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의 황당 어록에 “연대론은 스스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나 의지가 없는 패배주의적 시각”이라는 소리가 첨가되었다. 김성식은 “내가 공동위원장으로 있는 한 야권연대는 안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안철수와 그 주변의 인물들이 선거 연대나 후보 단일화를 혐오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들이 누구와 연대를 하든 말든 내게는 특별한 관심사가 아니다. 단, 연대에 관한 그들의 관점은 엄청난 착각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이 착각의 배후에는 애처로울 정도로 미숙한 정치관이 있다. 이 두 가지 점을 밝히고자 이 글을 쓴다. 첫째, 안철수는 연대는 거부하되 양보는 미덕이라고 보는 모양이다. 박원순에게 서울 시장 후보 자리를 양보한 것도 연대가 아니었고, 문재인에게 대통령 후보 자리를 양보한 것도 연대는 아니었다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박원순의 당선은 자기가 양보해 준 덕분이고, 문재인의 낙선은 문재인 또는 민주당이 못 났기 때문이라는 태도를 보인다. 박원순의 당선이 성공한 연대 덕분이고, 문재인의 낙선은 연대에서 실패한 탓이라는 생각이 그의 심성에는 스며들 여지가 없다. 연대는 나쁘고 양보는 좋다는 구분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구분이다. 이런 식의 구분은 유체이탈 화법일 뿐, 일관적으로 지켜질 수가 없다. 노원병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의 이동섭이 출마를 포기하자 그는 “안타깝고 죄송스럽다”고 말했다. 이를 보면 안철수는 이동섭과 연대한 적이 없다고, 대신 이동섭이 양보했을 뿐이라고 잡아 뗄 것 같다. 이동섭이 연대를 위해 출마를 포기했다면, 연대를 혐오하는 안철수가 “안타깝고 죄송스럽다”고 말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철수의 내심에는, 이동섭이 “스스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나 의지가 없”어서 양보했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스스로 이길 수 있었다면 출마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았겠는가? 그러니까 안철수 식 화법에 따르면, 이동섭의 경우는 양보도 패배주의의 귀결이라는 말이 된다. 물론 자기가 양보한 일은 패배주의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박원순과 문재인에게 자기가 “양보”한 일은 “스스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나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양보”가 곧 연대를 위해서였다고는 생각할 능력이 없는 모양이다. 문재인과 연대를 할 생각이었다면, 당연히 공정한 경선의 규칙을 어떻게든 찾아내서 후보를 단일화하고, 이후의 선거에서도 적극적인 공조를 과시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이나 그 당시나 “양보”는 좋고 “연대”는 더럽다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이런 어법은 전형적인 유체이탈에 해당한다. 자기가 하는 말이 자신의 행태에 대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도무지 깨달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유체이탈의 화법을 구사한다. 말로는 “연대”를 폄하하고 “양보”를 찬양하지만, 실제로는 연대든 양보든 자기가 하는 것은 깨끗하고 정당한 반면에 남이 하는 것은 연대든 양보든 더럽고 부당하다는 전횡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동섭이 출마를 포기한 것은 스스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의지가 없기 때문이고, 자기가 양보한 것은 자신감과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고 우겨댈 수 있는 뻔뻔함이 가능한 것이다. 둘째, 연대론을 “스스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의지가 없는 패배주의”로 매도하는 것을 보면, 안철수는 “용 꼬리가 되기보다 뱀 머리가 되라”는 속담을 아마도 좌우명으로 삼고서 살아가는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과 협동하고, 이웃들과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대단히 수치스러운 모양이다. 하지만 협동 또는 연대는 내가 약해서 필요할 때도 있지만 내가 강하더라도 공동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집에 강도가 들었을 때, “스스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의지가 없”을 때에만 이웃의 도움을 청하는가? 강도를 만났을 때, 안철수는 도움을 청하면 수치스럽고 자기 손으로 강도를 처치하면 폼이 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춘기 시절에 학급 동료로부터 협박을 당하면서도 쪽팔릴까봐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못했던 한이 응어리로 맺히기라도 해서, 지금 이런 식으로 터져 나오는 것일까? 부당한 일을 목격했을 때, 또는 자기가 추구하는 어떤 숭고한 목표가 있을 때, 다른 사람들과 정보와 가치를 공유하고 연대하는 것은 사춘기적 자기 현시를 위해서가 아니다. 공동체의 질서를 평화롭게 유지하고 공동체를 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협동과 연대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연대와 패배주의를 혼동한다는 것은 안철수의 이해력 안에는 공동체의 평화적 질서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다는 뜻일 뿐이다.
안철수가 생각하는 새정치는 초인적 엘리트에 의한 전제정치에 불과하다는 점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자기 말고 나머지는 더럽고 타락한 중생일 뿐이고, 자기는 이들을 구제할 구세주의 임무를 타고 났다는 발상이 아닌가! 실제로 내가 작년에 겪었던 작은 일을 되새겨 보면, 이 점이 확인된다. 안철수는 작년 여름에 (지금 기사를 확인해보니 7월 18일이다) 전주에서 정책토론회라는 것을 열었다. 두어 명의 지인이 나더러 발제를 해달라고 해서, 마지못해 “한국 민주주의의 강화와 호남 정치”라는 주제로 원고를 써서 보냈다. 행사 며칠 전에 그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내가 쓴 원고 중에 두 군데를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평시강제징집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문구에서 “평시강제징집제”를 “의무복무제”로 바꾸고, “히틀러, 김일성, 박정희 등을 비롯한 독재자들”이라는 문구에서 박정희를 빼달라는 요구였다. 나는 앞의 것은 고칠 수 없고, 뒤의 것은 기어이 고쳐야 한다면 “히틀러, 김일성, 박정희, 세종, 링컨 등의 독재자”로 바꾸겠다고 답했다. 다음날 장하성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다짜고짜 “미안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 정도 표현을 문제 삼는다는 게 이해가 안 되며, 내가 어차피 안철수 진영에 속한 사람도 아닌데 무슨 그런 요구를 하느냐고 말했더니, 장하성 역시 내 생각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 쪽의 수정 요구가 철회된 것으로 알았고, 내게 검열을 강요한 데 대해 장하성이 사과한 것으로 들었다. 하지만 장하성이 왜 내게 “미안하다”고 했는지는 이튿날 드러났다. 내 발제를 빼고, 정책토론회에서는 안철수가 처음부터 무대에 오른다는 것이었다. 이미 내가 거기서 발제하는 것으로 광고가 나간 다음이라서 거기 참석했던 사람들 중에는 내가 왜 발제를 안 했는지 궁금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구차스럽기도 하고, 나름대로 “새정치”를 해보겠다는 사람들에게 고추가루 뿌릴 일도 없어서, 그동안 이 사연을 공개하지는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 자리에서 나를 뺀 것 자체는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나는 (안철수에게 비판적인) 내가 거기 나가봤자 그들에게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사양을 했었고, 내가 안철수라면 괜히 교수 하나 불러다 들러리 세우지 말고 주인공을 중심으로 행사를 진행하는 편이 효과적일 거라고 권하기도 했었다. 결국 내 생각대로 된 것이니, 나로서는 이 일 자체를 문제 삼을 까닭이 별로 없다. 지금 이 얘기를 새삼 꺼낸 이유는 독재에 관해 안철수가 커다란 혼동에 빠져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히틀러, 김일성, 박정희뿐만 아니라, 한글창제 때 보인 세종의 행태나 노예해방 때 보인 링컨의 행태도 독재라고 보며, 이것이 민주주의의 원리에 위배된다고 생각한다. 반대자를 탄압한 세종과 남북전쟁을 불사한 링컨의 행보를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라는 이유에서 정당화하기로 들면, “역사의 평가를 받겠다”는 자세만 취하면 권력자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려버리기 때문이다. 안철수가 내 원고를 보고 박정희를 독재자로 부르지 말라고 했는지, 아니면 중간에서 누군가 안철수의 의중을 대신해서 검열을 행했는지 나는 모른다. 직접 했든 대리인이 했든, 안철수는 똑똑한 지도자가 몽매한 인민을 다스리는 데 절차를 마냥 지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즉, “계몽 전제” 또는 “선의의 독재”가 민주주의의 원리보다 수시로 우선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발상은 연대를 “패배주의”로 오해하는 착각에서도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정치를 근본적으로 권력 투쟁으로 이해하고, 권력 투쟁은 두목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의지의 충돌이지 연대와 동맹과 협동의 외연을 넓히는 과정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안철수더러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다. 나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지면 지는 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설사 압승을 하더라도 또한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나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부터 2012년 두 차례의 선거에 이르기까지 (“야권”이 아니라 “민주/진보/개혁 세력”이) 연대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해왔고, 지금도 연대의 필요성이 대단히 절박하다고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번 지방선거만을 겨냥한다면, 이미 연대를 통해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거의 없다. 안철수가 연대 자체를 저렇게 더러운 일로 치부하는 자세를 끝내 견지한다면, 지방선거에서 연대는 없다. 만약에 결국에 가서 안철수가 적어도 수도권에서 연대에 동참할 것이라면, 지금 연대를 거부하는 모든 언사들은 결국 나중의 연대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몸값을 올리려는 샅바싸움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미 재작년에도 확인되었듯이, 샅바싸움으로 일관하는 방식의 연대는 유권자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보다는 정치혐오증만을 조장할 뿐이다. 연대는 부동층에게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형태여야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정치판에서 활동하는 당사자들이 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지도 못하고, 연대의 목적과 방식을 구체화할 능력도 없는 판에야, 억지로 연대를 해봤자 별 성과가 나오기 어렵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번에 연대를 하지 않고 각개 약진으로 나갔다가 참패를 다시 한 번 맛보는 것이 오히려 2016년이나 2017년 또는 보다 장기적인 연대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하는 말은 따라서 지방선거를 위해 안철수더러 연대하라는 말도 아니고, 민주당더러 연대를 위해 노력하라는 말도 아니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주된 독자는 일반적 시민들, 그 중에서도 민주주의의 발전을 염원하는 유권자들이다. 보수 언론과 새누리당은 줄기차게 선거연대에 “더러운 거래”라는 낙인을 찍고자 한다. 그만큼 그들이 민주/진보/개혁 세력의 연대를 두려워한다는 증거이자, 민주/진보/세력에게는 그만큼 전략적 연대가 필수적이라는 증거다. 그럼에도 김한길은 자기가 당대표가 되기 위해서라면 당내의 경쟁세력에게 “담합”이라는 누명을 서슴지 않고 씌우는 수준이다. 안철수 역시 “스스로 이길 수 있는 자신감”을 과시하려는 사춘기 정서에 빠져서 연대 자체를 쪽팔리는 “패배주의”로 규정한다. 깨어 있는 민주 시민들에게는 실망스럽겠지만, 이것이 현재 한국의 실상임을 어쩌겠는가? 선거에 의해 공직을 차지하겠다고 나서는 자들, 공직을 차지해서 공동체를 조금이라도 개선해보겠다고 선전하는 자들의 의식 수준이 이 정도인 것을 당장 어떻게 고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에게 지나친 기대를 걸었다가는 낭패를 보리라는 점만은 누구나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현역 정치인들을 지도자로 생각하면 실망할 일밖에 없다는 점을 시민들이 분명하게 깨닫는 데에만 희망의 싹이 움틀 수 있다. “계몽 전제”나 “선의의 독재”를 그리워하지 말고, 시민들이 스스로 주권자로 나서서 권력을 감시하고 통제하려는 자세를 취하는 곳에서만 민주정치를 향한 희망이 생동하게 된다. 연대는 민주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동력이다. 민주정치를 주도할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현역 정치인들이 연대를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민주 시민들은 연대에 대한 신념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정치인들에 의한 연대보다 시민 사회에서 연대를 주도할 자세를 갖춰야 한다. 시민들이 다양한 차이들을 관통하는 연대의 가능성을 믿고, 나아가 다양한 차이를 관통하여 연대를 이룩할 수 있는 지혜를 실천하게 된다면, 정치인들도 연대의 문법에 적응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되어야,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는 권력자들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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