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나의 경우, 당시 만화는 가장 보고 싶고 가지고 싶은 책이었다. 엄마는 엄격하게 만화책을 금지하셨는데, 그 이유는 이러했다. 만화책은 '망가책' 인데, 그것은 사람이 망가지는 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금 더 자라서, 만화책을 일본 말로 실제로 '망가'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엄마의 언어 응용 능력에 조금 감탄하였다) 학습 만화라고 해서 딱히 비난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고, 학습 만화는 책을 읽을 줄 모르는 아이들을 위한 편법이라는 것이 당시 엄마의 논리였다.
생각해 보면 엄마의 의견이 당시의 다른 학부모들의 의견과 크게 달랐던 것 같지는 않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아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공부의 절차이자 내용이었다. 무엇보다, 저급 대중문화로서의 만화에 대한 당시의 일반적 인식이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금지된 것들이 그러하듯, 엄마가 미처 통제하지 못한 곳에 만화들, 그리고 학습만화들이 있었다. 가령 교회에서 발행하는 잡지에는 구약 성서의 에피소드들이 만화로 구성되어 실리고 있었다. 특유의 고풍스러운 문체 때문에 해독 자체가 어려웠던 창세기의 일화들이 생생한 이야기로 살아났다. 이집트 군관인 보디바르의 아내가 청소를 하고 있는 요셉에게 은근히 권유한다. "요셉, 좀 쉬었다가 일하지 그래?" "아닙니다. 저는 제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런 연유로, 아내를 '무시했다고' 화가 난 군관 보디바르에 의해 요셉은 옥에 갇힌다. 요셉이 왜 쉬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잘 풀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는 성경 이야기였다. 이로써 나는 어느 정도 구약성서에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또 비교적 자유로운 사촌의 집에서 과학 학습만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매 학기 방학 때마다 읽고 또 읽었다. 아마 그 학습만화 전집이 낡아서 표지가 다 떨어진 것은 자신의 과학학습만화를 가지지 못한 아이의 집착에 가까운 읽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다양한 과학의 기초 상식과 무엇보다도 공룡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안경 쓴 박사님과 두 남녀 어린이가 나오는 그 과학 학습만화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이미지로부터 정보를 얻는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그 만화들은 나의 유년기에서 아동문학전집이나 교과서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정보와 지식의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 한 단계 높은 지식의 세계에서 친절하게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은 언제나 그림이었다.
물론 이것은 조금 오래된 이야기이고, 극도로 엄격한 교육방침을 가진 부모를 지닌 이의 개인적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 교육이 좀 더 아동 친화적으로 변하면서 학습만화 붐이 곧 일었으니까 말이다. <먼나라 이웃나라>(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펴냄)와 <만화 그리스 로마 신화>(손영운·박희진·김장석 그림, 김영훈·김성대 스토리, 학산문화사 펴냄)는 아마 대표적인 '필독도서' 붐을 주도한 학습만화였을 것이다. 아이들이 세계와 서양 고전에 대한 교양을 가지기를 원하는 부모들 덕분에 각 가정의 책꽂이마다, 학교 도서관마다 위의 책들이 빼곡히 꽂혔다. (물론 지금도 꽂혀 있다)
현재 20~30대 중 많은 이들의 세계 각국에 대한 지식, 그리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지식들 중 많은 부분들이 저 만화책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나는 어느 정도는 확신한다. 나의 공룡에 대한 지식들이 과학 학습만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듯 말이다. 그리고 <바람의 나라>(김진 글·그림, 이코믹스미디어)나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은 아이들은 좀 더 손쉽게 역사책이나 신화와 관련된 독서의 세계로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습만화가 '책을 못 읽는 아이들이 지식을 얻는 편법'이라는 엄마의 편견은, 사실은 상당히 역사가 오랜 것이다. 만화의 교육적 기능에 대한 관심과 읽기 능력을 저해하는 저급한 매체라는 편견의 대립이 지식 전달 미디어로서의 만화의 역사와 함께 늘 존재해 왔다. 만화, 즉 (스콧 맥클루드의 정의를 따르면) "의도된 순서로 병렬된 그림 및 기타 형상들"은 오락적 혹은 미학적 반응보다는 대중을 위한 정보 전달 미디어로서 오랫동안 기능해 왔다. 고대의 건축물들에 새겨진 부조와 벽화, 모자이크들은 지배자의 위엄 있는 일대기, 혹은 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이미지를 통한 정보 전달이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은 문자문화의 확산과 관계를 맺는다. 문자 텍스트가 보편화될수록, 이미지를 통한 정보의 습득은 그 정보의 수요자가 낮은 계급임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가령 중세의 종교적 건축물을 구성한 다양한 이미지들, 스테인드글라스, 조각, 제단화, 모자이크 등등은 '가난한 이들의 성경'(poor man's bible)이라는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말해주듯 글자를 알지 못하는 대중들에게 성서 속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졌다. 목판 인쇄물들 또한 그러했다.
'Biblia pauperum(빈자의 성경)'은 뜻은 같지만 대중을 위한 성경을 지칭하는 또 다른 용어이다. 보통의 성경들이 텍스트 중심으로 구성되고 그림이 곁들여지는 데에 반해, 이들 성경들은 몇 컷의 그림으로 구성되었고, 텍스트는 말풍선의 역할을 하는 스크롤 등에 간단히 담겼다. 조선 시대의 <삼강행실도> 역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목판화가 곁들여져 있었다. 한글로 쓰인 이야기들이 목판화 한두 장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었는데, 이들 그림 안에서 등장인물들은 몇 번이고 다시 등장하여 이야기를 전개한다. 대중에게 유교의 이념이나 성경 속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목판화나 스테인드글라스 등의 다양한 이미지들은 확실히 학습만화의 먼 조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인쇄물을 생산하는 주체가 지배 계급에서 시민계급, 그리고 노동자 계급으로 이동하면서, 만화를 둘러싼 '저급함의 논쟁'도 거세졌다는 것이다. 중산층을 중심으로 만화는 노동계급의 읽고 쓰는 능력에 위협이 되며, 이미지에 기초한 정보는 텍스트 자료에 비해 열등하고 시력 또한 저하시킨다는 비판이 가해졌다. 빅토리아 시대의 만화에 대한 낮은 평판은 미국으로 옮겨 가면서 기존의 계급적 함의에 인종적 편견까지 덧붙여졌다. 물론 이는 상대적으로 문맹률이 높은 이민자 가정에 대한 편견과 관계된 것이었다. 이러한 논쟁들은 만화가 본격적으로 노동계급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 시작되어 1900년대 초반, 코믹스 전성기의 미국으로, 그리고 아트 슈피겔만이 <쥐>(권희종·권희섭 옮김, 아름드리미디어 펴냄)로 1992년 퓰리처상을 받을 때까지도 계속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930~40년대에 걸쳐 만화의 교육적 사용과 학교에서의 만화 독서에 대한 연구, 만화를 활용한 교육과정의 개발 연구 또한 진행되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물론 교육 목적을 가진 다양한 '학습만화'가 탄생하는 기반이 되었고, 만화의 부정적 기능에 대한 주장에 대한 반론이 됐다. 동시에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세계대전 당시 미국, 독일, 일본 등에서 활발히 제작되었던 프로퍼갠더 애니메이션 영화들의 활발한 제작과 배포를 떠올릴 수 있기도 하다. 만화가 훌륭한 정보 전달 미디어임은 사실상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것이었다. 다만 그 주체가 국가, 혹은 지배계급이 되는가, 아니면 노동자 계급인가에 따라 사회의 여론이 다른 목소리를 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적 의미의 '학습만화'와는 다른 '대중을 위한 교양서적'으로서의 만화는 비교적 최근의 발명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작의 주체가 누구인가, 어떤 목적에 의해 제작되었는가, 그리고 누가 읽을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그러하다. 미국의 경우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의 언더그라운드 만화의 붐과 관련이 있었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자전적 작품이지만 부친이 겪은 홀로코스트의 이야기를 생생히 담고 있었고 언더그라운드 만화 특유의 표현적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쥐>의 퓰리처상 수상은 만화의 사회적 지위를 끌어올렸고, 아무튼 최소한 미국에서는 만화의 유해성과 관련된 긴 논란을 종결지을 수 있었다.
<쥐>의 성공은 또한 만화 서술의 주체가 지식인 계층으로 이동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장르적 스타일의 그림체가 자유로운 작가 고유의 스타일로 변화했고, 성인을 위한 다양한 그래픽 논픽션이 제작되었다. 그 중에는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김대중 옮김, 새만화책 펴냄)처럼 이란의 역사와 여성문제, 인권문제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는 자전적 작품도 있으며, 정보 전달을 위한 작품들도 존재한다. 가령 가장 저명한 만화 이론서인 스콧 맥클라우드의 <만화의 이해>(김낙호 옮김, 비즈앤비즈 펴냄) 또한 그래픽 논픽션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비아북 펴냄)를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학습만화라기 보다는 작가주의적 성격이 강하며 특정한 주제에 대한 작가 자신의 전문적 견해와 해석이 담겨 있는 총체적 의미로서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지식을 전달받기 위한 도구로서의 만화가 아닌 만화 작품 그 자체를 읽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언급하려는 책은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일련의 작가주의적 그래픽 논픽션과는 약간 다른 성격을 지닌다. 김영사의 '인문학의 생각 읽기' <만화로 읽는 21세기 인문학 교과서 OOO의 생각을 읽자> 시리즈는 제목 그대로 만화 교과서이자 어른을 위한 학습만화 시리즈이다. 현재까지 앨빈 토플러, 노암 촘스키, 토마스 만 편이 출간되어 있고 피터 드러커, 제레미 레프킨, 아인슈타인, 달라이 라마, 리처드 도킨스, 괴테, 헤르만 헤세 등이 앞으로 발간 예정이라고 한다.
전체적인 구성은 인물의 일대기와 그의 사상을 요약하며, 몇 권의 저서를 리뷰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내용 구성은 해당 분야 연구자가 담당하고, 전문 만화가가 만화를 그려 전통적인 학습만화의 틀을 갖추고 있다.
얼른 보기에, 이 시리즈는 국내에도 일부 번역된 미국의 'For Beginners' 시리즈를 떠오르게 한다. 시리즈의 최초 기획자인 글렌 톰슨은 사회복지사 출신으로서, 노동계급의 아이들이 스스로 책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어했다. 그는 문화적 리터러시를 증진시킴으로서 청소년들이 자신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톰슨과 그의 동료들은 책을 읽지 않는 아이들도 손쉽게 다양한 문화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화로 만들어진 시리즈들을 제작하였는데, 그것이 'For Beginner' 시리즈였다.
이 시리즈는 사상가들의 일생과 그의 이론, 혹은 간단한 이론을 요약하고 있는데, 프로이트, 푸코, 마르크스, 데리다 등 각 인물로부터 시작하여 구조주의, 해체주의, 다다와 뉴딜 정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과 역사적 사건, 사상을 다루고 있다.
다양한 인문학적 테마와 인물을 다루는, 인문학의 입문서라는 점에서 두 시리즈는 어느 정도 닮아 보인다. 그리고 독자가 두 시리즈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소득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읽기에 다소 부담스러웠던 인문학자들의 사상을 가볍게, 그리고 간단하게 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만화들은 본격적인 독서의 전 단계로서, 간단한 리뷰가 되어줄 것이다. 나의 경우 <토마스 만의 생각을 읽자>를 본 뒤 늘 망설였던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읽고자 하는 마음이 단번에 솟아났으니 말이다.
앨빈 토플러와 노암 촘스키의 사상을 만화로 즐긴다는 것은 확실히 흥미로운 경험이다. 마치 중세의 '빈자들의 성경'처럼, 이미지들은 친근하고, 내용은 명확하다. 적어도 촘스키의 캐릭터가 직접 등장해서 자신의 저서를 간결하게 설명해주는 경험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물론 확연한 차이점도 보인다. <인문학의 생각읽기> 시리즈가 전형적인 학습만화 스타일을 취하고 있는 반면, 'For Beginner' 시리즈는 언더그라운드 만화의 표현적 전통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스타일의 차이는 물론 지면 구성이나 표현적 측면과도 관계된다. 전자가 알기 쉽고 충실하게 지식을 전달하는 구성을 선택한 반면 후자의 경우 감정적 울림이 강하다.
그것은 'For Beginner' 시리즈가 출판 협동조합에서 독립출판의 길을 걸으면서 제작되었으며 진보적 사회운동의 맥락에 서 있음과 긴밀히 관련이 있을 것이다. 반면 <인문학의 생각읽기> 시리즈가 인문학의 대중화 붐과 관련하여 메이저 출판사에서 기획되었음은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을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 만화적 형식은 매 시대 대중들을 위한 교육이나 학습에 활용되어 왔고, 그 효과는 언제나 입증된 것이었다. 다만 차이점은 그 교육하고자 하는 의지의 주체는 누구인가 라는 문제일 것이다. 앨빈 토플러를, 촘스키를, 토마스 만을 읽고자, 혹은 읽히고자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어쩌면 'For Beginner' 시리즈처럼 이제는 사회인이 된 학생운동의 주체들의 계몽 의지일 수도 있고, 보다 나은 혹은 깨어 있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대중들의 자기계발 의지일 수도 있다. 또 자신의 자녀가 인문학적으로도 완벽한 르네상스적 인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의지일 수도 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도 인지 못하는 새 깨어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앎에 대한 의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마도, 대중의 인문학적 깨어남이 적어도 국가나 자본 권력의 의지는 아닐 것이라는 확신은 든다. 첫 번째 권인 앨빈 토플러 편만 읽어도 국가의 교육의지가 어떤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인문학의 생각 읽기> 시리즈가 전해주는 독서 경험이 책 뒤 저명한 인문학자들의 서평대로 "현대 명사들의 정신과 작품이 만화라는 옷을 입자마자 손에 잡힐 것처럼 눈앞의 펼쳐지는 전율할 만한 경험"(강신주)을 주거나 "만화가 실현할 수 있는 극대치"(우석훈) 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 <인문학의 생각읽기> 시리즈가 "만화라는 새로운 접근 방식을 통해 인문 정신을 대중적으로 복권시켜보고자 하는 독서운동이다"(권영민) 라는 추천사에는 동의하며 그러한 방식으로 전개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 독서운동이 만화읽기에서 끝나지 않고 본격적인 원전 읽기로 연결되면 더더욱 좋겠다는 바램이다.
어린 시절의 학습만화 경험이 접근하기 어려웠던 구약성경 속 이야기를 드라마처럼 즐기게 해 주었듯, 전국의 초등학생들이 그리스 로마신화 이야기를 줄줄 외우고 다녔듯, 많은 대중들이 이 '어른을 위한 인문학 학습만화'를 통해 앨빈 토플러와 노암 촘스키의 생각을 손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다면 분명 개개인의 '문화적 리터러시'능력을 갖추는 것 이상으로 이 사회에도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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