는 수수께끼의 답은 중요하지 않다. 아니,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게 중요하다. 이 단계에 다다르면 사진은 멋진 이미지로 소비되는 쾌락의 객체가 아니다. 사진은 우리 인간들이 서로에게 그러하듯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 어떤 종류의 신비를 소유함으로써 나에게서 존중받는 타자-다르지만 동등한 존재-가 된다. 감상자는 사진을 먹어치울 수 없고 사진과 대화해야 한다.

이 단계에 다다라야만 비로소 감상자의 관심은 사진가에게로 쏠릴 것이다. 사진을 찍고 골라 책에 싣는 과정을 통해 이러한 신비를 창조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진가는 신비의 출처이며 총합이다. 좋은 사진집을 만든 사람은 신비를 통해 자존하는 사진들의 집합체로, 영원히 그 명확한 기원을 찾을 수 없는 감동 또는 아픔을 제공한다. 사진가에 대한 관심, 한 권의 사진집에 대한 관심은 이런 종류의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이미지가 아니라 나와 교감하는 '자존하는 현상' 말이다.

사진이 제공하는 이런 종류의 소통은 여러 장의 사진을 묶어 볼 때 더욱 잘 느낄 수 있다. 한 장의 사진으로 느끼기는 왜 쉽지 않은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멋지게 찍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한 컷은 '모든 것을 담고 있어야 한다. 완결된 구조가 필요한 것이다. (…) 결점을 보완할 다른 구조가 없기 때문이다.(박평종, 앞선 책)' 안 그래도 단 한 장으로 구체화된 정서를 느끼기에는 자료가 부족한데, 시각적인 완성도가 높다 보니 그 감각적 힘에 압도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아름다움>(로저 스크러튼 지음, 이진영 옮김, 미진사 펴냄). ⓒ미진사
그러나 사진에게 수수께끼를 부여하는 감상자의 내면 속 공간은 하나의 비주얼이 아니라 지속되는 정서로 인해 탄생할 수 있다. 분위기를 형성하는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일종의 미장센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사진집을 읽는 시간은 감상자의 마음 속에 펼쳐진 빈 공간이 되고 사진들은 그 공간을 채워 넣는 오브제가 되어 세상 어디에도 없는 풍경이 발생한다. 자기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방금 발생한 낯선 세계를 관찰하는 기쁨. 이는 로저 스크러튼이 <아름다움>(이진영 옮김, 미진사 펴냄)에서 감각과 아름다움의 관계를 설명할 때를 떠올리게 한다. 어떤 감각이 그 자체로 만족스러울지라도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로부터 촉발된 감상-사고 활동에 이르렀을 때에야 아름다움은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진 아카이브 작업에 대한 감각은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소양이라 해도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도 왜 사진 학습서들은 사진 아카이브 제작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까? 눈을 현혹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원하는 건 정서적 풍경이 아니라 눈의 즐거움이다. 한시라도 빨리 예쁜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과목은 빛과 구도와 피사계 심도 조절 따위지, 많은 시간과 지속적인 인내를 요하는 데이터베이스 축적이 아니다.

교육은 시장의 수요에 따라가게 마련이므로 수많은 사진 입문서의 저자들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사진 또는 근현대 시각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기본적인 연습이 없이 대중매체의 키치적인 이미지를 압도적으로 많이 흡수한 사람들이 원하는 결과물이란 그저 눈이 즐거운 사진뿐이다. 이미 사진 이미지 소비의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는 인터넷 상에서 사진을 보는 방식을 생각해 보시라. 오 이거 멋진데, 하고 끝이다. 지속적인 정서를 보유하고 그 세계를 파내려가는 작업을 웹상에서 만나기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 카메라에 옷을 걸쳐놓았다. ⓒ아라키 노부요시
그러니 누가 누굴 탓해야 할지는 잠시 잊기로 하자. <천재 아라키의 애정 사진>을 펴들고 사진-삶이라는 체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누구 책임이냐며 투덜댈 시간도 아깝게 느껴질 것이다.

도입부가 작품 전체를 좌우한다는 이야기는 창작계의 오랜 불문율이다. 그런데 <천재 아라키의 애정 사진> 본문의 첫 사진은 심드렁한 모습이다. (다 읽고 나서야 첫 사진이 책 전체의 방향을 조망하는 머리말과도 같은 힘을 지녔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삼각대 위에 세워진 카메라에 옷을 걸쳐놓은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아라키에 따르면 이 사진은 바로 자기소개 사진이다. 이 심드렁한 사진보다 재미있는 건 본문 자체다.

사진을 설명하기란 참 어려워요. 누가 질문이라도 한다면 대답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물어보는 사람도 없는데 사진을 설명하라니,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예를 들어 '이 사진은 내 재킷이 삼각대에 걸려 있는 사진입니다' 하고 설명하는 건 좀 그렇잖아요. '삼각대 위의 저 카메라는 펜탁스 제품으로서…' 이것도 이상하고요. 사진이란 게 원래 애매해요. 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이니까요. 하지만 내 사진은 별로 애매하지 않아요. 오히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세히 설명하는 편이거든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 사진이 너무 애매해서 더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지요. (웃음)
-<천재 아라키의 애정 사진> 11쪽


뭐라는 거야. (웃음)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소설 발췌라고 해도 고개가 끄덕여질 만한 도입부다. 게다가 책 전체가 이런 식이다. 옆에서 이상한 아저씨가 되는대로 떠들고 있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아라키가 이 책에서 무슨 결론을 내려는 거였는지 간단히 설명할 수가 없다. 심지어 본문의 1/3 정도는 '나는 사진이고 나는 천재다'라는 선언 또는 PR의 반복이다. 이 총체적인 난국, 논리적인 완결성에 관심을 두지 않은 파편적인 고백들을 그러모은 <천재 아라키의 애정 사진>은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주목해야 한다. '논리적인 완결성에 관심을 두지 않은 파편적인 고백'과 그에 따른 사진 컬렉션이라는 측면에서 이 책은 대단히 모범적인 사진 아카이브와 그에 딸린 해설로 기능한다.

1장인 '내 사진에 대하여'는 이 책의 주제를 선보이고 책의 나머지 전체를 총괄하는 유일한 부분이다. 아라키는 존 사코우스키의 '사진은 사진작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을 빌려 사진을 유리창에 비유한다. 사진가는 유리창을 통해 두 개의 풍경을, 즉 바깥 풍경과 함께 유리창에 반투명하게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따라서 아라키가 '나는 사진이다'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사진을 찍을 때 자신의 시각적 포착 능력과 그에 대한 내면의 반응 능력을 함께 중요시한다고 보아도 좋다.

이를 조금만 바꿔 생각하면 '세계는 사진이다'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외부와 내부의 혼재랄까, 사진가(주체)가 사진(객체)에 대해 설명하는 게 아니라, 인생과 사진이 한 뭉텅이로 얽혀 굴러가는 모습이다. 그야말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인 셈이다.

그 점을 알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냥 내키는 대로인지 아니면 둘 다여서인지(아라키에 따르면 아라키는 천재니까)는 모르겠으나, <천재 아라키의 애정 사진>이 사진을 분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저런 사진이 있었는데 이걸 찍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다거나 이런 사진은 이런 느낌으로 찍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창작자 자신의 감상이 늘 우선한다. 묘하게 몽환적이면서도 지시 대상을 강렬하게 보여주는 아라키의 사진과 '쓸모-정보'라는 측면에서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아라키 본인의 소회의 조합은 앞서 말했던 사진의 수수께끼 같은 모호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1장을 제외한 나머지 전체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해설은 편집자의 각주로 종종 등장할 뿐이다.

게다가 책에 실린 사진의 장르가 무척 다채롭다. 아라키의 사진이 변태 에로 사진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분들은 놀랄 것이다. 여기에는 사랑했던 부인, 셀프 포트레이트, 평범한 동네 길에서 찍은 사진, 사랑했던 고양이 지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가 좋아하는 장소인 자택 옥상, 그냥 미녀, 결박시킨 미녀, 미녀가 될 소녀, 그냥 하늘, 그리고 이러한 여러 요소들이 함께 출연하는 사진들이 있다. 그 방식도 동네 마실 촬영부터 본디지 연출까지 다양하다.

여기에는 '결정적 순간'에 가까운 거리 스냅 사진이나 미국식 다큐멘터리 사진의 기조를 풍기는 사진이 있는가 하면 초점이 완전히 나간 아내의 사진(활짝 웃고 있다)처럼 완전히 그 순간의 포착 자체에 모든 것을 건 장면도 있다.

장례식에서 아버지의 주검을 찍은 사진 뒤에는 장례식장에서 어머니의 주검을 찍은 사진이 나오고, 그 뒤에는 역시 같은 방식으로 촬영한 아내의 주검 일부가 보인다. 그 뒤에는 키우던 고양이가 죽은 순간에 찍은 사진이 있고 그 뒤에는…꼴라쥬 작업이다. 그리고 번화가의 거리에서 찍은 기울어진 각도의 사진.

▲ 고양이 지로의 죽음. ⓒ아라키 노부요시

여기서 외적 일관성을 찾을 수는 없다. 각기 다른 종류의 사진 작업이 혼재된 이 책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사진들은 서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차분하고 쓸쓸해 보이는 그의 풍경사진들은 저 유명한 '소녀' 시리즈의 사진 배경과 겹쳐 보이면서 '소녀' 시리즈에 소멸의 기운을 전파한다. 미모사를 찍은 정물사진과 옥상에서 태풍에 넘어진 화분 사진과 아내의 어떤 포트레이트와 '1 2 3 死'라고 붓으로 덧쓴 하늘 사진은 '미모사를 좋아했던 아내와 아내가 죽고 난 뒤 방치된 옥상과 별 뜻은 없는 덧칠 작업'에 대한 아라키의 파편적인 서술들을 통해 헐겁게 엮여 서로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 조각난 사진들과 글들의 조합 가능성은 무척 다양하기 때문에 사람마다 느끼는 최종 감상은 다르겠으나, 책을 읽다보면 이거 하나는 다들 느껴질 것이다. 시종일관 자신의 사진에 대고 '역시 걸작이에요' '지금 봐도 대단한 사진이에요'라고 웃고 있는 이 사진가가 의외로 쓸쓸함과 너무 친밀하다고 말이다. 아라키의 조용한 사진들은 그의 누드 사진들을 물들이며(저 빛나는 육체 위에서 무표정한, 또는 가려진 얼굴들) 그렇게 물든 누드 사진들은 욕망 대신에 무언의 제스처를 품고 수수께끼화한다. 장르의 폭이 넓은 아카이브가 안겨주는 강렬한 소격 효과다.

서로 충돌하고 섞여들고 물들이는 <천재 아라키의 애정 사진>의 사진들은 그 혼란스러움을 통해 비로소 아라키 노부요시라는 사진가의 내면 풍경을 형성한다. 어디에다가 형성하는가. 독자의 내면에다가 만든다. 아라키는 책 속에서는 바로 찾을 수가 없다. 일관성을 배제한 <천재 아라키의 애정 사진>이라는 책 자체, 그 조각난 글들과 낱낱의 사진 속에서는 추적이 불가능하다. 이 조각들이 독자의 마음 속에서 화학반응을 일으킨 뒤에야 아라키는 '아라키-나(독자)'의 형태로 내부에서부터 출현할 것이다.

이 순간은, 경험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꽤 감동적이다. 언어만 흡수해서는 좀처럼 느껴보기 힘든 경험이다. 구체적 또는 논리적으로 형상화되기 이전의 심상이 자기 안에서 태어나는 순간이다. 이것이 사진'들'의 위력이다. 멋지게 찍힌 '결정적' 사진 한 장에 집착해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는 세계다.

있을 수 있는 질문 하나에 답하면서 마무리하겠다. 그럼 굳이 이 책이 아니라 다른 좋은 사진집들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역사적으로 검증받은 좋은 사진집들이 좋은 아카이브의 역할을 하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 모든 좋은 사진집들은 독자들의 마음 속에 2차 이미지를 형성한다.

그러나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천재 아라키의 애정 사진>은 한 가지 더 깨닫게 해줄 것이다. 자신이 애정하는 대상을 열성적으로 찍으라는 메시지다. 아라키가 '사랑하는 대상'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냐면, 사랑하는 사람이랑 여행 가서 그 풍경 찍느라 혼이 팔려 상대방을 섭섭하게 할 바에는 그냥 사진을 찍지 말아야 할 정도라고 한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못 믿겠지만 어쨌건 그가 강조하는 바는 알겠다. 헷갈리면 안 된다는 얘기다. 주 피사체는 곧 주체이며 그 주체는 또한 유리창에 비친 나 자신이라는 사실 말이다.

▲ <다카페 일기>(모리 유지 지음, 권남희 옮김, 북스코프 펴냄). ⓒ북스코프
사진가가 피사체를 객체의 위치로 밀어내고 이걸 어떻게 해야 멋지게 나올까 고민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좋은 사진의 경지에 다다를 수 없고, 반대로 <윤미네 집>처럼 사진가가 온전히 피사체를 사랑하는 것만으로 때로 그 위치에 올라서고는 한다. (<다카페 일기>의 아빠는 그럼 가족을 사랑하지 않았나? 아니 당연히 사랑하겠지. 그러나 그는 또한 자신의 사진 스킬을 사랑한다.)

사진 아카이브의 매력을 증거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것들을 성실하게 추적하는 사진-삶'을 주장하는 <천재 아라키의 애정 사진>은 아마추어 사진가가 가져야 할 두 개의 커다란 미덕을 동시에 보여주는 매우 드문 책이다. 다른 좋은 사진집들을 만나기 전에 이 수다쟁이 사진 영감과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면 보다 확장된 시야가 펼쳐질 거라 확신한다. 심지어 금방 읽을 수 있다는 장점까지 갖고 있다. 여러모로 신기한 책이다.

책을 읽을 때는 아라키의 자화자찬을 웃어 넘겼는데, 리뷰를 써 놓고 보니 아라키는 정말 천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책을 만들어 버렸어.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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