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납의 강제성을 따지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
정리하면 이렇다. '공권력의 강압으로 재산을 가져갔지만, 돌려줄 필요는 없다.' 덧붙이면 이렇다. '그 공권력은 쿠데타로 헌법을 유린한 세력의 손에 있었다.' 의문과 걱정이 동시에 든다. 아이들이 "힘으로 남의 것을 뺏는 건 나쁜 일 아닌가요? 돌려주는 게 맞는 것 아닌가요?"라고 물었을 때 한국 사회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법원도 이를 고민했으리라 본다. 그럼에도 유족 패소 판결을 내린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10년 내에 "강박에 의한 의사 표시 취소"를 했어야 하는데, 그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1962년에 뺏겼으니 10년이면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인 유신을 일으킨 그해다. 법의 논리를 존중하지만, 다만 김 씨가 1972년 이전(1962년, 1963년, 1971년)에 '약탈한 것이니 돌려줘야 한다'며 재산을 되찾으려 시도한 증거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음은 적어둔다. 다른 하나는 재산을 뺏을 때 "김 씨의 의사 결정 자유를 완전히 박탈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부당한 공권력의 강압은 있었지만 의사 결정의 자유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정원 과거사위 위원이던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준다."김지태의 경우 재산 헌납의 강제성을 따지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강도에게 지갑을 빼앗길 때 강도가 내 주머니를 직접 뒤져 지갑을 빼앗아가면 강탈이고, 내가 내 손으로 꺼내주면 '헌납'이나 '희사'일까?" (2005년, <한겨레21>)
법원 결정을 존중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그 의미를 짚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법의 판단은 끝났으나 정수장학회를 둘러싼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다시 불붙을 근거가 충분하다. 법원 결정은 그것대로 인정하되, 사회적 지혜를 발휘할 길을 찾을 때다."박정희 정권 시절엔 박정희 사람들이, 그 후엔 박근혜 사람들이, 심지어 박근혜가 이사장까지 10년 지낸 정수장학회. 이젠 법률적으로, 또 서류상으로는 무관하다고 하겠지만 이 어찌 박근혜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겠나!"
방법도 제시했다. 정수장학회 이사진을 중립적·양심적인 인물(야당 추천 인사 포함)로 전면 교체할 것, 장학회 이름을 바꿀 것, 국가가 100퍼센트 관리하는 장학 재단으로 기부하는 게 박근혜의 입장이라고 밝힐 것이다. 정수장학회 관련 문제 제기를 '잠재워야 할 정치 공세'로 치부한 것을 걷어내고 보면, 윤 전 대변인의 이야기는 많은 국민이 박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것과 상당 부분 겹친다. 문제는 의지라고 보는 이들은 정수장학회의 향후 이사진 구성 등을 주목하고 있다.박 대통령은 윤창중의 조언을 귀담아들었을까
이번 소송엔 뒤틀린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의미도 있었다. 잘못된 일이 일시적으로 일어나도 결국엔 바로잡을 수 있다는 건전한 상식을 아이들과 공유하는 사회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식이 흔들리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식의 궤변이 난무하는 사회로 퇴행할 수도 있다. 정수장학회만의 문제도, 지나친 걱정도 아니다. 총칼로 나라를 훔친 전두환의 일가가 떵떵거리며 사는 동안, 5.18 당시 시민을 학살한 발포의 진상조차 규명하지 못한 나라 아닌가. 한국인을 일본의 침략 전쟁에 내모는 데 앞장선 이들이 해방 후에도 영화를 누리고, 그 후예 중 일부는 조상의 재산을 되찾겠다고 소송을 내는 나라다. 이런 사회에서 자란 아이들이 '나라를 훔치더라도, 일단 성공하면 대대로 잘 먹고 잘살 수 있다'고 여길 때 그 아이들만 탓할 건가. 역사 정의의 문제가 미래와 직결되는 이유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이지만 수많은 사람을 죽이면 영웅' 같은 속설에 빠져드는 아이가 많은 사회의 미래는 어둡다. 올바름을 위해 목숨을 건 '정의로운 바보'들, 인간의 도리를 지킨 이름 없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인류 사회가 이만큼이나마 올 수 있었음을 새겨야 희망이 생긴다. 정수장학회 문제는 이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다.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 한국은 기로에 서 있다.지난 편집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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