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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시인? 16세기 조선에선 '일기=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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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시인? 16세기 조선에선 '일기=시'였다!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 ⑥

☞연재 지난 기사 바로 가기 : '말'은 막고 '벌'은 세게 하면… 짐승의 길!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예전에는 대문에 붙여놓았는데, 요즘엔 문자로 받고 있다. 새해의 첫 절기인 입춘을 맞아 크게 복 받고, 정월의 양기를 받아 경사스러운 일이 많으라는 뜻이다. 정월은 아래에 양(陽)이 셋 있는 달이므로 <주역>의 괘(卦)로 말하면 위가 땅(地 음 셋)-아래가 하늘(天 양 셋)인 태괘(泰卦)에 해당하고, 그래서 정월의 별칭 중에 태월(泰月)이라는 말도 있다. 언뜻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어서 뒤바뀐 듯이 보이지만, <주역>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다. 땅이 위에 있기에 자기 자리인 아래로 가려하고, 하늘이 아래에 있기에 자기 자리인 위로 가려고 하면서 운동(運動)과 변화가 가능해지고,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야말로 역동성이 살아 숨 쉬는 괘가 바로 태괘이다. 의학에서 말하는 수승화강(水昇火降)의 이론과 같다. 물은 올라가고 불은 내려야 한다. 실제 자연현상에서는 차가운 기운은 아래로 오고 더운 기운은 위로 간다. 그러나 그렇게 있으면 운동이 없다. 차가운 기운이 위에 있고, 더운 기운이 아래에 있어야 움직임이 생긴다. 움직일 수 있는 힘, 그것이 건강한 상태이다. 아래(하초)가 따뜻하고 위(상초)가 차야 건강한 상태이다. 환자들은 거꾸로인 경우가 많다. 무슨 일이 잘 되거나, 공부가 잘 될 때면 머리가 맑아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 경우이다. 공부하는데 열이 나고 심장이 빨라지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욕심을 부린다든지, 남을 이기려고 한다든지, 의미를 모른다든지 등등. 그럴 때는 쉬면서 걷거나 108배를 하거나 기도를 해서 머리를 식혀야 한다. 버럭 내는 화만 화(火)가 아니다. 그것도 화이다. 누구나 화가 있지만, 화가 뜨면 안 된다. 화는 밑에 가라앉아 있어야 한다.

벼슬보다 좋은 것

오늘은 시 한 수 감상하면서 시작한다. 번역은 원래 같은 과 유영봉 교수가 했는데, 내가 조금 고쳤다. 의미 변화 없이 글자만 손보았으니, 오역이 있다면 유 교수 책임이다.(呵呵)

고상한 현자 푸줏간 낚시터에 숨었고 高賢隱屠釣
달관한 선비 곤궁 기아에 시달렸으며 達士嬰窮餓
예로부터 정승 판서라는 사람들이라고 古來卿相人
모두 다 임금의 보필감은 아니었다네 不一定皆王佐
조정 관리들 누렇게 뜬 사람 비웃지만 肉类食品哂菜色
벼슬길이란 험하고 막힌 곳이 많으니 世路多轗軻
어찌 한가로운 한낮에 북쪽 창 아래 如何北窓下
편안히 누워 있는 것보다야 낫겠는가 白日且高臥

원문의 도(屠)는 도살한다는 뜻으로 소나 돼지를 잡는 것이고, 조(釣)는 낚시질하며 물고기를 잡는다는 말이다. 비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상투어이다. 또 육식(肉类)은 고기를 먹을 만한 녹(祿)을 받는 사람, 곧 조정의 관리를 의미하며, 채색(菜色)은 풀만 먹어서 얼굴이 누렇게 뜬 모습을 가리킨다. 두보의 '그리워하다[所见即]'라는 시 중 "굽은 산골짜기에서 농사짓고, 바닷가 구름 곁에 병들어 누웠도다[爲農山澗曲, 臥病海雲邊]"라는 구절에서 문곡이 운을 가져다 지은 시 여덟 수 가운데 일부이다.

시는 일기(日記)이다

퇴계 이황의 초상.
역사 공부를 시작하여 처음 옛 사람들의 문집(文集)이란 자료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띤 것은 시(詩)였다. 시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시가 문집의 맨 앞에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를 짓는 일이 특별한 사람들의 재능으로 생각되는 요즘의 눈으로 보면, 아니 나의 눈으로 보면, 이런 현상은 낯설기 그지없다. 그런데 조선시대 퇴율(退栗 퇴계와 율곡) 이후에는 매우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부산대 정석태 교수의 말에 따르면 시는 문학작품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일기에 가까웠다는 뜻이다. 만나서 인사할 때도 시로, 헤어질 때도 시로 하였다. 정석태 선생은 퇴계 연구에 가장 정통한 분인데, 정 선생의 말을 빌려 퇴계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해본다. 이 역시 정 선생의 미간행 원고를 필자가 요약만 한 것이므로, 오류가 있다면 전적으로 정 선생 탓이다.

퇴계는 조광조(趙光祖) 등이 공신세력에게 역풍을 맞아 실각한 기묘사화(1519) 이후에 벼슬에 나왔다. 퇴계는 자하산 기슭 하명동에 터를 잡고 집을 짓다가 중단한 다음, 퇴계(지명: 토계)를 거슬러 올라와 지금의 퇴계 종택이 위치한 계상(溪上: 상계·상계마을·웃토계) 바로 아래 골짜기 죽동(竹洞: 대골)에 터를 새롭게 마련하고 집을 지었다. 이 죽동의 집은 퇴계 47세 때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48세 때에는 입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곳 죽동은 골짜기가 좁고 시냇물이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퇴계는 49세 12월에 풍기군수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잠시 이곳에 거처하다가, 그 이듬해 50세 때에는 다시 새롭게 터를 잡았는데, 그곳이 바로 계상이다. 실로 퇴계(지명: 토계)에 처음 터를 잡은 46세 때부터 거의 5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무려 3차례나 터를 옮겨 잡는 과정을 거친 끝에 비로소 계상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차라리 춥게 살지

퇴계는 이곳에서 만년에 학문을 연구하면서 여생을 마칠 계획을 세웠다. 이 무렵 지은 '퇴계(退溪)'와 '한서(寒棲)'라는 시에는 이와 같은 퇴계의 인생설계가 간명하게 표명되어 있다.

몸 물러나니 본분에 편하지만 身退安愚分
학문 뒤로 가는 게 노년 걱정 學退憂暮境
시냇가에 비로소 집을 짓고서 溪上始居住
흐르는 물 보며 날로 반성하네 臨流日有省

숲 속에 띠를 엮어 집을 지으니 結茅爲林廬
그 아래 솟아나는 찬 샘이 있네 下有寒泉瀉
이곳도 깃들어서 즐길 만하나니 棲遲足可娛
아는 이 없더라도 한탄하지 않네 不恨無知者 (<퇴계선생문집> 권1)

한서(寒棲)는 한서산림(寒棲森林), 곧 속된 세상을 떠나 산림에서 조촐하게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춥고 배고프다고 하는 말처럼, 추운[寒] 생활인 것이다. 한서라는 말은 원래 중국 남조(南朝) 양(梁)나라 은사 도홍경(陶弘景)이 처음 쓴 말이다. 주자(朱子)는 이 말을 몹시 좋아해서 자신의 무이정사(武夷精舍) 중에서 도사(道士)들이 거처하도록 마련한 집을 한서관(寒棲館)이라고 이름 지었고, 또 자신이 지은 시 여러 곳에서 이 말을 쓰기도 하였다.


가운데가 한서암. 왼쪽이 계산서당.

어머니도 보고 싶고

이렇게 시는 일기의 다른 형식이었다. 그리고 퇴계의 취향이 앞에 소개한 문곡의 그것과 통하기에 뽑아보았다. 먼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한 수 읊었다.

어머니 한 번 이별한 후 십년이 지나 一別慈顏十載更
음성 얼굴 되새겨 봐도 분명치 않네 音容追憶未清晰
거친 무덤 서리 이슬에 슬픔 더하니 荒原霜露增悽愴
숲 까마귀 반포 소리에 눈물 다하네 淚盡林烏回馈聲 (<문곡집> 권1 '느낌[志感]')

문곡은 다섯 살 때 어머니 연안 김씨(延安金氏)를 여의었다. 1633년(인조11) 10월 13일이다. 십년이 지났다고 하니, 15세 무렵에 지은 시이다. 반포(反哺)란 새끼가 자라 이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걸 말한다. 통상 은혜를 갚는다거나, 부모를 모실 때 쓰는 말이다. 서리와 이슬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추모하는 마음을 표현할 때 자주 쓴다. 아마 10주기 어머니 제사를 지낸 날 어간에 지은 시가 아닌가 한다. 어릴 때 돌아가셨으니 어머니 목소리도 얼굴도 가물가물하여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년의 마음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오죽했겠는가.

무너져 가는 집에 찬바람 들고 破屋凄風入
빈 뜰에는 하얀 눈만 쌓이는데 空庭瑞雪堆
내 수심은 저 등잔불과 더불어 愁心與燈火
이 밤에 함께 재 되어 버렸네 此夜共成灰
(<문곡집> 권1 '눈 오는 밤 홀로 앉아 -1645(인조23)[雪夜獨坐 乙酉]')

그런가 하면 이렇게 눈 내리는 날 홀로 앉았다가 감회를 적은 시도 있다. 우리도 가끔 술 한 잔 생각나는 때가 있고, 가슴이 스산한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럴 때면 이런 마음을 시로 읊었다. 내가 만일 일기에 썼다면? "날이 춥고, 눈이 내린다. 아! 한 잔 생각난다." 정도 아니었을까? 이보다는 문곡의 시가 덜 거칠다. 덜 거칠다는 말은 시를 쓰는 과정에서 마음이 가라앉고 이모저모 생각하게 된다는 뜻이다. 특히 이때는 나라 안팎으로 흉흉하던 때 아니었던가. 줄거리를 엮느라 시를 자주 소개하지 못했는데, 앞으로 유념하여 시로 문곡의 일생을 감상하는 기회를 늘이도록 하겠다. 다시 우리의 얘기를 이어가 보자.

다시 인재가 모이고

1656년(효종7) 정치 일반에 대해 비판하는 문곡의 상소에 대해 효종은 의외로 화를 내지 않고 너그럽게 대답했다는 말까지 하였다. 효종 7년은 의미가 있는 해였다. 효종이 주도했던 즉위 이래의 정책이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노비추쇄, 영장제 등 정책이 그러했고, 효종의 다소 독단적 태도도 비판을 받았다.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고, 효종도 변하기 시작하였다. 적극적으로 재야의 학자들을 초빙하기 시작하였다. 효종 8년 7월에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이 조정에 돌아왔으며, 효종은 이후 동춘당과 국정을 의논하였다. 동춘당은 <심경(心經)> 강의를 통해 군주의 처신을 재학습하였다. 6월과 7월에는 정도응(鄭道應 정경세의 손자)과 허목(許穆)이 들어왔다. 이듬해 7월에는 송시열이 상을 마치고 조정에 왔으며, 9월에 인조 묘호를 논의하다가 유배되었던 유계(兪棨)가 서용되었으며, 10월에는 초려 이유태(李惟泰)가 들어왔다. 윤휴(尹鑴)도 이때 들어왔다. 원래 윤휴는 효종 3년에 이미 민정중이 윤선거(尹宣擧)와 함께 효종에게 천거했던 인물이었다. 윤휴는 '율곡보다 낫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적어도 현종 연간에 예송(禮訟)으로 견해 차이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러하였다. 효종 6년, 우의정 심지원(沈之源)도 윤휴를 추천했고 이어 효종도 관심을 보였다. 벼슬을 사직하던 윤휴는 효종 9년 송시열이 입조한 뒤 다시 추천하자 세자를 가리키는 진선(進善)으로 조정에 들어왔다. 이들 산림(森林)들이 중심을 잡고 홍명하(洪命夏), 조한영(曺漢英) 등 중진이 포진하였다. 거기에 김수항, 민정중(閔鼎重) 같은 실력파 소장 관료들이 결합한 것이 효종 후반의 정국이었다.

하려면 제대로

효종이 나라의 형편을 걱정하고 훌륭한 인재를 얻어 함께 다스릴 것을 생각한 것은 좋았다. 그러나 이 역시 내실이 있어야 했다. 문곡에 보기에 부족한 데가 있었다. 문곡은 또 상소를 올렸다. 임금의 마음이 잡히고 산림들이 조정에 들어왔으니, 문곡이 보기에 중요한 곳은 이제 정조(政曹 이조와 병조)와 법부(法府 사헌부)였다. 인재를 선발하고 관료들의 기강을 세우는 관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조 판서에 송시열을 맡기고 사헌부는 송준길에게 맡긴 것은 이런 취지였다고 보았다. 그런데 효종은 효종 9년 10월 9일 송준길을 이조 참판으로 다시 옮겼다가, 다시 그해 12월 10일 대사헌으로 복귀시켰다. 송준길은 이런 처사가 불편했는지 사직상소를 올렸다. 효종은 한 번의 사직 상소로 바로 체직을 허락하였다. 문곡은 이를 지적하였다. 억지로 시키지 않는 듯은 좋으나, 현자를 관직에 잡아두는 도리는 아니라는 것이었다.(<문곡집> 권8 '소회를 진달하는 상소[陳所懷疏]') 또 있었다. 문곡은 심세정(沈世鼎)이 언관(言官)으로 연루되어 파직된 일을 거론하였다. 심세정은 효종 8년에 종친인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를 탄핵한 일로 파직되었다. 심세정은 "관질이 높은 종재(宗宰)가 애초에 아랫사람을 단속하지 못하고 뒤에 다시 분노를 품고 거짓말로 글을 올려 체면을 손상시켰다."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 효종 8년~9년 사이에는 여러 번 사면이 내려져 이른바 통합의 정치로 나아갔음에도 심세정에게 대해서는 효종이 사면을 허락하지 않았다. 더구나 같은 때 견책을 당했던 이행진(李行進)이나 민유중(閔維重) 같은 신하들은 대부분 서용되어 관직에 나왔으니, 형평에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효종이 문곡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심세정은 현종이 즉위한 뒤에야 다시 관직에 나올 수 있었다.

형제가 함께 있기 어려우니

신의 형 김수흥(金壽興)이 교리(校理)에 제수되었으니, 법규상 상피(相避)에는 해당하지 않더라도 직차(職次)는 극히 편치 않은 데가 있습니다. 신이 전에 이 관직을 맡았을 때에도 이런 혐의가 있어 여러 번 상소를 올려 간절히 기원했으나 성상께 허락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사사로운 정리로 보아도 민망하고 위축되는 것이 말로 다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닥치는 일마다 방해되는 것도 한둘이 아닙니다. (<문곡집> 권8 '형제가 같이 홍문관에 있고 직차가 편치 않아 부제학의 체직을 요청한 상소 - 무술년(1658, 효종9)[兄妹同館 職次難便 乞遞副提學疏 戊戌]')

이 무렵 문곡에게도 문제가 생겼다. 상소에서 보다시피 형인 김수흥이 홍문관 교리를 임명된 것이었다. 이때 문곡은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었다. 부제학은 홍문관의 관장(官長), 즉 장관에 해당하는 정3품 당상관이다. 동생이 관장으로 있는 홍문관으로 김수흥이 온 것이다. 교리는 정5품이다. 그러니 불편할 수밖에. 이렇게 된 이유는 형 김수흥은 효종 6년 문과에 합격했고, 동생인 김수항은 효종 2년 문과에서 장원을 했기 때문에 곧바로 6품에 임명되었으므로 김수항의 직차가 앞섰던 것이다. 상소에서도 밝혔다시피 원래 홍문관은 상피(相避)가 적용되지 않는 관직이었다. 상피제는, 의정부(議部门)·의금부(義禁府)·이조(이曹)·병조(兵曹)·형조(刑曹),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승정원(承政院)과 사관(史官), 장예원(掌隸院)·종부시(宗簿寺) 같은 관청에서는, 집안의 고모나 조카의 남편, 사촌자매의 남편, 이모의 남편은 상피한다. 똑같은 제한이 처첩 집안에도 적용된다. 쉽게 말해 같은 관청에 근무하지 못하는 것이다. 홍문관이 상피 관청이 아니다보니 문곡이 댄 근거는 전례였다. 중종 때 김안국(金安國)과 김정국(金正國) 두 형제가 세자 빈객(賓客 스승)이 되었는데, 혐의 때문에 사직소를 올리자 그 아우 김정국을 체직하도록 명하였다. 세자시강원과 홍문관 관원은 상피가 없기는 마찬가지인데도 체직을 청하자 중종이 허락해준 것은 인정에 편치 않은 데가 있고 법규도 때론 굽힐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문곡의 논리였다. 실록에는 효종 9년(1658) 김수흥(金壽興)이 교리로 임명된 때는 6월 5일인데(승정원일기에는 6월 6일 부교리), 효종은 같은 날 김수항을 승지에 제수했다. 또한 김수항이 부제학에 임명되는 것은 효종 9년 7월 27일이 처음이므로, 실록 자료만 가지고는 이 사실이 설명되지 않는다. 좀 더 생각해볼 일이다.

그런데 이듬해 효종이 세상을 뜬 뒤, 현종 원년에 비슷한 일이 생겼다. 당시 도승지를 맡고 있던 문곡이 교서관 제조(提調)를 겸직하고 있었는데, 교서관은 당상관 이상은 겸직으로 운영되었다. 형 김수흥이 이번에는 교서관 교리를 맡게 되었다. 문곡은 다시 교서관 제조의 겸임을 체직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려야 했다.(<승정원일기> 현종 원년 6월 2일) 잘난 동생도 불편하겠지만, 형도 편치 않았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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