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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말하던 남자, '그라운드 제로'로 돌아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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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말하던 남자, '그라운드 제로'로 돌아간 이유 [최원호의 '朵朵 하우스'] C. S.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
2010년 7월에 문을 연 '프레시안 books'가 이번 5월 30일, 191호를 끝으로 잠시 문을 닫습니다. 지난 4년간과 같은 형태의 주말 판 업데이트는 중단되나, 서평과 책 관련 기사는 <프레시안> 본지에서 부정기적으로나마 다룰 예정입니다. 아울러 시기를 약속드릴 수 없지만 언젠가 '프레시안 books'를 재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실린 글을 편하게 검색하고 볼 수 있는 아카이브를 여름 내로 구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프레시안 books'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 참여해 주신 필자 여러분, 지켜봐주시고 도와주신 출판계 관련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프레시안 books'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 조합원으로 함께해 주세요! -프레시안 books 편집부 올림


▲ <프루스트와 기호들>(질 들뢰즈 지음,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나는 지난 달 초에 마르셀 프루스트에 대해 쓰고 있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소설과 예술 분야를 담당하는 MD가 자신의 두 분야를 행복하게 결합시킬 수 있는 좋은 소재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아름다운 소설을 소위 '일반 독자'들에게 소개하려고 했다.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좋으니 어떤 사물이나 장면이 또 다른 무언가를 불러오는 마술적인 순간들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우선은'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만약에 그 마술적인 매력의 기원을 확인하고 싶다면 그때 알아보아도 늦지 않았다고 말이다.

어쨌건 우선은 접하는 게 중요하다. 감식안을 키우기 위해서는 늘 더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수많은 교양 예술서들이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렇게 감식안이 키워지고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 속에 숨겨진 의미를 알게 되면 세상은 그 사람에게 또 다른 문을 열어 보인다. 그러면 그 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래는 질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펴냄)의 인용으로, 다소 길지만 이외에 더할 말이 없으므로 그대로 옮기고자 한다.


프루스트는 그를 짓누르는 필연성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한다. 이는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을 연상시키거나 다른 것을 상상하도록 만드는 데 있어서의 필연성이다(마들렌은 우리를 콩브레로 보내고…). 그러나 어떤 것에서 그와 유사한 것으로 이어지는 이런 진행이 예술에서 얼마나 중요하든지 간에 이것이 예술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다. 우리가 한 기호의 의미를 어떤 다른 사물에서 찾는 한, 물질이 여전히 조금은 남아서 정신에 거역한다. 반대로 예술은 우리에게 참된 통일을 가능케 해준다. 하나의 비물질적인 기호와 하나의 완전히 정신적인 의미와의 통일 말이다. 본질이 예술 작품 안에서 드러나는 한, 본질이란 정확하게 이와 같은 기호와 의미의 합일을 일컫는다. 본질들 혹은 이데아들-소악절의 기호들 각각이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이것들이다(플레이아드 판 [스완], I, 349쪽). 이 본질들 혹은 이데아들이 소악절에 실재적인 현존을 부여해 준다. 이는 그 소악절을 (작곡한다기보다는) 재생하거나 구현하고 있는 악기나 소리와는 상관없는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기호들은 아직은 물질적인 기호들이다. 그 기호들의 의미는 늘 다른 [물질적인] 사물 속에 [감싸여] 있으며 완벽하게 정신적인 것은 아니다. 바로 여기에 삶에 대한 예술의 우월성이 있는 것이다.
예술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그 본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차이, 궁극적이고도 절대적인 차이이다. 존재를 구성하고 우리가 그 존재에 대해 사유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차이이다. 이런 이유로 본질들을 드러내 주는 예술만이 우리가 헛되이 삶 속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 즉 <삶에서, 여행에서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한 다양성>([갇힌 여인], III, 159)을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지각이 모든 고장pays들을 동일하게 만들어 버리므로 차이 있는 세계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말할 것도 없이 그 차이의 세계는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 세계는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존재한단 말인가? 뱅퇴이유의 칠중주는 바로 그렇다고 내게 대답하는 듯했다>([갇힌 여인], III, 277).

그러면 절대적인 궁극적인 차이란 무엇인가? 언제든 외부로부터 얻을 수 있는, 두 사물 혹은 두 대상 사이의 경험적 차이는 아니다. 본질이란 주체의 중심에 있는 어떤 최종적인 성질의 현존으로서, 주체 속에 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프루스트는 말했다. 이는 본질에 대한 가장 근접한 해명이다. 여기서 본질은 내재적 차이,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 속에 들어 있는 '질적인 차이', 예술이 없었더라면 영원히 각자의 비밀로 남게 되었을 차이>([되찾은 시간], III, 895)이다. 이런 점에서 프루스트는 라이프니츠주의자이다. 본질들은 진정한 모나드(단자)들이며 각각의 모나드는 각각이 세계를 표현하는 관점에 의해 정의된다. 각각의 관점은 그 자체가 모나드 내부의 궁극적 성질을 나타낸다. 라이프니츠가 말하듯 모나드는 문도 없고 창도 없다. 관점은 차이 자체이며, 동일한 것으로 가정된 하나의 세계에 대한 여러 개의 관점들은 서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들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각각이 서로 다르다. 이런 이유로, 우정은 결국 오해 위에 세워진 허구적인 의사소통 밖에 만들어 내지 못하며 가짜 창들만을 관통하는 것이다. 우정보다 현명한 사랑이 원칙적으로 모든 의사소통을 포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우리의 유일한 창문, 우리의 유일한 문은 완전히 정신적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예술적인 상호 주관성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헛되이 친구에게서 기대했고, 헛되이 애인에게서 기대했던 것을 오직 예술만이 줄 수 있다. <우리는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또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딴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에 관해서 알 수 있다. (…) 예술 덕분에 우리는 하나의 세계, 즉 자신의 세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증식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독창적인 예술가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무한 속에서 회전하는 세계들 어느 것과도 다른,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계들을 더 많이 가진다([되찾은 시간], III, 895-896).
-<프루스트와 기호들> 71~73쪽

나는 이 부분을, 이 부분만을 좀 더 쉽게 풀어쓰는 중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이 소설과 '예술'을 권유하기 위한 용도는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세월호가 침몰했고 나는 더 이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글을 쓰지 못했다. 이 소설은 갑자기 영웅서사처럼, 다다를 수 없는 세계를 감각하고 또 발견하고자 심미적으로 투쟁하는 벨 에포크적인 영웅의 일대기처럼 보였다. 노화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마저 이미 감정의 자장에서 벗어난 상태로 주인공의 사고 실험을 위한 소재로 사용되고 있었다. 모든 아픔은 지나갔다. 그저 이 탈색된 조각들을 짜맞춰 세계라는 웅대한 퍼즐을 완성하기 위해 나아가는 감상적인 탐정 또는 고고학자인 초인(또는 유령)이 있을 뿐이었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마들렌의 향기 위에서, 또는 향기보다 높은 차원에 있는 단자들의 네트워크 위에서 펼쳐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산화하는 피 냄새나 썩어가는 것들의 달큰한 악취를 제거함으로써 정화된 격리 실험실 같았다. 이 방대하고도 조밀한 의미의 그물망은 불가해한 동시에 불쾌한 것들은 논의하지 않는다(둘 중 하나만 해당되는 경우는 괜찮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에 효용의 질량을 재는 저울이 있어서 그 저울이 모든 사건을 측량한 뒤 각 사건들에게 합격 불합격을 선고하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불합격한 사건들, 함량 미달의 기억-존재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물론 이 상상은 세월호라는 강렬한 슬픔이 불러일으킨 감정적이고 편파적인 반작용이다. 작품에는 문제가 없다. 그저 실제 세계에서 벌어진 비극이 저 아름다운 소설에서와는 달리 그저 비참하고 불쾌했으며, 아직까지 어떠한 선善도 추론하거나 추동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참 평화 없어라. 그런 상황에서 선택받은 단자들의 네트워크에 대해 논할 수는 없었다. 대신에 나는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 글에 제목이 있다면 아마도 그저 <시간(이라는 것)을 찾아서>였을 것이다.

나는 프루스트에 대해 쓰다 만 글을 다시 쓸 수 있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대신에 회의가 찾아왔다. 며칠 뒤 프루스트에 대한 글은 지웠다.

프루스트에 대한 글을 지웠을 즈음, 나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예술을 이해하기를 권하는 '책을 파는' 일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니, 그 많은 사건들, 행복과 슬픔과 고찰과 추억들을 연결해 하나의 의미계를 구축하고 또 그것을 표현해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아니, 나는 예술이 대중들에게도 이해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다만 그런 날이 왔으면 하고 바랐을 뿐이다.

그리고 그 희망의 대부분은 기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 희망이 있어야 떳떳하게 책을 소개하고 팔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열심히 해 왔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였다. 나는 책을 권했고 그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그중 누군가는 이해하고 누군가는 발견할 것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이게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각자의 길을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모두가 예술을 이해할 필요도 좋아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윤리를 제외한 다른 많은 미덕들처럼 예술은 취향에 불과하(다고 받아들여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좋은 것이지만 굳이 권하지 않으며 이해해 주기를 요청할 수도 없다면, 그 좋은 것은 어디에 쓰이는 것일까. 예술에 대한 체계적인 학습과 훈련된 감각을 보유한 선택받은 사람들 바깥의 세계에서 예술은 어떤 모습으로 돌아다니고 있을까. 신전 속에서, 박제된 우상으로서 존재하지는 않았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고 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종의 관광 가이드였기 때문이다. 뭐, 그래. 관광에서 깨닫는 자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다만 그 확률이 매우 낮을 뿐인 걸.

어쨌건 좋은 책을 팔면 된다고 자신을 설득해 온 지난날들을 끝없이 되돌리는 한 달을 보내면서, 그렇게 속 편하게 책을 파는 데에만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애당초 추천의 출발점 자체를 재설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면서 동시에 권태로운 지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출발지와 도착지를 역전시켰어야 했다고, 나는 그제야 아쉬워했다. 예술을 소개할 때에도 당락을 결정하는 저울이 존재하지 않는, 낙오자가 발생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조건에 대해 고찰하면서 시작한다면 어떨까.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조건, 따라서 보편적이고, 그에 따라 귀납적으로 본질적인 특징을 지닌 조건 말이다. 누구도 제외하지 않는 일종의 종교적인 사랑.

나는 죽음에 대한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죽음을 이용하는 프로파간다는 당연히 제외되었다. '죽음을 소재로 한 예술'을 일별하고 소개하는 책들도 모두 제외했다. 이 경우는 죽음은 많이 보이기는 하되 그저 소재로만 쓰이기 때문이다. 조금 독특한 케이스로, 작가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죽음이 안겨주는 부재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작품 전체를 통해 은유로써 발산되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은 무척 아름답지만, 역시 제외했다(이 작품은 특별히 제목을 밝히고 싶다.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다).

좀 더 죽음 그 자체를 언급하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솔직하게 죽음을 둘러싼 슬픔에 대해 말하고 그 슬픔을 관찰하며, 너무 감정적이어서 그 인상이 본래의 주제-죽음-를 희석시키지 않는 책이 필요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죽음에 대한 보편론을 펼쳐 죽음의 형태를 강제하기보다는 사적인 기록일수록 좋을 것이었다. 죽음에 대해 말하되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의하지 않는 책, 그래서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 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고 각자가 자신의 장례복을 고를 수 있도록 하는 책. 즉, 가능한 많은 '단자'들을 위한 이야기라면 좋을 것이었다. 나는 C. S.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강유나 옮김, 홍성사 펴냄)을 골랐다.

▲ <헤아려 본 슬픔>(C. S.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홍성사 펴냄). ⓒ홍성사
<헤아려 본 슬픔>은 C. S. 루이스가 아내를 암으로 잃고 나서 쓴 일기 형식의 에세이다. 본문은 백 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다. 내용은 중구난방이다. 정확한 일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작성된 순서대로 원고가 배치되어 있어서, 루이스가 자신의 지난 기록을 읽고 부정하고 실망하는 장면들을 틈틈이 만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이 명확한 목적이나 계획을 가지고 쓰인 게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죽음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는 책이 아니어서 죽음이 수수께끼의 형태를 유지하는 보기 드문 사례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 루이스의 질문들은 집요하지만 그는 결코 그 해답의 윤곽조차 찾지 못한다.

<헤아려 본 슬픔>에서 미덕을, 좀 더 짓궂게 말해서 흥미로운 점을 찾자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슬픔은 게으른 것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다'처럼 인상적인 문구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무신론자들이 특히 반겨할 만한, 기독교 변증가가 울분에 차 제작한 멋진 함정들도 몇 가지 있다. 예를 들면 (욥이 그러했듯) 그 자신의 원죄로 인해 왜곡된 인간의 시선으로는 신의 뜻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면, 신의 미덕과 악덕이 인간에게도 그대로 미덕과 악덕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는 의문이다. 최악의 경우, 신의 지옥이 인간의 천국이고 그 반대 역시 가능하다면 인간은 무엇을 위해, 또는 '왜' 신을 믿어야 할까? 루이스는 질문한 뒤에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후에 덧붙인 원고에서 그런 질문을 던진 자신을 책망할 뿐이다.

대신에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의 기억들이 있으며

그녀의 임종이 다다랐을 무렵 나는 "당신이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허락된다면, 내가 죽을 때도 내 곁에 와 주오"라고 말했다. 그녀는 "'허락된다면'이라고요!"라고 말했다.
"천국에서 날 붙잡고 있으려면 애 좀 먹어야겠지요. 만약 지옥에서 날 붙잡는다면, 지옥을 박살 내 버리겠어요."
-<헤아려 본 슬픔> 105쪽

의외로 그 와중에 유머까지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니 나는 그분이 두렵지 않아"라고 말하는데, 이는 무슨 의미인가? 생전 치과에도 안 가 보았단 말인가?
-69쪽

그리고 추억들, 다시 만나지 못하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들, 어째서 무엇을 잃어버리는 고통이 인간에게 다가오는가에 대한 기독교인으로서의 고찰(내게 (…) 종교적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당신은 모른다'고 나는 의심할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슬픔의 형태, 그리고 그 달라지는 슬픔을 바라보며 이것이 나아감인지 아니면 후퇴인지를 가늠하지 못하는 한 남자의 혼란… 이 종잡을 수 없는 조각들이 <헤아려 본 슬픔>의 전부다.

루이스는 죽음에 대한 보편론을 펼치지 못한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절친한 친구가 죽었을 때조차 이런 슬픔과 분노를 느껴본 적이 없다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완전히 특별하고 독단적인 사건이라고 말한다. 완전히 하나 뿐인 현상으로 어떤 보편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오직 설명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소중함뿐이다. <헤아려 본 슬픔>은 모든 사랑이 그 미학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고, 설사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채 홀로 스러지더라도 그 당사자들에게는 다른 어떤 위대한 사랑보다도 부족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아니, 설명하지 못함으로써 증거한다.

비록 어떤 질문에도 응답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죽음은 수수께끼인 채로 남았지만, 루이스는 오히려 아무런 놀라운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은 오로지 둘 사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는 설령 천사가 들어오더라도 불청객에 불과했을 것이다. 루이스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체의 네트워크를 단절시켜 버렸다. 각자의 사랑의 크기에 따라 서로 다른 크기로 품어진 죽음들은 이미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것이다. 이들을 어떻게 서로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헤아려 본 슬픔>은 사랑을 보존하고 애도하기 위해 스스로 창문을 닫은 단자를, 점 하나를 보여준다. 아무도 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순간이 다가왔을 때 아무도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처럼.

이 홀로됨,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근 단자로부터 어떻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조화로운 우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예술을 소개한다는 것은 이런 방식이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예술에 대한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면, 아니 다른 무엇이라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시작 지점은 당연히 질문이어야 한다. 당신은 누구이며 무엇을 좋아하고 또 무엇을 아주 사랑하느냐는 질문이다. 고통과 한몸을 이루고 있는, 완전히 내밀한, 분리 불가능한 단자로부터 모험은 시작될 것이다.

… 판단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니다. 모두 추측일 뿐. 내 앞가림이나 잘할 일이다. 어쨌든 내게는 앞으로의 계획이 명백하다. 나는 가능한 자주 기쁜 마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갈 것이다. 나는 그녀를 웃음으로 맞이하기조차 할 것이다. 내가 그녀를 덜 애도할수록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멋진 계획이다. 불행히도 그렇게 행할 수가 없어서 탈이지만. 오늘밤에는… 슬픔이 지옥처럼 다시 입을 벌린다. 실성한 말들, 비탄에 젖은 후회, 위장의 울렁거림, 악몽 같은 비현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슬픔 속에서는 어떤 것도 '거기 머물러 있지' 않는다. 사람은 어떤 단계를 계속 벗어나지만, 그 단계는 언제나 되풀이된다. (…) 나는 그저 뱅뱅 돌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선형의 계단 위에 있다고 감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인가?

얼마나 자주, 언제까지나 계속 그럴 것인가? 얼마나 자주 그 광대한 공허감이 나를 새삼스레 덮쳐 오며 이렇게 말하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도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
-<헤아려 본 슬픔> 82~83쪽

여기가 우리의 그라운드 제로다. 모두들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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