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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날풍경 마주한 작가, 그 피로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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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비극의 날풍경 마주한 작가, 그 피로한 침묵 [2013 올해의 책] 안톤 체호프의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
'프레시안 books'는 개편 작업을 준비하며 예년보다 1주 일찍 송년호를 꾸렸습니다. 이번 송년호(170호)에서는 '프레시안 books'의 기자, 기획위원, 연재 필자 열두 명이 각자가 꼽은 '올해의 책'을 이야기합니다. 판매 순위나 화제성보다는 책과의 만남의 밀도, 이 사회에 던지는 화두를 중심으로 꼽은 '올해의 책'과 함께 2013년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프레시안 books' 다음 호는 사이트의 전면적인 디자인 개편 작업이 끝난 뒤 2014년 1월 3일 금요일 저녁에 발행됩니다.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내가 총독에게 종이를 가지고 갔을 때, 그는 내게 사할린의 징역과 식민에 관해서 자신의 견해를 설명했고 자신이 말한 모든 것을 기록해 줄 것을 제안했다. 물론 기꺼이 수락했다. 이 기록된 것에 총독은 "불행한 자들의 삶의 기록"이라는 제목을 붙이자고 청했다.
(<안톤 체호프 사할린> 150쪽)


작가이자 의사,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의학을 부인 삼고 문학을 애인 삼은 안톤 체호프는 1890년에 사할린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가 작가로서의 삶에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왜 하필 유형지로나 유명한 조국의 변방으로 떠났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주어지지 않는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거친 자연 속에서 불행한 삶을 이어가는 동포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할린과 시베리아는 체호프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초라한 모습으로 그를 맞이했다. 사전에 해당 지역의 풍토와 문화, 역사를 꼼꼼히 공부한 그였지만, 그마저도 현실의 충격을 감소시켜주진 못했다. 체호프는 사할린으로 가는 여정 중 시베리아 인근에서 한 남자와 나눈 대화를 이례적으로 길게 기록해 두었는데, 이 대화는 마치 예언처럼 이후의 여정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사람은 말이 아니죠. 대체로 이곳 전 시베리아에는 정의란 게 없습니다. 그런 게 있었다고 해도 벌써 오래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인간이라면 바로 이런 정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나는 부유하고 권력도 있습니다. 배심원과도 잘 통하고 이 집 주인을 내일 당장이라도 욕보일 수 있을 정도죠. 그는 감옥에서 썩을 것이며 자식들은 세상을 떠돌게 되겠죠. 나를 막을 정의란 없으며 그에겐 보호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죠. 우리가 아무런 정의도 없이 살기 때문이죠. 말하자면 호적부에는 표트르나 안드레이나 다 인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늑대들이죠. 아니면 하느님 생각에만. 실제로 농담이 아니라 무시무시하죠. 이 집 주인은 누워서 세 번이나 십자가를 그었죠. 마치 그게 전부라는 듯이. 그는 돈을 벌고 그 돈을 숨깁니다. 보십시오. 벌써 800루블이나 모았죠. 그걸로 새로 말을 사 모으죠.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스스로 한번 생각이라도 하면 좋겠지만 사실은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 필요할까 생각해본다 해도 알 수가 없죠. 머리에 든 거라곤 없으니까.(83~84쪽)


▲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안톤 체호프 지음, 배대화 옮김, 동북아역사재단 펴냄). ⓒ동북아역사재단
시베리아와 사할린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불행한 인간들 중 하나인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이 대화에서 체호프에게 '무슨 이유로 사는지는 알아야 하잖아요. 러시아에서는 틀림없이 알고들 있겠죠?'라고 묻는다. 체호프는 '아뇨. 모릅니다'라고 대답할 뿐이다. 이 겸손한 관찰력은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이하 '사할린 섬'으로 통칭)>(안톤 체호프 지음, 배대화 옮김, 동북아역사재단 펴냄)의 가장 커다란 장점이다.

체호프는 일반적인 문인의 여행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여정을 기록한다. 브루스 채트윈이 쓴 <파타고니아>(김훈 옮김, 현암사 펴냄)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풍경을 문자화하는 과정에서 <파타고니아>와 <사할린 섬>은 차이를 보인다.

<파타고니아>는 자신이 열망하던 곳에 당도한 인간이 엄혹한 자연 속에서 자신의 꿈을 재발견해 나가는 일종의 명상록이다. 니컬러스 셰익스피어는 <파타고니아>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의 진정한 성취는 파타고니아를 있는 그대로 서술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파타고니아라는 풍경과 아울러 새로운 탐구 방식, 세상의 새로운 측면을 창조해냈다는 점에 있다."

즉, 풍경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브루스 채트윈에게 영감을 선사하는 기능적인 소재다. 이 책에서 작가의 모습은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채트윈이 파타고니아에서 마주하는 풍경과 사건들은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재해석되어 배열되고 각색된다. <파타고니아>에서는 파타고니아 자체가 채트윈이라는 개인의 풍경으로 전유되는 것이다. 이렇듯 세계를 자신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문학적 변형은 단순한 일지 형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문학적 수사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파타고니아>(브루스 채트윈 지음, 김훈 옮김, 현암사 펴냄). ⓒ현암사
따라서 <파타고니아>가 20세기의 '깊이 있는' 기행문들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실재하는 풍경과 역사와 사건들을 문자로 전유하기 위해 작가의 내면이라는 소화기관을 통과시키는 모더니즘적인 방법 이후의 미래를 아직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파타고니아>처럼 자족적인 글에서는 관계없으나, 세계를 사유하기를 원하는 글에서는 문제를 일으킨다.

그 예로 W. G.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이재영 옮김, 창비 펴냄)를 들 수 있다. 황폐한 유럽의 풍경과 함께 역사적 비극을 고찰하는 그의 1995년 작 <토성의 고리>에 대해 김사과는 '프레시안 books' 리뷰(☞기사 바로 보기 : "소설에서 '윤리'를 찾는 나르시스트에게 고함")에서 "윤리를 문학적 제스처로 환원시키는 일종의 문학 지상주의, 즉 '문학적인 것'의 과잉"의 징후를 읽었다고 말했다.

나는 김사과의 지적에 동의하며 그 과잉을 일종의 딜레마라고 생각한다. 실재가 문학적으로 전유되는 과정이 매끄럽게 이루어질수록 실재의 비극은 문학 작품이라는 시스템 안으로 더 깊이 편입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역사(로서의 세계)는 문학이라는 가상의 원리를 구축하기 위해 동원되는 과정에서 해당 문학 작품의 내적 원리를 주입당하고 '완성된 문학 작품'의 내러티브 속에서 질서 있게 역할을 부여받는다. 내러티브 속의 역할은 만들어진 것이며, 역사와 그 역사를 구성하는 각 객체들은 그 가짜 알리바이를 달고 움직여야 한다. 문학 속에서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역사와 세계는 자신을 현실의 연속체로, 철학과 종교를 탄생시킨 '기막히고 신비로운 인생의 조화'로 받아들이게끔 만드는 필수적 요소인 '이해할 수 없음의 신비'를 빼앗긴다.

문학 속의 역사는 더 효과적으로 사용될수록 더 많은 화해를 강요당할 것이다. 이는 어떤 문학 작품이 역사에 비판적인가 아닌가와는 별개의 문제이며, 악의적으로 역사를 오용하느냐 아니냐와도 관계없다. 이는 문학이 현실을 다루는 방식 자체에 기인한 일종의 숙명적인 먹이사슬이다. 어떤 문학 작품에게 윤리를 묻겠다면 그 소설이 무엇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말하느냐가 아니라 문학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의미의 착취 구조를 어떤 방식으로 극복하려고 시도했느냐를 우선 살펴야 할 것이다.

▲ <토성의 고리>(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창비 펴냄). ⓒ창비
제발트가 <토성의 고리> 이후 8년이 지나 발표한 2003년 작(실제로 그는 2001년에 사망했으므로 사후에 발간된) <공중전과 문학>(이경진 옮김, 문학동네 펴냄)은 그 성찰에 있어 한 발짝 더 나가 있다. 이 논픽션에서 제발트는 자신이 겪은 일 이외의 사건들을 평가하거나 '문학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모습을 잘 보이지 않는다. 제발트는 독일을 향해 이루어진 대폭격들과 그 폭격들에 대해 아직도 매듭지어지지 않은 논쟁들, 또는 그 폭격들을 강제로 잊어버리려 드는 현대 독일의 역사적 풍토에 대해 언급하면서 거기에 중요한 선을 하나 긋는다. 그가 개입하고 의견을 개진하고 비판하는 소재들과 그렇지 않은 소재들 사이에 그은 선이다.

전자는 역사론과 그 역사론을 둘러싼 현대 독일의 사회상이며, 후자는 역사와 그 역사를 구성하는 사건들 및 등장인물들이다. 제발트는 언어와 논리로 구성된 해석과 재해석의 세계로는 거리낌 없이 파고들지만, 사건들과 '죽은 사람들'을 언급하는 순간에는 기록들을 그대로 옮기거나 최대한 사건 자체를 간략히 묘사하는 데에 힘쓰고 있다. 나는 <공중전과 문학>을 읽으면서 제발트가 역사로 문학하기에 대해 좀 더 깊은 단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다. 문학하는 자로서 어떻게 문학에 전유되지 않은 역사 또는 역사적 현실을 기록할 것인가라는 딜레마와 마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발트가 <토성의 고리>에서 <공중전과 문학>을 향해 나아간 시절로부터 약 백 년 전에 안톤 체호프가 이미 그 길을 걷고 있었다. <사할린 섬>에서 비극적인 현실을 목격한 체호프는 무엇보다도 사할린 섬에 대한 각종 문서와 직접 발로 뛴 설문조사를 통해 얻은 '사실들'을 남기려 노력한다. 자료와 논리를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다다를 수밖에 없는 선명한 결론, 즉 사실의 총합을 통해 이루어내는 '실재'를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할린 섬>의 체호프는 작가 체호프가 아니라 마치 계몽주의의 일반의지처럼 보인다. <사할린 섬>의 체호프는 천재적인 묘사력과 스토리텔링의 감각을 통해 인상적으로 각색된 풍경을 보여주는 작가가 아니라 지식과 양식을 갖춘 '교양 시민' 중의 한 명이다. 체호프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 사할린이라는 성을 해체하고 다시 쌓는 영주가 아니라 압도적으로 불가해한 '현실'이라는 성 주위를 맴돌며 끝없이 분석하고 관찰하는 카프카의 'K'가 된다.

▲ <공중전과 문학>(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체호프가 직접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때는 유형수를 둘러싼 법적 체계와 러시아 외곽의 부실한 행정 체계를 비판하고 개선안을 제시할 때뿐이다. 시민은 특히 자신이 몸담은 사회의 체계를 둘러싼 엄연한 문제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발언할 권리가 있다. 대신에 그(시민이자 작가인 안톤 체호프)는 세계 안에 실재하는 각 객체에 대해서는 논평하지 않는다. 앞서의 제발트처럼 체호프도 '선을 긋'는다. 체호프는 그 어떤 악인도 비난하지 않으며 비참한 사건에 대해서도 장황한 비극적 색채를 덧칠하지 않는다. 체호프는 세계를 자신의 시선 속에서 재해석하거나 문학적으로 작동시키는 대신에 입증 가능한 자료와 분석을 바탕으로 사할린을 성실히 스케치해 나갈 뿐이다. 체호프는 관찰자, 그것도 가능한 가장 객관적인 관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체호프는 사할린 섬에 도착하자마자 설문지를 직접 제작한 뒤 주민들과 각 가구의 기원 및 현재 상황을 파악하는 통계 작업을 바탕으로 사할린을 그려가기 시작한다. 이때의 체호프는 미신이나 전설을 믿지 않으며 여하한 감상주의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사실 아닌 것들을 수집한 뒤에 모두 부수어 버린다. 예를 들어 사할린에서 유독 출산율이 높다는 점을 발견한 체호프는 사할린이 다산에 적합한 기운을 받은 땅이라는 미신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쌍둥이 출산이 잦다는 루머는 당시 러시아의 평균 쌍둥이 출산율을 들어 심리적인 오류(확증 편향)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하고, 불규칙한 노동으로 인한 잉여 시간의 잦은 발생과 함께 그 시간을 소모할 적절한 여가가 주어지지 않는 사할린의 척박한 문화 때문에 출산율이 높아졌으리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아무것도 할 게 없는 부부가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섹스뿐이고 피임은 거의 개념조차 잡히지 않았으므로 출산율 증가는 자명하다는 결론이다.

물론 <사할린 섬>은 보고서처럼 완전히 딱딱한 모습만 보여주지는 않는다. 체호프는 종종 조심스럽게 인간에 대한 애정을 표시한다. 또는 고백한다. 출산을 다룬 부분을 예로 들면 그의 객관적인 추론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사실들'도 만날 수 있다. 작가 안톤 체호프는 이런 순간에만 잠시 스쳐 지나간다.

(사할린의) 가족은 새로운 인간의 출생을 반가워하지는 않는다. 아이의 요람 위에서 아무도 노래를 불러주지 않으며 들리는 것은 오로지 슬픈 푸념 소리뿐이다. 아이에게 먹일 것도 없고 사할린에서 아이들이 배울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가장 좋은 일은, 자비로운 주님이 아이를 가능한 빨리 데리고 가버리는 일"이라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한다. (…) 그러나 뭐라고 말하고 슬프게 푸념을 늘어놓든지 간에 사할린에서 가장 유익하고 가장 필요하며 가장 기분 좋은 인간이 바로 아이들이며 유형수들도 스스로 이것을 잘 알고 아이들을 소중히 여긴다. (…) 순진무구한 그들은 결함 있는 어머니와 강도인 아버지를 세상의 무엇보다도 사랑한다.(396~397쪽)

이토록 조심스러운 여행기를 쓰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사할린 섬>이 본래는 신문 연재 형식으로 이루어진 글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때까지 신비로운 변경이었던 사할린 지역에 대한 그의 리포트는 신문 독자들을 위한 텍스트 버전 내셔널 지오그래픽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기록과 보고 형식을 취해야 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체호프가 <사할린 섬>의 양식을 자발적으로 선택했는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사할린 여행과 그 이후 <사할린 섬>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현실 및 역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에 대해 자기 식의 방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실제로 체호프의 작품들은 사할린 여행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여행 이후 체호프는 소설 대신에 희곡 창작에 열을 올린다. 희곡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공연을 통해서만이 완성되는 장르다. 따라서 사할린을 다녀온 뒤의 체호프는 자신의 글-픽션만으로 한 작품의 세계를 완성하기를 사실상 거부한 셈이다.

희곡 작가는 언어를 통해 주제와 각종 발화들의 뼈대를 구축하지만, 연출부터 몸짓 하나 목소리 하나에 이르기까지의 디테일한 측면들은 작가의 몫이 아니다. 즉, 희곡을 집필하는 작가에게 극의 육체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다. 미지의 영역을 보유한 세계는 정복당하지 않으므로 전유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체호프는 희곡을 통해 <사할린 섬>에서 보여준 '선 긋기'를 보다 마음 편히 재현할 수 있었다.

희곡에서 작가는 말에 대해 말하고 인생이라는 주제에 대해 자기 나름의 의견을 개진할 수는 있으나, 개개의 인간(이라는 배우)와 그 배경인 시공간(이라는 연출)과 그 결합으로써의 사건(공연)에 대해서는 무지하며 개입 역시 거부당한다. 이런 제한조건이야말로 사할린 이후의 체호프가 원하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세계에 대해 글을 쓴 뒤에 다시 세계가 그의 글을 집어먹고 자기 각자의 방식대로 꽃피도록 던져주었다.

또한 그는 기존에 자신이 가졌던 최고의 장기, 즉 사건과 인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아이러니라는 소설적 장치로 이용하는 방식 역시 수정한다. 그는 인물들 사이의 긴장을 그대로 펼쳐놓은 채 극을 이끌어나가거나 또는 (인생 속 수많은 사건들이 그러하듯이) 수수께끼 속으로 파묻어 버린다.

▲ <갈매기>(안톤 체호프 지음, 홍기순 옮김, 종합출판범우 펴냄). ⓒ종합출판범우
체호프가 사할린 여행 이후 처음으로 발표한 희곡 <갈매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갈매기>에서 서로 다른 두 작가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딜레마는 전개를 위한 소재가 아니라 주제 그 자체다. 작품 내에서 상징적인 요소로 등장하는 갈매기 역시 하나의 의미를 담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여러 해석을 낳는 다면적인 '캐릭터'로 승화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뜨리고린과 뜨레쁠례프 두 작가의 서로 상반된 세계관을 한몸에 담고 출현하는 갈매기는 딜레마의 문학적 해결이라기보다는 이해 불가능한 세계의 총화다. 체호프가 <갈매기>를 희극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진짜로 웃긴 작품이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갈매기>는 발자크 유의 야망을 품은 체호프의 '인간 희극'이다.

사할린 이후의 체호프는 삶의 신비에 접근하기를 망설이거나 거절한다. 너무 다가갔다가는 문학이 신비를 집어삼켜버릴 것이다. 한때의 체호프는 마치 생수에 탄산을 삽입하듯 아이러니를 소설 속에 집어넣어 맛깔나게 터뜨리는 이야기꾼이었지만, 사할린에 다녀온 뒤의 그는 작가가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듯 <사할린 섬>은 체호프의 남은 인생을 부여잡을 고통스러운 사색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작가는 세계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라는 고뇌, 이것이 <사할린 섬>을 올해의 책으로 꼽은 가장 큰 이유다. 물론 이 책에는 다른 장점들도 많다. 굳이 체호프의 인생에 관심을 두지 않더라도 이 기행문 속에는 인상적인 에피소드들과 멋진 표현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어떤 작가가 자신의 작가됨에 대해 치열하게 사색했으며, 그 사색이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운데 눈앞에 펼쳐진 처연한 삶들을 그저 '기록'하려고 애썼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앞 문장에서 작가됨이라는 단어를 인간됨으로 바꾸면 어떨까. 또는 '나-됨'이라고 바꾸어보면 어떨까. 요는 애정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상대를, 세계를 내 안에서 전유하지 않고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또는 그러려고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은 존재론이나 문학론의 여부를 떠나서 삶의 양식에 대한 질문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문학이 저 질문에 답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체호프는 답하기를 원했고, 답을 찾기를 원했으며, 그렇게 했다. <사할린 섬>은 그 위대한 발견의 기록이다.

여행을 통해 자신을 재발견하고 재확인하는 수많은 기행문들의 틈바구니에서 <사할린 섬>은 다른 방식으로 빛난다. 이 책은 자신이 그때껏 쌓아왔던 것들을 부정당한 피로한 정신이 눈앞에 직면한 참혹한 세계를 '이용하는 대신에 받아들일'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는 지난한 여정이다. 실제로 <사할린 섬>을 읽는 과정 역시 정서적인 체력과 일정한 휴식을 요구한다. "나는 사할린 섬에서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났고, 늦게 잠들 수밖에 없었다. 생각에 사로잡혀 모든 나날이 극도의 긴장이었다"라고 짧게나마 토로하고팠던 체호프의 고충이 책 전체에 무언의 형태로 덕지덕지 묻어있음을 도처에서 감지할 수 있다.

…동거인으로 가정부 울랴나라는 노파가 유형수 출신의 늙은 농민 집에 살고 있다. 언젠가 아주 오래전에 울랴나는 자기 아이를 죽여 땅에 묻었고 재판에서는 자신이 아이를 죽이지 않고 산 채로 묻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자신의 범죄를 더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법정은 20년을 선고했다. 이 이야기를 내게 하면서 울랴나는 슬프게 울었고 이윽고 눈을 닦고선 "절인 양배추를 사주시지 않을래요?" 라고 물었다.(316쪽)

체호프는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나는 이 피로한 침묵이 좋다. 겸손하고 신중하며 사려 깊은 동시에 비판적인 인간이 이 세계의 날풍경을 목격했을 때, 그때 부서진 자기 삶(으로서의 문학)의 조각들을 쥐고 한숨을 쉬며 다시 시작하는 순간들이다. 그러니까 부서진 조각들을 가지고 쓸데없는 점치기에 돌입하지 않고 그 박살난 상황을 청명하게 주시하는 인간, 문학을 사랑하기에 문학으로 장난치지 않겠다고 말없이 다짐하는 인간을 발견하는 순간들이다. 이 순간들이 올해 내가 책을 통해 얻은 가장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정말로, 나는 올해의 책을 꼽는 데 단 1초도 주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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