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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우린 여전히 '박정희 체제' 청산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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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세월호, 우린 여전히 '박정희 체제' 청산 못했다" [지상 중계] 장석준 노동당 부대표의 <사회주의> 강연
책세상 출판사는 한국 사회와 현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사회과학 개념들을 뽑아 그 의미와 역사, 실천적 함의를 해설하는 '비타 악티바 | 개념사' 시리즈를 꾸준히 출간했다. 2008년 11월 최현의 <인권>(1권)으로 시작하여 최근 장석준의 <사회주의>(28권), 이승원의 <민주주의>(29권), 하승우의 <공공성>(30권)이 출간되었다. '비타 악티바 | 개념사' 30권 출간 기념 연속 강연이 기획되었고, 지난 4월 23일(수) 장석준 노동당 부대표가 <사회주의>의 핵심 내용에 관한 강연을 <프레시안> 1층 강의실에서 가졌다, 그 주요 내용을 이 자리에서 소개한다.

▲ ‘비타 악티바 | 개념사’ 30권 출간 기념 강연 중인 <사회주의>의 저자 장석준. ©프레시안(최형락)

장석준 노동당 부대표가 쓴 <사회주의>는 '국가' 중심 사회주의에서 '사회' 중심 사회주의를 다시 생각하자고 제안한다.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라는 통념에서 벗어나,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그 앞에 붙은 '사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그는 200년 가까이 된 사회주의의 역사를 되짚으며 공동체로서의 새로운 의미가 21세기에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강하게 피력했다. 그는 강연 도중 "한국 사회가 정말 바뀔 수 있을까?"라는 청중의 질문에, 일단 그 목표에 앞서 태도에 대한 점검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사회의 도덕적 태도, 즉 연대가 먼저 실현되어야만 여전히 '발전'을 최우선가치로 여긴 채 앞으로만 나아가려 하는 신자유주의를 바꿀 수 있다는 토대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1987년 이후 한국이 도약했다고 다들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보면 우리는 여전히 박정희 체제를 제대로 청산하거나 극복하지 못했다. 극복하는 시기가 빨리 오면 좋겠지만, 그 '빨리'는 공짜가 아닐 것이다."

세월호 비극이 보여주듯, 관료제를 비롯한 국가 체제의 전반적인 무능함, 거친 이념의 갈래 속에서 여전히 안주하고 있는 시민들, 절차와 규정과 모두의 안전을 간단히 무시해버리는 '기업가 정신'의 비극을 우리는 이 사례를 통해 극명하게 직시했다. 참으로 무참한 심정이지만, 이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일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단계로 '비약'하게 되는 순간은 정말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혁명가거나 예언자인양 행동하기보다, 우리의 미래를 비춰볼 수 있는 과거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고 거기서 지혜를 얻어야 한다. 배움은 실천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비타 악티바 | 개념사'의 또 다른 강연은 오는 5월 7일(수) 저녁 7시 <프레시안> 1층 강의실에서 열린다. <공공성>의 저자 하승우의 강연 내용은 이후 '프레시안 books'를 통해 소개할 예정이다. <편집자>

▲ <사회주의>(장석준 지음, 책세상 펴냄). ©책세상
<사회주의>의 전체 분량은 적지만, 그 안에 사회주의라는 어마어마한 주제를 담아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인류사 몇 세대에 걸친 대중적 이념이자 운동, 권력이었던 사회주의를 정리한다는 게 어려웠고요.

두 번째로는, 한국 상황이 복잡하잖아요. 제가 속한 노동당 강령을 보면, "사회주의 운동이 우리의 뿌리"이며 "지배와 차별, 불의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다양성 존중의 가치를 일깨워 준 여성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 그리고 소수자 운동의 전통을 이어받는다"고 명시했습니다. 하지만 지방 선거에 나가면 우리 당은 '사회주의를 추구한다' 대신 '평등 생태 평화 공화국을 추구한다'고 합니다.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쉽게 쓰지 못하는 거예요. 한국에서 그나마 노동당이 등장하는데 육십년이 걸렸고 진보정당 중 하나는 헌법재판소에 가있는 상태지요.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대부분 사회주의는 뿔 달린 악마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바로잡아야 하는 내용도 책에 담아야 했습니다.

세 번째로는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겠지요. 그럼 사회주의는 100퍼센트 변호해야 할 대상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80년대에는 사회주의가 무조건 선이라고 생각하는 운동권이 많았지요. 하지만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니, 사회주의에도 문제와 오류가 있었다는 걸 우리는 확인해 왔습니다. 그걸 냉정하게 하나하나 평가하면서 비판할 부분과 곱씹을 가치가 있는 부분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네 번째, 21세기라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로부터 건질 수 있는 게 뭘까, 새로운 사회주의의 흐름을 어떻게 부각시킬 것인가까지 <사회주의>에 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담긴 내용보다 담기지 못한 내용이 더 많습니다. <사회주의> 말미에는 '더 읽을 책'의 목록을 적어 두었습니다. <사회주의>는 독자들이 그 책들로 다가갈 수 있는 입문서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

▲ <오래된 희망, 사회주의>(마이클 해링턴 지음, 김경락 옮김, 김민웅 감수, 메디치미디어 펴냄) ©메디치미디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에서 강조하고 싶은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가 아닙니다. 사회주의가 곧 마르크스주의라는 믿음은 80년대 한국 운동권만의 생각이 아니라, 한국 바깥에서도 상식으로 통하기도 합니다. 백과사전에서 사회주의 항목을 찾아보면, 마르크스와 그 후예들에 관한 기술이 2/3를 차지합니다. 최근 마이클 해링턴의 <오래된 희망, 사회주의>(김경락 옮김, 김민웅 감수, 메디치미디어 펴냄)도 출간됐는데, 그를 포함한 대부분 사회주의 입문서나 개론서를 보시면 마르크스주의에 집중해 설명하는 게 다수입니다. 그게 기만이나 역사의 왜곡은 아닙니다. 적어도 19세기 후반에는 사회주의 8, 90퍼센트를 마르크스주의가 채웠던 게 사실이니까요. 그러다보니 마르크스주의에서의 오류가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사회주의 전체의 문제인 것처럼 각인된 측면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사회주의라는 말을 꺼내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뭐가 가장 먼저 떠오르세요? (이때 청중들은 "빨갱이""통제""공동생산" 등의 단어들을 언급했다. -편집자) 그렇군요. 전 개인적으로 매스게임을 떠올립니다. 넓은 광장의 군사 퍼레이드 같은 풍경이요. 김일성일 수도 있고, 모택동이나 브레즈네프일 수도 있지만, 그런 사람이 높은 단상에 서서 그 매스게임을 지켜보는 풍경이 연상돼요. 한마디로 그건 국가의 모습입니다. 북한에만 있는 유별난 모습이 아니라 대한민국에도, 영국에도 미국에도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국가에는 여러 얼굴이 있다고 눙치면서, 그 점을 숨기려고 하죠. 사실 그것이 관료조직, 국가의 맨얼굴입니다.

국가의 구조적·통시적 핵심은 군대입니다. 군대가 발전해서 관료조직이 됐고 그를 기반으로 현대 국가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국가 안에 군대의 원리가 담겨 있어요. 사회주의는 결국 그렇게 국가주의로 기억됩니다. 반공사상에 찌든 사람이건 운동권 출신이건 그 기억은 비슷할 겁니다. 만약 실제로 사회주의가 곧 국가주의라면, 그건 청산해야 합니다. 소련이 무너지고, 중국이 반(半)국가주의 반(半)자본주의 국가로 변하는 과정에서 국가주의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드러났어요. 다시 말해 우리가 살 수는 없는 체제임이 드러난 거죠.

▲ 장석준 노동당 부대표. ©프레시안(최형락)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사회주의를 강조하고 싶어서입니다. 마르크스주의 이전인 1800년대 초부터 30년간,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등장하기 이전의 한 세대가 열어 보였던 사회주의는 엄청나게 다양한 세계였습니다. 애초에 이름을 '사회주의'라고 지은 것도, 자본주의에 반대되는 체제가 '사회'라는 게 어찌 보면 좀 특이하잖아요.

마르크스 이전 세대들의 핵심 인물은 생시몽, 샤를 푸리에, 로버트 오언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 자리에서 제가 얘기하려는 인물은 오언이고요. 예전 운동권들은 이 초기 사상가들은 그냥 지나치는 정도로만 다뤘어요. 엥겔스의 책 <공상에서 과학으로>(박광순 옮김, 범우사 펴냄)의 제목 때문인지, 이전 세대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로만 여겨졌던 게 사실인데요,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원전을 보면, 그 두 사람조차 그러지 않았습니다. 엥겔스가 그야말로 옷깃을 여미면서 언급하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 중에서도, 가장 존경의 염을 갖춘 인물이 바로 로버트 오언입니다.

▲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로버트 오언 지음, 하승우 옮김, 지만지 펴냄). ©지만지
오언의 유명한 실험이 있죠. 뉴 라나크 공장이요. 일반적인 자본가와 달리, 오언은 노동자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는 공장을 운영하며 성공을 거뒀지요. 그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으로 출발한 사람입니다. 그가 1814년에 쓴 책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A New View of Society)>(하승우 옮김, 지만지 펴냄)은 사실 좀 졸린데요, 참고 읽다 보면 (웃음) 굉장히 감동적인 부분이 나옵니다. 제목 자체도 그래요. 당시에조차 '사회'는 잊힌 말이었어요. 오언은 그 단어를 새롭게 정의 내렸구요. 그래서 제자들이 스승의 사상을 사회주의라고 불렀고, 코뮤니즘이라는 단어도 붙였습니다.

오언이 생각한 사회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그것은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입니다. 이 사회는 자본에 의해 지배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회주의=국가주의'라고 알게 되는 국가도 아닙니다. 자본이나 국가가 빠진 사회라는 게 사실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오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얘기했던 겁니다. 그는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이 같은 사상을 도출했습니다. 우선 기독교의 교리에 따르면 최후의 심판에서 심판받는 건 개인입니다. 도덕적 책임의 주체가 개인이죠. 그리고 영국을 중심으로 등장한 자유주의는 바로 그 기독교에 기반한 개인을 등장시킵니다. 잘 살든 못 살든 책임의 주체가 역시 개인이에요. 오언은 그 둘 다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도 자기 삶을 개인적으로 책임질 수 없습니다. 나의 삶은 인간관계 속에서 만들어졌으니까요. 집 나간 엄마와 주정뱅이 아빠, 그런 삶의 책임을 아들에게 물어야 할까요? 책임의 주체는 사회입니다.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개인의 행복은 실제로는 자본가 몇몇의 행복일 뿐입니다. 사회에 권력을 줄 때에만 개인의 행복이 가능해진다는 게 가장 원초적인 사회주의 정신입니다. 국가주의로 옮겨가면서 망각되고 훼손됐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200년간의 여정에서 적자가 많이 났지요.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긍정적으로 발굴해야 할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사회'가 여전히 애매하다는 겁니다. 오언의 시대까지만 해도 실체로 보이지 않았어요. 1830년, 40년대쯤 와서야 사회가 이런 조직들로 표현되어야 하고 그 조직이 권력을 쥐어야 한다고 얘기할 수 있게 됐습니다. 바로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이 등장한 거죠. 먼저 노동조합의 경우, 자본가가 등장하기 이전의 중세 시대 수공업자들이 스스로 생산을 통제했던 바로 그 조직을 이어받은 겁니다. 직업별 노동조합끼리 결합하면서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요. 협동조합의 경우, 오언의 제자들이 1840년대 경에 이미 소비자협동조합을 만든 바 있습니다. 오언은 소비와 생산의 결합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주장한 사회는 생산자협동조합 쪽에 더 가까웠구요. 기업을 노동자가 스스로 운영한다는 것은, 오언을 비롯한 초기 사회주의자들 뿐 아니라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강조한 바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을 생산자협동조합이라고 여겼어요. 생산자협동조합이 시장에서 경쟁하는 게 아니라, 그 사이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계획적 방식으로 생산 활동을 통제해야 한다고 단서를 달았죠. 레닌 역시 국유화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공장 운영을 강조함으로써 지지를 받았고 10월 혁명을 성공시켰죠. 지금 봐도 매우 아름답고 풍부한 무언가를 우리에게 던지는 이야기입니다.

마르크스 사상은 모두 '정답'인가

▲ <공상에서 과학으로>(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박광순 옮김, 범우사 펴냄). ©범우사
<사회주의>에서 제가 강조하고 싶었던 두 번째 측면은 마르크스 사상과 마르크스주의를 구분하자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교리에 가깝지요. 소련이나 동독의 교과서 같은 겁니다. 제가 말하는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은 모두 세 가지인데요, 먼저 첫 번째는 역사와 자본주의에 관한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2세대입니다. 오언이 사회주의 1세대지요. 오언 시대의 자본주의는 아직 승리를 거둔 상태가 아니었어요. 영국에서는 그랬지만, 그 외 지역은 아직 산업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았으니까요. 그 시기 사회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 아닌 세상은 선택의 문제였던 겁니다. 우리는 그들을 두고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하지만, 사실 그 시대에는 현실적인 문제였던 겁니다. 그리고 나서 마르크스의 시대로 넘어오면, 이미 역사는 결정됐어요. 영국의 자본주의가 유럽을 뒤덮으며 승리를 거둔 겁니다. 자본주의 아닌 어떤 것을 선택하자는 게 오히려 현실성이 없던 시대입니다. 그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등장한 거죠.

저는 생산력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개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자본주의가 승리하면, 그와 함께 생산력의 발전이 따라옵니다. 하지만 이건 자본주의의 성취가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거꾸로 생산력이 발전하면 할수록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사회, 즉 사회주의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엄청난 혁신적인 생각 때문에 사람들은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어요. 나약한 노동자가 운동에 참여하면서, 실제로는 매일 지고 있지만 결국엔 내가 승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근거를 제시해준 겁니다. 자본주의가 성장한다는 건 네 힘이 성장한다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장 덕분에, 사회주의가 지금까지 힘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의 사상의 두 번째 핵심은 사회입니다.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이 등장하긴 했지만, 이건 경험에서 우러나온 거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론화시켰고요. 즉, '노동자 계급이 사회를 대변한다.' 그래서 사회는 더 이상 모호한 개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사회주의는 노동운동을 통해서, 노동자 정당을 통해서 대변되고 실현될 수 있는 이념으로 피와 살을 가질 수 있게 됐습니다. <공산당 선언>은 정말 유명한 문장,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끝납니다. 사실 그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창작물이 아닙니다. 고갱의 외할머니이자 여성 사회주의자 플로라 트리스탄이 이미 몇 년 전에 외쳤던 문장을 빌려온 겁니다.(웃음) 즉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유레없던 무언가를 만들어냈다기보다, 그 이전 사회주의자들의 노력과 고찰의 토대 속에서 두 사람이 나올 수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마르크스 사상의 세 번째 핵심은 정치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사회주의자들이 만드는 정당이 혁명을 통해서 집권해야 한다고 믿죠.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 시대에는, 그런 주장이 생소했습니다. 이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 전엔 정치를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시키는 게 아니라고 봤어요. 심지어 사회주의는 정치를 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도 있었죠.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은 정치와는 다른 뭔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부르주아들의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우리 스스로 새로운 사회의 맹아를 만들어가자, 이런 생각이 강했습니다. 프루동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때부터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이 나뉜 겁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정치권력을 통해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그 유명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그래서 등장합니다. '독재'라는 단어 자체는 매우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시대의 한계가 분명 있었다는 건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1830년대가 보통선거권이 있는 시대가 아니었잖아요. 그럼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총을 들고 권력을 잡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게 수립한 권력은 독재를 해야 하고요. 이 괴리감을 떼어놓고 들여다 본다면, 여기서 핵심은 정치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자본주의와 생산력, 사회, 정치. 이 세 가지를 통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기여한 바에 따라, 마르크스주의라는 틀이 짜였고 20세기 사회주의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이 세 가지 모두, 뛰어난 성취기 때문에 폐기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그 속의 한계와 모순은 지적해야 합니다.

20세기 사회주의 운동, 특히 소련과 중국의 변화에서 먼저 생산력을 봐야 합니다. 생산력은 자본주의의 성장을 가능케 하죠. 성장이 없어지면 자본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시스템이 무너집니다. 흥미로운 건, 20세기에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성장주의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일단 소련 같은 국가사회주의에서는 이른바 5개년 계획을 실시했죠. 성장이라는 목표를 자본주의가 아니라 국가 관료가 정하고, 거기 맞춰서 모든 사람들이 뼈 빠지게 노동했습니다. 소비는 국가가 시키는 대로만 했고요. 이런 1930년대 5개년 개획이 한국에 상륙합니다. 박정희 시대의 성장주의 안에는 만주국이라는 디딤돌을 통해, 스탈린의 성장주의에서 전해져온 DNA가 존재하는 겁니다. 생산력과 성장을 우리가 성찰적으로 봐야 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서구 사회민주주의가 성공한 건 대공황을 거치며 케인즈주의와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자본주의에게 마약을 먹인 꼴입니다. 그로 인해 복지국가가 생긴 건 다행이지만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장주의가 왜 문제인지에 대해 이 자리에서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후쿠시마, 그리고 현재 세월호 비극까지, 해가 거듭될수록 성장주의의 문제점은 더 거대하게 폭발할 것이고, 이걸 극복하지 못하면 사회주의도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사회의 대변자로 노동계급을 상정했던 것도 일정 정도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현재 우리 상황을 보죠. 한국 사회는 왜 꼬였을까? 이를테면 386세대는 '노동자 계급이 사회를 개선시킨다'라는 정답을 하나 도출해냈습니다. 그건 혁명을 통해서일 수도 있고, 사회민주주의 같은 방식을 통해서일 수도 있죠. 하지만 한국의 실제 노동계급은 그럴 수 있는 역량이 없습니다. 사회민주주의라는 두 번째 시나리오가 작동하지 않으면서 대안이 등장하지 않은 거죠. 서구의 경우 20세기에 가동된 대안이 한국에선 안됩니다. 사회주의를 일정정도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부분입니다.

세 번째는 정치입니다. 정치의 무대는 국가고, 국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이 집결된 곳입니다. 그 권력을 갖겠다고 활동하는 순간, 국가에 발을 디딜 수밖에 없고요. 이것이 계속 과도하게 강조되는 순간, 처음에 말씀드였던 국가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20세기에 사회주의는 국가주의가 되어버렸잖아요. 여기까지가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해 제가 아프게 곱씹어본 부분입니다.

대안은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

<사회주의>가 짧은 책이다 보니 전체적인 전개를 좀 도식적으로 간 부분이 있습니다. 후반부 대안을 제시하는 부분에서도, 20세기 사회주의의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대응하면서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 장석준 부대표가 강연 도중 추천했던 또 다른 책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홍기빈 지음, 책세상 펴냄). ©책세상
첫째, 20세기 사회주의가 정치를 강조한 건 좋았지만 그게 국가주의로 가버렸다는 실패의 경험이 있지요. 그래서 이후 사회주의 전개 과정에서 다른 길을 모색했던 노력을 일부러 강조해서 이 책에 썼어요.

스웨덴 사회민주주의도 1970년대에 새로운 대안을 찾습니다. 1970년대는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시기, 매우 의미심장한 시기입니다. 스웨덴은 복지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자본의 권력을 환수해야겠다는 궁극적인 결론에 도달하지만, 국유화가 아닌 다른 방식을 생각합니다. 루돌프 마이드너가 주장한 임노동자기금이 그것입니다. 대기업의 초과이윤을 신규 주식으로 발행하여, 시장에 유통시키지 않고 임노동자기금이라는 금융기구에 적립하게 합니다. 그럼 2, 30년쯤 지나면 임노동자기금이 대기업의 대주주가 되고, 임노동자기금의 주주는 노총, 노총의 주주는 노동자가 됩니다. 사원총회를 열면 그게 주주총회가 되는 거지요. 노동자가 직접 경영해야 한다는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이상이 국가주의로 돌변하지 않은 참신한 방식의 사례입니다. 이걸 100퍼센트 따라 하자는 건 아니지만, 이들이 구현하려는 정신이 사회주의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우리가 대안을 고민할 때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노동계급이 나서야 한다는 기본 교리에 있어서는, 좀 조심스럽게 썼습니다. 다른 부분에선 제가 답이 있다고 확신하는 점을 썼는데, 이 부분은 아직 사실 잘 모르겠어요. 다만 참고 사례로서, 그람시 얘기를 소개했습니다. 그람시의 당시 상황이 지금 우리와 비슷하거든요. 당시 이탈리아는 노동자가 밀집한 이탈리아 북부, 농민들이 밀집한 남부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자본주의의 발전 때문에 남부의 농촌이 수탈되는 상황이 연이어 발생했고, 농민은 당연히 노동자를 싫어했고요. 그람시 자신이 농민 출신이었고, 북부의 자동차 공업 도시 토리노에서 투쟁하다가 투옥된 바 있습니다. 그때 간수가 묻죠. "당신은 왜 상전들을 위해 싸우는가?" 그람시는 이 말에 충격을 받았고, 이후 쓴 글에서 노동계급의 도덕적 희생을 주장하는 데 이릅니다. 즉, 노동자가 농민을 이끄는 계급이 되기 위해서, 함께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당장의 경제적 이해를 희생해야만 헤게모니가 구성될 수 있다고 쓰죠.

셋째, 성장주의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 대한 고민 때문에 생태사회주의, 녹색사회주의라는 말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탈핵도 여기 포함되고요. 마르크스와 엥겔스 시절부터 긍정적으로 생각한 생산력 발전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고민의 핵심이었습니다. 극도의 생산력 발전을 기반으로 새로운 사회가 도래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지만,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바뀌지 않은 채 계속 발전을 거듭하고 있죠. 열매가 맛있게 익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따먹지 않으면 썩습니다. 지금이 그런 부패의 상황 같아요. 생산력 발전이 더 이상은 인간 해방의 근거가 아니라 그를 가로막는 토대로 반전된 상황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 이반 일리치의 책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권루시아 옮김, 느린걸음 펴냄). ©느린걸음
더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도식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고민에 있어서는 이반 일리치의 사상을 참조했는데요. 우리한테는 근본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사상을 읽다보면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됩니다. 그는 사회주의 운동에 있어 세 가지 기준의 다중적 균형이 필요하다고 썼습니다. 즉 생산력에 있어, 어떤 생산력은 발전할수록 인간에게 해로울 수 있다는 걸 파악한 겁니다. 세 가지 기준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생존, 정의 혹은 평등, 공생성(CONVIVIALITY).

공생성이라는 단어가 좀 낯설지요. 어원은 '잔치를 벌여서 사람들이 술을 마셔서 다들 기분이 좋은 상황'이다. 누구나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즐겁게 돌아가는 그런 상황이죠. '술'이라는 게 뭘까, 일리치는 생산력, 더 정확하게는 과학기술력이 그런 '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우리 모두 기분 좋을 정도로만 그걸 사용해야 한다는 거죠. 이렇게 생존의 요구, 정의의 요구, 공생성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킬 때 다중적 균형이 이뤄집니다. 이 균형점은 아무도 얘기해줄 수 없어요. 과학기술 전문가도 못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정해야 해요. 일리치는 그 부분에서 참여민주주의를 주장했습니다. 생산력 발전이 사회적 기반이 아니라, 대중이 끊임없이 참여하고 토론해서 '이 정도까지가 우리가 행복해지는 정도'라고 정할 수 있는 사회가 행복할 것이라 썼어요. 분명 고전적 사회주의와는 입장이 다르지요.

전 일리치의 의견을 참고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그런 방향으로 재구성해야만 자본주의가 부패하는 단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힘이 될 수 있다고 <사회주의>에 썼습니다. 현재진행형의 고민을 전부 <사회주의>에 담진 못했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를 강연 끝나고 여러분과 나눠보고 싶습니다. 긴 시간 동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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