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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반도주' 사장을 찾아…기륭전자 재투쟁 100일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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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반도주' 사장을 찾아…기륭전자 재투쟁 100일에 부쳐 [기고] 10년을 견디고 재투쟁에 나선 노동자들
야반도주는 가난한 이들이나 하는 줄 알았다. 빚에 쪼들려 어쩔 수 없이 밤 봇짐을 싸야 했다는 슬픈 사연 한두 마디쯤 들어보지 않은 이가 어디 있으랴. 그런데 가난한 노동자가 아니라 어엿한 기업체의 회장님이 야반도주를 하다니, 그런 해괴한 일도 있단 말인가. 믿기 어려운 일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 게 대한민국 땅이긴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기륭전자(현 렉스엘이앤지) 최동렬 회장이 바로 신출귀몰한 야반도주의 주인공이다.

2010년 11월 2일에 기륭전자 최동렬 대표이사는 국회 귀빈식당에서 노조와 합의문 조인식을 하고, 1895일을 싸워온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경영상의 이유로 복직 시기는 1년 6개월 후에 하기로 했으나, 사측은 그 후 다시 1년을 더 연기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2년 6개월을 참아온 노동자들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며 출근을 시작했지만 일거리를 주지 않은 채 대기발령 상태로 방치됐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30일 밤에 최 회장은 회사 집기를 몰래 빼돌린 채 달아나버린 것이다.

어이없는 상황에 맞닥뜨린 조합원들이 도망간 회사의 위치를 찾으려고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공시된 새 주소로 찾아갔으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대체 회사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리고 최동렬 회장은 어디로 숨어버린 걸까? 할 수 없이 날마다 최동렬 회장이 살고 있다는 아파트 앞으로 가서 기다렸지만, 얼굴은커녕 코빼기조차 구경할 수 없었다. 대신 초인종을 눌렀다는 이유로 주거침입죄라며 현행범으로 경찰에 끌려가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을 뿐이다.

엊그제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다시 농성에 돌입한 지 100일이 되었다며 투쟁결의대회를 했다.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결의대회를 하는 동안 길가에 심어 놓은 수수꽃다리의 보라색 꽃과 흰색 꽃은 진한 향기를 마구 피워댔다. 그 아래 앉아 투쟁가를 부르는 노동자들은 그렇게 봄날의 향기와 함께 서러운 그림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했다. 그날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대회 참가자들에게 따끈한 백설기를 한 덩이씩 돌렸다. 아무리 100일이라지만 자축할 일도 아닌데 백일 떡이라니! 참으로 서러운 백일 떡을 받아드는 손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최동렬 회장, 그는 파렴치한 기업 사기꾼이다. 공장부지와 본사 건물을 팔아먹고, 싸구려 중국 공장을 거액으로 인수하는 식으로 자금을 빼돌리고, 이제는 아예 회사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지난달 31일에는 자본금을 무상감자하기 위해 몰래 주주총회를 열려다 이를 알아챈 노조원들에 의해 무산되기도 했다. 그런데 주주총회를 하기로 했던 장소가 신림동의 모 빌딩 지하에 있는 허름한 나이트클럽이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보다. 주주총회를 나이트클럽에서 한다는 얘기까지 듣게 되다니! 애초부터 상식이란 게 전혀 없는 한 인간에 의해 노동자들이 10년째 거리에서 헤매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10년 동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기륭 노동자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 2010년 11월 1일 국회에서 열린 고용합의서 조인식을 마치고 기륭전자 노사가 악수하고 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노사가 대타협을 이룬 뒤에 열린 승리 보고대회에 참석하러 가던 날의 기쁨을 잊을 수 없다. 고공농성에 94일에 걸친 단식까지, 모든 것을 내던지며 싸운 끝에 얻은 값진 승리 아니었던가. 그날의 기쁨을 시로 읊은 적이 있고, 그걸 작년에 낸 시집에도 실었는데 뒤통수를 맞아도 된통 얻어맞은 셈이다. 내가 이럴진대 당사자인 노동자들은 얼마나 큰 배신감에 치를 떨 것인가? 다른 곳도 아니고 국민의 대표자들이 모인 국회에서 서로 손을 맞잡으며 노사 상생을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래 놓고 약속 이행은커녕 줄행랑을 쳐버린 행위는 국회와 국민을 우롱하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렇게 능멸당한 국회의원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다.
지금 기륭전자 노조원들은 최동렬 회장이 집기를 빼돌려 텅 비어버린 사무실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10년을 상처투성이로 싸워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 노동자들에게 희망과 위로, 연대의 손길이 절실하다. 기업 사기꾼, 악질 자본가 최동렬을 처벌하지 못하고 정의를 말할 수 없다. 아무리 세상이 세상답지 못해도 우리마저 그 틀에 갇혀 지낼 수는 없다. 분노할 때 분노해야 한다. 분노의 힘으로 정의를 조직해야 한다. 봄날이 무르익고 있다. 노동자들의 분노도 덩달아 무르익어 가고 있다. 꽃잎은 지더라도 마음속 꽃잎은 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00일 투쟁 결의대회 때 기륭노동자들에게 아래와 같은 시를 읽어주었다. 볼품없는 몇 줄의 언어일망정 작은 위로와 격려가 되어주었기를 소망한다.

지지 않는 꽃
-기륭노동자 재투쟁 100일에 부쳐

밟아라 더욱 밟아라
그럴수록 솟구친다

밟아라 더욱 밟아라
그럴수록 분노한다

밟고 밟히는 나날 속에서도
목련이 피고, 벚꽃은 휘날리는구나

그래도 잊지 말아라
꽃바람 속으로 따라나서지 못하고
찬바람이 새겨놓은 시푸른 멍 어루만지며
끝나지 않은 싸움 이어가는 이들 있으니
떨어진 꽃잎은 시들어도
마음속 꽃잎은 나날이 붉어갈 테다
밟아라 밟힐 것이다
밟히되 지지 않을 것이다
밟히되 찢기지 않을 것이다
밟히되 흩어지지 않을 것이다

밟고 돌아서는 발걸음마다
악착같이 달라붙을 것이다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밟힐수록 뜨거워지는 가슴이 있다는 걸
밟힐수록 붉어지는 꽃잎이 있다는 걸
오, 얼마나 더 보여주어야 하랴

여기 떨어진 꽃잎 깔고 앉아 노래 부르는 이들을 보아라
스스로 꽃이 된 이들을 보아라
지지 않는 꽃들을 보아라
봄 마당 가득 채운 꽃밭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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