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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본 죽음의 그림, 위안을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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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본 죽음의 그림, 위안을 얻다 [최원호의 '俏美하우스'] 박영택의 <애도하는 미술>
2000년 어느 날 당신은 도심 외곽을 걷다가 녹색 벽으로 이루어진 작은 초소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그 녹색의 정체는 청테이프였음이 밝혀진다. 틈 하나 없이 건물의 온 표면과 이음새 전체를 청테이프로 밀봉해 놓은 건물이다. 강박적인 꼼꼼함이 압력처럼 피부를 누른다. 누가 왜 이런 건물을 지었을까. 아니, 왜 건물에 청테이프를 빽빽이 둘러 놓았을까.

▲ 김남훈의 설치미술 '두 번째 방(피해자)'. ⓒ마음산책 제공

이 건물은 김남훈의 설치미술 '두 번째 방(피해자)'이다. 김남훈의 청테이프 작품들은 그 자신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가 청테이프로 세상 만물을 밀봉하고 다니는 이유는 어린 시절 그의 누이가 연탄가스 질식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 죽음은 작가에게 일종의 강박적인 힘을 안겨 주었다. 그는 밀봉한다. 빈틈을 견디지 못한다. 가까운 이의 느닷없는 죽음이 그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그 상처는 누출된 가스의 형태로 그의 영혼을 감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밀봉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가의 삶을 전혀 모른 채 책에 실린 작은 사진을 통해 쳐다보더라도 ‘두 번째 방(피해자)'의 힘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상식을 일찌감치 뛰어넘은 불필요한 꼼꼼함에는 아무래도 어떤 사연이, 특히 괴로움이 숨어 있는 법이다. 시퍼런 초소가 내뿜는 침묵은 보는 사람을 두려움과 쓸쓸함 사이의 어떤 지점으로 이끈다. 죽음이란 어디쯤이냐고 사람들에게 물으면 대부분이 얼결에 짚을 바로 그 지점이다.

김남훈의 작품 이야기는 박영택의 <애도하는 미술>(마음산책 펴냄)에 담겨 있는 아흔 여덟 개의 이야기 중 하나다. 굳이 이야기라고 부른 이유가 있다. 박영택은 서문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책의 주제는 죽음이다. 이 책 속의 미술은 중심 주제의 자리에서 내려와 저자의 마음에 불을 댕기는 ‘현장-사건'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애도하는 미술>은 정보를 나열하고 조합함으로써 어떤 ‘론'을 펼치거나 체계를 조망하는 미술서가 아니다. 이 책은 죽음을 주제로 한 한국 현대 시각예술 작품들을 연료 삼아 박영택 자신의 소회와 감상을 풀어낸 에세이다.

▲ <애도하는 미술>(박영택 지음, 마음산책 펴냄). ⓒ마음산책
에세이로 보는 <애도하는 미술>은 그 마음 씀씀이가 인상 깊다. 저자는 최대한 많은 독자들을 배려한다. 작품 또는 그에 얽힌 사연이 죽음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경우 저자는 작품에 얽힌 코드를 설명하면서 좀 더 작품 가까이로 끌어들이고, 보다 추상적인 성질을 지닌 작업의 경우에는 왜 이 작품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사적인 소회를 싣는다. 작품과 주제가 밀접한 정도는 독자들에게 곧 난이도와 직결되는 문제다. 박영택은 그 난이도에 따라 화자의 개입 정도를 조절하면서 아흔 여덟 개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들이 서로 모난 데 없이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는 약간 호흡을 길게 잡고 최소한 아홉 개나 열 개 정도의 이야기를 단번에 읽어 나가는 쪽이 더 좋다. 좀 더 길게 읽을수록 박영택의 단상은 한 획 드로잉처럼 길게 꼬리를 잇는다. 그 쓸쓸한 움직임이 각별하다. 이러한 리듬 조절을 위해 저자도 편집자도 애를 많이 썼을 것 같다.

그러나 에세이로서의 자의식이 단점으로 작용하는 부분도 있다. 이동욱의 ‘Chupa Chups'를 다룬 장에서처럼 보다 이론적인 접근이 필요한 경우가 종종 보인다. 합성 플라스틱 등의 인공물로 신체를 재현하는 이동욱의 작업이 어떻게 감상자에게 불안함을 안겨주고 그를 통해 현대 사회를 고발하는지 그 작동 방식을 좀 더 자세하게 보여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꼭지 당 길어야 서너 페이지 정도의 분량에 불과한 데다, 앞뒤 꼭지들과의 정서적 흐름을 고려해서인지 ‘개념'에 대한 해설을 일부러 돌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사실 이 문제는 <애도하는 미술>이 본격적인 미술 개론서가 아니라 에세이임을 감안하면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그런데 이론적 해설을 최소화하려는 이러한 우회 전략이 도리어 글의 난이도를 높여 버리는 역설적인 부분이 발생하는 게 문제다. 차라리 아는 게 없는 ‘감성파 미술 에세이스트'였다면 대충 퉁치고 넘어갔을 부분에서 박영택은 이걸 말을 할까 말까 하고 멈칫하는 게 보인다. 이게 참 어려운 결정이긴 한데….

아래는 이동욱의 작업 중에서 사람 얼굴 모양의 막대사탕에 개미들이 몰려 있는 장면을 찍은 작품 ‘Chupa Chups'를 설명하는 부분 중 일부다.

아무리 작아도 비교적 인체의 사실적 외형을 잘 갖춘 그의 소인木偶人들은 잔혹이라는 용어로 대변되는 어떤 카테고리 속에서 피어난다. 잔혹하지만 어딘지 SM적 상상의 여지를 남겨두는 이 두상은 우리가 평소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금기된 욕망을 작게 축소된 인간 형상 속에 응집해서 보여준다.

이 두 문장에서 ‘어떤'과 ‘어딘지'로 뭉뚱그려진 부분에는 각각 그로테스크와 페티시즘에 대한 간략한 해설이 추가되는 쪽이 좋았을 것이다. 미술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문맥을 따라 적절히 유추하며 따라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들은 읽을 수는 있으되 '어떤'과 '어딘지'가 어떤 느낌인지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언급한 이상 짚고 넘어가야 하고, 아니면 차라리 생략하는 쪽이 나았지 싶다. 이쪽저쪽 다 배려를 하려다가 애매해진 셈이다.

▲ 이동욱의 ‘Chupa Chups'. ⓒ마음산책 제공

이처럼 해설자로서의 위치가 불분명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애도하는 미술>은 전반적으로 감성과 지식의 균형이 잘 잡힌 미술 에세이다. 특히 일반 독자들이 접하기 어려운 한국 현대미술 작품들로 이루어진 점이 좋다. 죽음을 다룬 '작품' 말고 죽음 자체에 대해 얘기할 때에는 그 죽음들의 면면이 독자들과 가까운 쪽이 아무래도 유리할 것이다.

겨레의 얼 같은 얼빠진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효과의 문제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이 땅에 사는 독자들에게 더 친근하다. 여기 실린 얼굴들이 죄다 이 땅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노순택이 망월동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소복을 입은 노년의 여인이 무덤 위에 엎어져 울고 있다. 그 하얀 상복과 아줌마 파마의 조합이 안겨주는 친근함은 작품을 이해하기도 전에 단번에 심리적 거리를 좁혀 온다. 이러한 친근함 또는 기시감은 죽음을 이해의 영역에서 끌어내려 독자의 곁에 바싹 붙인다. 자연스럽게 상념을 부른다. 그리고 그렇게 불러일으켜진 상념들은 아까 언급했듯 곱게 다듬어진 각 꼭지들의 이음새를 타고 온갖 다른 개념과 다른 장르의 작품들로 퍼져나간다.

운동권 대학생의 의문사를 일부러 어설프게 재현한 사진, 왕릉 앞에서 찍은 어린이들의 기념사진 위로 그려진 노란 나비들, 마치 카프카의 소설 한 장면처럼 들판에 덩그러니 내던져진 무표정한 소의 머리, 한강 철교에서 동시에 투신하는 수십 명의 사람. 박영택은 눈앞의 작품에 따라 독자들을 회고하도록 만들었다가 죽음 자체의 성질에 대해 생각하도록 이끌었다가를 반복하면서 어느새 그 둘을 한데 엮어 버린다. 충격적인 이미지와 애수를 띈 형상들도 이내 한 몸이 된다.

박영택은 서문에서 '애초에 미술은 애도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그가 자신의 의도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은 영원한 이별에의 슬픔과 인식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공포가 애초부터 한 몸이었으니까. 갓 생명이 떠난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할 때, 그 달착지근한 냄새가 불러일으키는 매혹과 두려움의 자웅동체. 이는 사고만으로는 짚어내지 못하고 각자의 심정을 건드려야만 발견할 수 있는 소중한 지점이다.

그래서 나는 괜한 심정들이 더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애도하는 미술>을 밤에 읽기를 권한다. 잠결에 읽으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간신히 뭔가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만 정신을 잡아두고 나머지는 죄다 놓아둔 다음에 이 책을 읽으면 온갖 잡생각이 찾아든다. 벌써 세상을 떠난 몇몇 친구, 어릴 적 어른들 몰래 처음 술을 마셨던 초상집 풍경, 살인 사건 현장에 둘러쳐졌던 폴리스 라인, 죽은 고양이를 묻어주었던 일, 그런데 상여를 따라가는 저 개는 어찌 알고 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렸을까, 누구네 개일까….

글을 따라 가면서 이런 죽음 저런 죽음 별 꼴을 다 보다 보니 그걸 읽는 내 마음에도 이런저런 기억과 상념의 꼴들이 찾아와 앉았었다. 글쎄, 위로를 받은 쪽은 누구였는지.

결국 진혼 의식이란 죽은 자가 아니라 아직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애도의 궁극적인 대상은 애도하는 자신이다. 쉰 살에 접어든 저자가 '쉰이란 열의 다섯 배가 되는 수란 뜻인데 그렇게 보낸 세월이 너무 아득하고 참담하다'고 말했을 때, 예술은 그에게 눈앞에 닥친 삶의 압력으로부터 우회할 길을, 죽음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다. 이렇듯 애도는 발견되는 것이며 애도를 발견하고 행하는 일은 그 자신의 응어리를 펼쳐내는 일이다.

그러니 <애도하는 미술>을 보다 잘 읽기 위해서는 이 책을 메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미술 작품을 바라볼 때처럼 독자들도 그의 글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마음을 뉘여 놓는 것이다. 그렇게 누워 쓰러진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씨앗과 포자들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잠들어도 좋을 것이다. 바래고 닳은 것들의 품은 늘 처연하고 따뜻하다. 굳이 위로를 말하지 않고서도 주체와 대상이 서로를 위무하는 이 작고 헐거운 애도의 연속체는 근래에 미술 '에세이'가 모범적으로 꽃핀 보기 드문 진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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