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8.15처럼 한국인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들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는 기획이다. 필자는 <한국생활사박물관>,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라인 한국사>, <민음 한국사> 등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역사 오디세이러일전쟁은 1904년 2월 8일 일본이 러시아의 조차지였던 랴오둥 반도의 뤼순을 공격하면서 일어났다. 양국의 젊은이 수십만 명을 희생시켜 가며 이듬해 9월 5일까지 계속된 전쟁을 통해 일본은 욱일기를 휘날리며 아시아 최초이자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로 국제무대에 등장했다. 제국주의 시대의 후발 주자 러시아는 청과 대한제국에서 지분을 확보해 선발 주자인 영국과 프랑스를 따라잡으려 했다. 그러나 이를 용인할 수 없었던 영국은 이 지역에서 신흥국으로 떠오르던 일본과 동맹을 맺고 러시아 견제의 임무를 맡겼다. 미국도 일본을 후원했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 러일전쟁이다. 전쟁의 결과 일본은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인정받고 만주에도 본격적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밀려나 발칸 반도 쪽으로 눈을 돌렸으나 그곳에서도 또 다른 후발 주자 독일의 서슬에 눌려 독일의 적인 영국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독일이 영국에 도전해 일으킨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함께 영국 쪽에 줄을 섰다.
<1> 분단에 대한 배상…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
<2> 8.29는 국치일일 뿐이다? "신한국 최초의 날"
<3> 서태지는 왜 노동당사 앞에서 발해를 꿈꿨나
<4> 김구도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 당찮은 소리
<5> 해방 공간의 '전태일'들, 망각의 늪에서 구하라
<6> '단군이 오래전 건국', 그것만 자랑할 건가
<7> 세종은 오로지 존경 대상? 세종을 질투하라
<8> 10월유신 41년…더 무서운 괴물이 솟아나고 있다
<9> 하얼빈역·궁정동…한국 근현대사 관통한 두 번의 10.26
<10> 러시아혁명의 교훈, 대중을 외면하면 진보도 없다
<11> 전태일과 박정희의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
<12> 미국이 한국 독립 낙점? 유영익의 기묘한 이승만 띄우기
<13> 개화파의 역사적 과오, 안중근이 씻어 내다
<14> 망령 되살린 수구의 '종북' 칼춤…6.29의 저주 풀어야
<15> 억압과 저항의 '선사 시대' 넘어 '민중기원'은 온다
러일전쟁이 몰고 온 역풍
러일전쟁은 이처럼 일본과 러시아의 대외적 위상에도 커다란 변화를 몰고 왔지만 두 나라의 국내 정세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 왔다. 러일전쟁이 패배로 기울자 러시아 노동자와 입헌주의자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1905년 1월 9일(러시아 율리우스력 기준)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노동자들을 향해 군인들이 발포해 수백 명이 죽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이로 인해 전국적인 총파업과 포톰킨 호 반란을 수반하는 제1차 러시아혁명이 일어났고, 니콜라이 2세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선거에 의한 제헌의회를 창설하는 양보를 해 가까스로 혁명의 불길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승전국인 일본에서도 러일전쟁은 커다란 역풍을 몰고 왔다.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의 시민과 노동자들은 불평등과 중세(重稅)에 시달렸지만, 대외적으로 승승장구하던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유신 정부를 지지해 왔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도 배상금을 받지 못하는 등 실질적인 혜택이 턱없이 부족하자 마침내 이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그때부터 메이지 천황의 뒤를 이은 다이쇼 천황 재위 시기(1912~1926)까지 이어진 민주주의 운동을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한다. 수많은 젊은이를 전장에서 희생시키고 국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감내케 하고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자 도시 중간 계층을 중심으로 한 시민 세력은 러시아와 강화하는 것을 반대하는 운동으로 시작해 군비 확장을 통한 제국주의 정책의 수정, 각종 악세(惡稅)의 폐지 등을 요구해 나갔다. 식민지를 획득하고 강대국의 위상을 뽐내 봤자 그 이익은 특권층에게만 돌아갈 뿐이라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 운동은 보통선거와 의회정치를 실현시키고 노동운동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면서 1930년대 군국주의가 도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피의 일요일을 딛고 성장한 러시아의 노동자·농민 운동이 성공시킨 1917년의 사회주의 혁명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을 감화시키고 3.1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자국 정부의 팽창 정책을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외친 다이쇼 데모크라시 역시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는 3.1운동과 궤를 같이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동아시아 평화의 열쇠, 건강한 일본인들의 손에 있다
요즘 들어 동아시아에 형성된 정세를 보면 역사는 한 번 제기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으면 그것을 묻어 둔 채 넘어가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일본은 무력을 동원한 팽창 정책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깨고 힘에 입각한 새로운 질서를 도입했다. 그 후 일본은 한국 지배,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의 범죄 행위를 잇달아 벌이며 이웃 나라 국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원한과 분노를 심어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는 세계적인 냉전 체제의 틀 안에서 재편되었다. 한편에 한국, 미국, 일본의 자본주의 체제가 있고 반대편에 북한, 소련,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가 있었다. 이 대립 구도는 20여 년 전 소련과 동구권이 돌연 붕괴하면서 잠복기에 들어갔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 구도는 현대사에서 매우 근본적인 구도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일시 잠복할 뿐 언젠가는 반드시 전면에 나타나 끝장을 보려 할 것이다. 그 전에 지금 당장은 냉전 중 잠복해 있던 전전(戰前)의 문제가 다시 대두되어 해결을 요구하는 국면이 펼쳐지고 있다. 이 국면에서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획득했던 영광스러운 시기를 되찾겠다는 듯 한국과 중국을 향해 무리한 도발을 서슴없이 강행하고 있다. 그에 맞서는 14억의 한국인과 중국인은 일본이 자기들의 땅에서 저지른 침략과 학살 행위를 낱낱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만약 지금의 추세가 무력 대결로 이어진다면 두 나라 국민은 아마도 20세기에 당했던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돌려주기 전에는 복수의 총칼을 거두어들이지 않을 것이다. 무서운 것은 한국과 중국이 이미 그런 복수를 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해져 있다는 점이다. 역사는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지나치지 않는다고 했을 때, 동아시아의 과거사 문제를 과연 이 같은 민족주의적 '피의 복수'로 해결하는 게 정답일까? 지금 일본의 우익 정치인들은 마치 그 방법밖에 없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다. 정녕 옥쇄라도 결행하겠다는 건가? 나는 그것이 해결책이 아닐 뿐 아니라 동아시아가 그런 오도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을 건전한 세력이 있다고 믿는다. 앞서 밝혔듯이 대한민국에는 1894년의 동학농민군을 계승한 국민이 있고 중국에도 지난한 혁명의 길을 걸어 온 수억 민중이 있다. 그들과 함께 현재의 왜곡된 국면을 돌려놓을 사람들은 바로 일본 국민이다. 일본 국민은 러일전쟁을 통해 대외 침략으로 얻는 국가의 위신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민주주의에 위험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또한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통해, 그리고 그 정신을 계승한 전후 민주주의와 평화 운동을 통해 국가의 위험 분자들을 견제할 방법과 힘을 터득하기도 했다. 그 방법과 힘을 바로 지금 발휘해야 한다. 역사의 교훈을 거꾸로 읽고 분별없이 행동하는 우익 정치인들을 당신들의 손으로 주저앉혀야 한다. 만약 그 위험한 불나방들을 내버려두면 정작 화염 속으로 내던져질 사람들은 당신들이다. 동아시아의 과거사를 온전한 과거의 일로 영면시키고 평화를 가져올 열쇠는 지금 이 시간 일본의 건강한 국민의 손에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