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남원의 작은 마을에, 해가 지고 나서도 끊임없이 홀로 길을 걷던 소년이 있었다. 어느 집 딸이 누구한테 시집갔다는 이야기가 단숨에 마을 전체로 퍼지는 좁은 마을이었다. 30분만 걸으면 마을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닿았다. 좁은 마을이 답답했다. 그 좁은 공간에 갇힌 남루한 세계관은 더욱 소년의 목을 죄었다.
한약방을 운영하던 친구의 집에는, 문학청년인 누나와 형이 쌓아둔 책이 그득했다. 넓은 세계를 꿈꾸던 소년의 눈이 번뜩였다. 그 집을 드나들며 책을 빌려봤다. 어른들은 책 읽으라고 잔소리하긴커녕 소년의 글재주와 문학적 감성을 낮잡아봤다. 하교 후 집에 오면 글짓기로 받은 상장이 불타고 있기도 했다.
김병종 서울대 교수의 이야기다. 국내 화가 중 유일하게 영국 대영박물관과 캐나다 로열 온타리오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된 화가다. 지난 1994년 파리에서 열린 미술마켓인 피악(FIAC)에서는, 그의 작품이 프랑스 일간지 <르피가로>에 소개된 후 출품작 19점이 개막 첫날 매진되기도 했다. 그 파리행도 방랑벽에서 나온 충동이었다. 공항 리무진에 오르는 승무원들의 상큼한 모습을 보고 고무 받아 바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화첩기행>(문학동네 펴냄)의 저자로도 잘 알려졌다.
그는 어떻게, 왜 그리고 쓰는 것일까. 문학동네,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 예스24가 마련한 '우리 시대 인문학' 연속 강연에서 그를 만났다. 지난달 17일 오후 7시 홍대 인사이트 클래스에서 '길에서 만난 삶과 예술'을 주제로 그가 강연한 내용을 정리했다.
문학동네+YES24+프레시안
'5인의 명사에게 듣는다 - 2014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기사 게재 순서
①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2월 14일 진행) - 3/4 화 (☞기사 바로보기)
② <화첩기행> 김병종 (2월 17일 진행) - 3/5 수
③ <애완의 시대> 이승욱&김은산 (2월 18일 진행) - 3/6 목
④ <삶을 위한 철학수업> 이진경 (2월 24일 진행) - 3/7 금
소멸하는 아름다움, 글과 그림으로 붙잡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저에게는 이 두 세계가 서로 데면데면하지 않아요. 동일한 감성의 뿌리에서 솟아오르면서 행복하게 동행하지요. 그래서 <화첩기행>이 나왔어요. 그림 그리는 일을 하고 있지만 글을 씀으로써 자기 고백을 해왔어요. 무언가 억압된 느낌을 해소하는 기분. 3명의 절친한 친구보다 한 권의 노트를 갖는 것이 낫습니다. 웬만한 감정, 희로애락의 상당 부분은 글쓰기를 통해 해소됩니다."
지금도 그렇다고 했다. 그는 "글을 쓰면서 문장의 내밀함을 실험해보는 것은, 수채화처럼 색채 있는 문장을 만들 수 있는지 고심하는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왜 그토록 안간힘을 쓰며 그림과 글에 매달렸는지 되짚어보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13살 그 시절 기억의 창고를 뒤져보니 두 가지 상반된 요소가 나오더군요. 삶의 팍팍함을 상쇄해줄 만큼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섬세한 자연의 교향악 같은 것. 억센 지리산 자락에서 구성적 울림을 받았다면, 그 지리산 자락을 감고 흐르는 섬진강에서는 부드러운 모성적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학소년 시절에 들을 걸으면서, 너무너무 울고 싶을 만큼 슬펐어요. 진달래나 철쭉 봐도 그런 슬픔이 느껴졌지요."
슬픔의 정체가 무엇인지 고심했다 .
"어느 날 낙성대 뒷길을 보니 노란 개나리가 지천으로 폈더군요. 차를 세우고 한 없이 울었습니다. 모든 종류의 아름다움은 소멸한다는 깨달음 때문이었지요. 30년 전에 '선생님'하면서 연구실 문을 밀고 들어왔던 아름다운 소녀들이 이제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어요. 지방에서 열린 제 전시회에 그들이 찾아오더라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모든 아름다움의 정점에는 소멸에 대한 슬픔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소멸하는 아름다움에 대해 글과 그림으로나마 붙잡으려고 안간힘썼던 것이 저의 글과 그림입니다."
좀처럼 집에 붙어있지 않는다고 어머니께 지청구를 듣고도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고 했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더이상 표현하지 못할 만큼 판단을 중지시켜 버리는 압도적 아름다움"을 눈에 담았다.
<바보예수> 연작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서 작은 교회당에 갔던 경험에서 비롯됐다. 잃어버린 아버지에 대한 "부권적 대리자"로 예수를 찾았다. 예수에게 기대고 싶은 어린 마음에서, 예수는 더이상 천편일률적인 매끈한 백인 미남이 아니었다.
상하이에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잘생긴 배우로 꼽히는 김염의 자취를 좇았다. 김염은 예술적 기운이 물씬 풍기던 1930년대 상하이에서 뭇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전설적인 조선 배우다. 정신적 품위를 간직한 조선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항일, 민족, 사회변혁 등을 다룬 영화에 주로 출연했다.
"김염의 사모님은 지금도 생존해계십니다. 제가 그 집을 방문했을 때 여든이 다 된 나이셨는데 정말 40대 후반으로 보이더군요. 아무리 뚫어지게 봐도 잔주름 하나 없었습니다. 중국에선 이 분을 가리켜 '한 나라의 운명을 가름할만한 미인'이라고 한다더군요."
생텍쥐페리가 남긴 문학의 향기를 맡으며
"쿠바에서 본 모습입니다.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과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등을 보고 찾은 곳이지요. 그곳에서 보니, 노래와 춤이 직업인 사람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일상에서 스스럼없이 춤을 추고 노래하더군요. 작은 카페에서 연주하고 춤추는 게 일상다반사였습니다."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는 예술가들의 사랑방을 찾아 문인의 발자취를 좇았다.
"튀니지에 있는 유명한 문인카페 '데나트'입니다. 의자에 앉아있기도 하지만 돗자리가 깔려 있어서 한쪽에 등을 기댄 채 마음껏 담소할 수 있는 카페입니다. 여기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신비로운 바다색을 가장 잘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알베르 카뮈, 앙드레 지드, 생텍쥐페리 등 예술가들이 이곳을 찾았나 봅니다. 문학적 향기의 뒷자리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오래 남습니다. 세월이 가도 문인들이 모였던 장소는 기념되는데 신기하게 화가들이 모인 장소는 기념되지 않아요.(웃음)"
5대양6대주 곳곳에서 수채화 같은 풍경을 눈에 담고 화폭에 담은 그다. 수많은 그림은 모두, 결국 인간과 자연의 따뜻함으로 귀결된다. 그는 그림의 따뜻한 온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가끔 외국에서 전시해도 그림이 참 따뜻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어렸을 때 정에 굶주렸던 제가 따뜻함을 갈구해서겠지요. 무릇 생명이 있는 존재에는 격려, 인내, 따뜻함 등의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김병종에게 묻다-청중과의 1문1답Q: 당신을 설레게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A : 역시 그림 그리는 일이 가장 설렙니다. 어릴 땐 그림 그리다 걸렸다 하면 죽음인데 지금은 아무도 야단을 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가끔 사가기도 해요.(웃음) 제 호가 단아(旦兒), 즉 아침의 아이라는 뜻입니다. 그릴 수 있을 때 많이 그려야겠다고 생각해요. 석․박사생들이 작업하는 거 보면, 얼핏 '이 사람과 진검승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보다 훨씬 반짝이는 재능을 가진 친구들이지만 저도 양에 있어서만큼은 뒤지고 싶지 않아요. 그릴 게 너무 많아서 설렙니다. 또 직업적 문필가가 아니라는 데서 오는, 자유롭게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도 설레요."Q : 작업실에서 나와서 길로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요. 또 그로 인한 예술적 성취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A : 저는 정말 충동적 기질이 다분한 사람입니다. 제가 봐도 싸인 코사인 탄젠트 그래프를 오르내리듯 살아요. 여행을 통해 집착으로부터 잠시 벗어나서 그만큼 날 던져놓고 볼 수 있어요. 눈에 보이는 것을 그저 풍경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곳에 비친 제 모습을 투사해보고 여행을 통해 날 객관화시킨 후 다시 나로 돌아오는 과정이에요. 이런 것 때문에 답답한 공간을 벗어나서 자꾸 떠나게 됩니다.Q : 길에서 느낀 작은 생동감을 가지고 작품에 반영하는 특별한 비법이 있나요.A : 길에서 본 것을 망막의 잔상에만 담아두기엔 억울한 면이 있지요. 제가 체험한 것을 글로 표현해야만 그 과정이 입체적으로 되살아나면서 저에게 의미를 줍니다. 비법은 없고 어릴 때부터 쌓인 내공은 좀 있는 듯합니다. 글로 썼을 때만 제 나름대로 정체성 의미가 확인됩니다. 영원한 문학청년처럼 계속해서 써봅니다. 그러다 보니 약간 가속도가 붙는다는 느낌은 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 놀라게 할 만한 그림과 글을 내놓고 싶다는 야심이 있지만 사람들은 잘 놀라지 않아요.(웃음)계속해서 써보니 약간의 상승 곡선을 그리는 것 같긴 합니다. 그런데 찬물 끼얹는 게, 제 아내는 '당신의 글쓰기는 굉장히 퇴행적'이라고 평합니다. 요즘 저처럼 그런 문장을, 그것도 원고지에 쓰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지요. 참 따분하다고 해요. 저도 젊은 사람들의 글을 보면, 그 통통 튀는 재취와 발랄함에 거의 손을 들고 싶어져요. 정말 잘 쓰고 반짝거리더군요. '이제 나 같은 글쓰기는 완전 아니구나' 싶지만 그래도 연민의 정 때문인지 몇몇 분들이 그걸 읽어준다고 하시니, 다시 쓰고 싶어져요. 모든 종류의 창작이란, 반응이 있을 때에 그 의미를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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