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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거대한 물결! 그 속의 우리는 무력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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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거대한 물결! 그 속의 우리는 무력한가요?! [인문학의 생각읽기 강연①] 앨빈 토플러를 '철학의 지도' 위에서 본다면?

신년이 되면 점집에 손님이 몰린다. 불황이면 종교 시설이 호황이다. 세계가 급변하고 삶이 불확실할수록 개인의 근심은 깊어지고, 그럴수록 절대적인 것을 붙잡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지금의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별로 없고, 내 타고난 팔자나 신의 의지가 대부분을 결정한다는 세계관이 어려운 시절일수록 환영 받는다.

어쩌면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저서도 지난 세기 말 이런 맥락 속에 널리 읽혔던 게 아니었을까. 그는 일찍이 1980년대에, 우리가 21세기에 당도할 수많은 변화들에 대해 '제3의 물결'이라 이름 붙여 예견했다. 우리 삶은 지식과 정보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근대적인 규율들은 와해되며, 권력의 분권화는 물론 생산-소비의 명확한 이분 구도가 사라진다는 상당히 긍정적인 미래상이었다. 게다가 토플러의 말은 종교적 믿음과 달리 현재 삶과 지난 역사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얻어진 통찰이었고,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더 설득력 있는 '거대한 운명'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농경 사회라는 제1의 물결, 산업 사회라는 제2의 물결처럼 인류의 역사를 규정한 거대한 물결이기에 그 속의 개개인들, 바로 우리들은 마치 거기에 휩쓸려 가는 작은 존재로 보이게 만든다. 합리적 예견은 변화를 맞을 개인들을 대비할 수 있게 하지만, 한편으로 커다란 운명을 선결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심리가 인간의 여러 활동에 대한 가치 판단을 블랙홀로 빠트릴 수도 있다.

<앨빈 토플러의 생각을 읽자>(조희원 글, 모해규 그림, 김영사on 펴냄). ⓒ김영사on
인문학 학습 만화인 '인문학의 생각읽기' 시리즈 앨빈 토플러 편(<앨빈 토플러의 생각을 읽자>(조희원 글, 모해규 그림, 김영사on 펴냄))은 토플러의 생각을 상세히 소개하면서도 그것을 비판적으로 읽기를 주문한다. 누군가의 주장이나 사상에 매몰되지 않고 거리를 둘 줄 아는 것이 시리즈 이름과 부합하는 '인문학'적 자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12일 저녁 숭실대학교 형남공학관에서 열린 시리즈 출간 기념 강연 첫 번째 시간에도 핵심 주제는 "토플러의 생각은 인식적 지도상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라는 '거리를 둔' 물음이었다. 강연을 맡은 <앨빈 토플러의 생각을 읽자> 저자 조희원 덕성여자대학교 초빙교수(철학과)는 책을 집필하는 내내 "토플러가 말하는 물결 속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며, 이를 토대로 17세기 이후 서양철학의 흐름 속에서 토플러의 위치를 조망해 나갔다.

'인문학의 생각읽기'는 앨빈 토플러를 포함해 노암 촘스키, 토마스 만 편이 출간되었고 향후 피터 드러커, 제레미 리프킨 등으로 이어지는 인문학 해설서 시리즈로, 다양한 분야에서 인류 문명의 정신사에 큰 영향을 미친 현대 명사들의 저작을 중심으로 그 생애와 사상을 다룬다. 출판사 김영사on과 <프레시안>, 숭실대학교 교육개발센터는 본 시리즈와 함께 기획된 5회의 특별 강연을 진행 중이며, 그 주요 내용을 간추려 <프레시안> 지면에 싣는다.

10회까지 연재된 <앨빈 토플러의 생각을 읽자> 만화 보기
김영사on의 '인문학의 생각 읽기 시리즈'에 대한 서평 보기

<앨빈 토플러의 생각을 읽자> 저자 조희원 덕성여대 초빙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처음에 앨빈 토플러에 대한 책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당황스러웠습니다.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철학을 가르치는데, 토플러는 철학자도 미학자도 아닌 미래학자이기 때문이지요.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경제학 쪽에서 주목하고 이야기해 왔지요.

오늘 강연의 주제는 "앨빈 토플러, 인식적 지도상의 위치는 어디인가?"입니다. 책의 내용과는 달라요. '인식적 지도'라니 어려운 말이지만, 철학 개론서에서 플라톤부터 이야기하는 걸 떠올리면 쉬울 겁니다. 인문학이나 철학 분야에서는 여러 인식들이 마치 하나의 지도처럼 짜여 있다고 간주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가 무슨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이야기는 이러저러한 영향 관계 속에서 파악할 수 있구나 하고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여러 철학자들의 생각 지형 속에서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요? 그것이 오늘 주제입니다.

앨빈 토플러.

앨빈 토플러와 제3의 물결

먼저 간략하게 토플러와 그가 한 이야기에 대해 알아봅시다. 그는 1928년 10월 뉴욕에서 태어났고 꽤 독특한 이력을 거쳤습니다. 특히 대학 졸업 후 5년간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대량생산의 현장을 경험한 것이 이후의 저작에도 영향을 미쳤지요. 그는 노동조합의 지원을 받는 신문에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고, 여러 매체를 거쳐 지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책들을 썼습니다.

<미래의 충격>(앨빈 토플러 지음, 장을병 옮김, 범우사 펴냄). ⓒ범우사
그는 우리의 구체적 삶을 분석하면서, 현재를 이해하려면 과거를 이해해야 하고 현재와 과거를 꿰뚫다보면 우리의 미래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집필한 <미래의 충격>(1970)으로 본격적인 작가로서의 경력이 시작되었고, 1980년에 발표한 <제3의 물결>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요.

이 책에서 토플러는 인류의 역사가 제1의 물결, 제2의 물결, 제3의 물결을 거쳤으며 앞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 혹은 다음 세대쯤 되면 제4의 물결로 전환된다고 보았습니다. 제1의 물결은 농업혁명 이후 농경 중심의 문명을 말합니다. 땅에 뿌린 씨앗이 자라면 먹을 것이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 인류는 정착 생활을 시작했고, 생활이 안정되면서부터 문명이 발발했지요. 오랫동안 지속돼 온 제1의 물결이 뒤집어진 계기는 산업혁명이었습니다. 기술 발전과 함께 공장이 들어섰고, 인류는 대량 생산이 가능한 시대로 이동했습니다. 문명은 이제 땅이 아니라, '누가 생산 수단을 소유했는가'를 중심으로 재편되게 됩니다. 산업 중심의 문명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다는 제3의 물결은 무엇일까요? 요즘도 생산 수단의 소유 문제는 중요하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정보와 지식입니다. 세계는 점점 더 정보 중심의 문명으로 가고 있어요. 아침에 눈 뜨자마자 스마트폰으로 SNS를 하거나 뉴스를 보지요? 바로 이런 정보·지식 기반 문명을 말합니다. 토플러는 '새로운 물결의 등장 또는 변화란 삶의 형식이 바뀌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 때는 모두 땅을 버리고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상경하지요. 그러면서 도시가 팽창하고 그 전까지는 없었던 하수도나 주거 문제가 생겨납니다. 또한 성인 남녀가 낮 동안 돈을 벌기 위해 직장에 나가니까 돌봄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을 해결하기 위해 공교육이란 게 생겨납니다. 이런 식으로 물결이 등장할 때마다 우리 삶의 구체적 모습들이 휙휙 변하게 되는 거지요.

<제3의 물결>(앨빈 토플러 지음, 원창엽 옮김, 홍신문화사 펴냄). ⓒ홍신문화사
공업과 산업 중심의 세계였던 제2의 물결 시기는 여러 이분법을 정착시켰습니다. 먼저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었죠. 또한 주로 아버지들이 나가서 노동(=생산)을 하고, 그들이 벌어 온 돈으로 어머니들이 가정을 꾸리기 위한 소비를 하기 때문에 생산은 남성, 소비는 여성이라는 이분법도 생겼습니다. 나아가 정시 출근이 기본인 직장 생활을 하는 남성은 객관적이고, 틀에 맞춰진 작업이 아닌 가사노동을 하는 여성은 주관적이라는 이분화된 이미지도 퍼져 나갔지요. 거기에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이분법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실감하다시피 이런 이분법적 구도는, 제3의 물결 이후 많이 붕괴되어 있습니다. 토플러는 이제 더 이상 생산과 소비가 엄연히 분리되지 않는다고 보고, '프로슈머'라는 유명한 말을 만들기도 했지요. 가치관의 변화도 동반됩니다. 가령 제2의 물결 시기엔 아버지가 절대 권위를 갖고, 아들은 거기에 도전할 수 없었지만 이젠 저희 집만 봐도 안 그렇습니다. (웃음)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우리 삶 전방위에서 변화가 일어났죠. 여성 대통령, 여성 CEO의 탄생도 그 변화의 일부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인식의 주체야!"

그 변화의 내용은 앨빈 토플러의 저서에서, 또는 제가 쓴 <앨빈 토플러의 생각을 읽자>에서 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책을 쓰기 위해 토플러의 저서를 꼼꼼히 보는 내내 제 머릿속엔 한 가지 물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제3의 물결로 인해 기술 영역이 변화하고, 거기에 떠밀려 우리의 삶의 형식과 가치관까지 모조리 변한다면, 과연 우리라는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지요. '우리는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하고 적응하기만 하는 존재인가?' '변화의 핵심 원동력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질문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철학사 속에는 대립하는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체로서의 인간'론으로, 신이 인간에게 준 지성과 이성을 사용해서 인간 스스로의 뜻대로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두 번째는 '세계를 지탱하는 형식'론으로, 세계가 알아서 변화하는 것이지 인간은 거기 딸려가거나 거의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이야기이죠. 물론 저항은 하겠지만 말입니다. 주체로서의 인간을 강조하는 철학적 사조를 '철학적 인간학'이라 총칭한다면, 세계를 지탱하는 형식에 관련된 입장은 구조주의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 두 입장을 두고 토플러의 사상이 어디에 더 가까운 것인지 추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철학적 인간학은 인식의 궁극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주장합니다. 인식이란 '아는 것'이며, 특히 '보아서 아는 것'이라는 시각 감각과 관련이 있지요.

르네 데카르트.
서구철학에서 인식론을 말하면 늘 데카르트(1596~1650)가 등장합니다. 그 전까지는 누구도 인식의 주체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계의 파악이란 과제에 대해 고대철학은 '사물의 껍질이 특성을 지닌 채 내 눈을 때리면 그 감각이 전달된다'는 식으로 설명했고, 중세철학은 모든 것은 신의 뜻이며 우리는 곧 신이 만든 피조물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우리가 우리를 우리 마음대로 알 수 없었다는 거죠. 중세 철학의 문제란 '하느님이 왜 이 세상을 만들어 놓았는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인간이라는 것이 세계를 인식할 때 세계 속 또는 신 안에 간직되어 있는 진리를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에 따라 그 질서를 포착하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이성에 따라 능동적으로 세계의 구조를 파악한다는 것이죠. 그전까지의 철학에서 나라는 것은 세계 속에 있었습니다. 그럼 과연 세계가 보일까요? 무엇을 보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한 발짝 벗어나 거리를 두어야 하지요. 이 '거리두기'는 그전까지의 세계관을 뒤집는 커다란 변화였습니다. 데카르트 철학의 끝은 '나는 신을 대상으로 놓고 신에 대해서도 인식하겠다'였으니까, 교회가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데카르트 역시 독실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재판까지 가진 않았지만, 그의 사후에 저서들은 금서로 지정됩니다. 하지만 이후의 유럽 철학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주게 되었지요. '인식 주체로서의 인간'을 내세운 데카르트의 철학은 칸트와 헤겔을 거치며 독일 관념론으로 집대성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의 이성은 커다란 무기로 자리 잡게 되고, 이것이 이성 중심주의라는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 냅니다. "배워서 이성을 사용하라, 그러면 세상이 달라질 것이다!"라고 정리할 수 있는 계몽주의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성을 잘 사용하면 수학과 과학이 발전하게 되겠고, 그 결과 산업혁명이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물론 산업혁명은 인간이 자기 멋대로 자연을 굴복시킨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 루소 같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최근 중국의 산업화로 인한 황사나 미세먼지 문제가 이 대목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겠죠.

ⓒ프레시안(최형락)

"주체는 허구야!"

어쨌든 이러한 생각의 끈이 이어져 내려오다가, 사르트르(1905~1980)라는 철학자가 나타납니다. 그는 실존주의자였습니다. 실존주의란 무엇일까요? '신도 없고,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세계 속에 나 혼자 덜렁 떨어져 나와 있으며 누구도 날 어떻게 해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그런데 사르트르는 말년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강연을 열었습니다. 이 강연의 내용은, 거칠게 말해 '나는 데카르트 라인이 맞다'는 이야기였지요. 철학에서 말하는 휴머니즘이란 철학적 인간학이고, 그래서 이 강연은 인간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바로 그 지점으로 회귀하겠다는 얘기였거든요.

그 당시 반 사르트르 진영에는 공산주의자를 표방하는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어지러운 상황, 재건을 위한 반성과 비전이 필요한 시점에 이들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주장에서 갈라져 나오게 되고, 이 분기점에서 철학으로서의 구조주의가 탄생하게 됩니다. 사실 구조주의는 소쉬르(1857~1913)의 구조주의 언어학으로부터 시작된 개념입니다. 일단 큰 구조가 있고, 그 부분에 속하는 것들이 구조 안에서 관계를 맺어 의미를 낳는다는 설명이었지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입장이 결합되어 나온 것이 알튀세르(1918~1990)의 구조주의 철학입니다. 이 관점으로 각 분야를 해석하고 적절한 수정과 변형을 거치며 철학자 푸코(1926~1984), 정신분석학자 라캉(1901~1981), 기호학자 바르트(1915~1980) 같은 이들의 이론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들이 말하는 구조가 정말 움직이지 않는 것이냐, 라는 의심과 반성으로부터 후기 구조주의가 나오게 됩니다. 대표적 학자가 데리다(1930~2004)와 들뢰즈(1925~1995)이지요. 1940~50년대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나치의 지배하에 있다가 겨우 풀려나서 어지러운 상황이었고, 재건에 있어 비전이 필요한데 프랑스 지식인들은 자신 있게 공산주의를 비전으로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르면 공산주의화란 자본주의가 극에 달했을 때 공산 혁명이 일어나 실현되는 건데, 그 당시 실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중국은 이 도식과 달리 자본주의의 극에 달한 적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1930년대를 휩쓴 스탈린의 숙청은 프랑스의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도 했지요.

루이 알튀세르.
열심히 공부하는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알튀세르는 그 대안으로 마르크스주의와 구조주의를 합쳐서 개정하게 됩니다. 이건 어떤 의미일까요? 마르크스는 세계가 정치와 법 같은 관념으로 구성된 상부와 생산과 관계되는 물질적인 것들로 구성된 하부로 나뉘어 있다고 상정했고, 하부구조가 바뀜에 따라 상부구조가 바뀐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상부구조가 종속적인 게 아니라 힘이 굉장히 크다고 보고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길들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가령 산업화 이후 등장한 공교육의 존재 이유는 아빠가 출근해 있는 동안 아이들을 봐줄 수 없어서였기도 하지만, 교육을 통해 산업 사회에 걸맞은 정신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이데올로기를 세뇌시키는 목적도 있다는 거죠. 그렇다면 교육은 하부구조에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겠지요. 구조주의란 구조와 규칙, 약호, 체계를 분석해 이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우리는 저 좌표 속에 이런 존재이구나'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인간 개개인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데카르트 말처럼 인간이 인식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요? 세상을 변혁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까요? 푸코쯤 되면, 아예 주체라는 것은 없으며 주체라는 말 자체가 허구라는 주장까지 나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자율적 주체로서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주체는 구조 내의 관계 맺는 위치에 따라 정해지는 겁니다. 즉 구조주의 내에서는 더 이상 '이성적 주체'라는 것이 유효하지 않다는 말이지요.

토플러의 위치는 어디에?!

다시 앨빈 토플러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여러 철학자의 생각을 배경으로 하면, 토플러의 이야기는 어떤 영향 관계 속에서 파악할 수 있을까요?

칼 마르크스.
나름대로 인식적 지도를 그리고 그 속에 좌표 설정을 하자면 앨빈 토플러는 마르크스, 알튀세르, 푸코와의 관계 속에서 조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어느 것도 100% 수용했다고 볼 수는 없으며, 한계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세계를 상하부 구조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와 유사하지만(본인도 그 영향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토플러는 하부와 상부가 따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곳곳에서 말합니다. 마르크스는 하부구조가 모든 것에 선결한다고 본 데 반해, 토플러는 그저 '경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토플러는 인간 주체에 대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책 중 어느 것을 읽어봐도 우리가 주역이 되어 새로운 물결이 일으켜진다는 이야기는 쓰여 있지 않아요. <앨빈 토플러, 불황을 넘어서>(김원호 옮김, 청림출판 펴냄)를 보면 다국적 기업의 횡포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하는 문제제기가 나오는데, 거의 정부 차원에서만 이야기되지 시민으로서 우리 개개인의 주체성을 인정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인간 주체는 철학적으로 만들어진 허구다'라는 알튀세르의 관점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지식과 권력이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통찰에서는 푸코와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푸코는 참 굉장한 저작을 많이 낸 학자인데, 마지막 시기로 가면 '권력과 지식이 공모 관계에 있다. 그것에 의해 담론이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귀가 얇은 편이라, 아침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의학박사들이 몸에 좋다는 음식을 꼭 사서 저한테도 보내곤 합니다. 그래서 그 박사들이 그런 말 좀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요. (웃음)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이런 것 역시 해당 분야의 최고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권위('박사')와 방송이라는 사회적 지식 권력이 공모한 예가 됩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방송에 나오는 이야기를 별 의심 없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거든요.

미셸 푸코.
이렇듯 지식-권력의 영향이 크다고 본 좀에서 푸코와 토플러는 유사하지만, 평가는 상반됩니다. 푸코가 상당히 비판적이고 반성적이었다면 토플러에게서는 그런 부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비판이나 반성보다는 예측과 예견에 비중을 두었다고 할까요? 그게 철학이라 불리는 것과 미래학이라 불리는 것의 다른 점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혁명을 이야기했고, 알튀세르는 '주체는 없다. 주체가 있다고 믿었다면 너희들은 속았다'는 식으로 말했으며 푸코는 미시적인 권력의 분석을 통해 비판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푸코는 나름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어요. '그리스 시대 육체나 정신 모두 완벽했던 전인(全人)들처럼 스스로 하나의 훌륭한 인격체가 되어라'라는 좀 갸웃거려지는 이야기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토플러에게는 그게 없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이렇게 갈 것 같으니, 잘 알고 잘 적응하자'라는 입장인 것 같아요. 미국식의 실용적인 마인드라고 할까요? 제가 생각하는 토플러의 한계도 여기에 있습니다. 변화한다는 그 물결의 심층에 의심할 것은 없는지, 이런 부분에 대한 의식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러이러하게 바뀌어왔고 앞으로 이렇게 바뀔 것이라는 이야기만 있지 반성이나 대안이 약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철학자가 아닌 토플러를 철학자들의 영향 관계 속에서 파악해 보고 그 위치와 한계를 생각해 봤습니다. 이 과정을 토플러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그가 유명하다고 해서 그의 말을 다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겠죠. 받아들일 부분은 받아들이고, 비판할 부분은 비판해서 취사선택을 해야 합니다. 저는 인문학이라는 것도 '거리두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거리를 두지 않으면 그 대상에 완전히 빠져버리고, 그러면 노예가 되어버리겠죠. 무엇을 보고 듣든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생각하시길 바라며 오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오는 2월 19일을 포함하여 4회 남은 본 시리즈 강연의 신청은 계속 받고 있습니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조합원 및 프레시앙(후원 회원)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강연이며 성함과 연락처, 동반 인원을 적어 담당자 이메일([email protected])로 보내주십시오. 19일은 <노암 촘스키의 생각을 읽자>의 저자 박우성 강사가 강연자로 나섭니다.

시간 : 3월 12일까지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장소 : 숭실대학교 형남공학관 115호 (☞)

남은 강연 스케줄 :
2강 2월19일 수요일 <노암 촘스키의 생각을 읽자> 박우성 강사
3강 2월26일 수요일 <토마스 만의 생각을 읽자> 윤순식 강사
4강 3월5일 수요일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5강 3월12일 수요일 '우리 삶에서 인문학적 소통이 왜 필요한가' 강신주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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