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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언은 '세월호 참사' 주범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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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유병언은 '세월호 참사' 주범이 아니다 [세월호 100일] '침몰 사고' 이후 '몰살' 책임자는?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참변이 아니다. 연안 앞바다에 선박이 침몰하는 사고는 세계 어디에서나 있었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먼 바다도 아니고, 연안 앞바다에 침몰한 배에 수백 명이 갇혀있는데, 전국에 TV로 현장이 생중계되는 가운데 대부분이 사망했다는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다.

세월호 참사는 희생자 대부분이 안산 단원고 학생이라는 '집단적 동질성'에서도 심각한 트라우마를 남기고 있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중인환시리에 정부가 아무도 못 구한 사건'이다.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참사'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려는 듯 검찰과 경찰을 동원해 검거에 나섰던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은 영원히 사라졌다. '세월호 참사 100일'을 불과 이틀 앞둔 22일 "6월 12일 발견된 변사체가 유병언이 맞다고 과학적으로 확인됐다"는 경찰의 발표로 '세월호 참사의 실체 규명'은 공중에 붕 떠버린 느낌이다.

하지만 오히려 '유병언 시신 발견'을 계기로 사건의 실체 규명은 박근혜 정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왜 아무도 못 구했느냐는 점을 집중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세월호 참사' 100일을 맞아 되짚어본다면,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를 살펴보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 세월호의 출항을 허가한 당국과 세월호 침몰 전후로 보여준 의문투성이인 감시규제 당국과 구조 당국의 행태를 집중조명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100일이 되도록 희생자 가족들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철저한 진상조사를 위해 '독립적인 조사기구' 설치를 포함한 '세월호 특별법' 통과를 촉구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음은 세월호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를 거치며 다시 확인된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의문의 일지들이다.

세월호 참사를 유도한 듯한 당국의 대응 일지

-세월호 출항: 4월 15일 오후 9시 인천 연안여객터미널. 승객 및 승무원 476명 탑승-기상 악화로 다른 모든 선박의 운항이 중단됐지만 세월호만 예정시간 두 시간 뒤 출항 허가됐다. 감사원 감사 결과, 세월호가 출항하는 당일 어떤 상태에서 출항하게 됐는지 출항 일지 자체가 없어 확인할 수 없었다.

-세월호 침몰 시각 공식 기록: 16일 오전 8시 48분.

-탑승객에 의한 최초 신고 시각: 16일 오전 8시 52분. 단원고 2학년 남학생이 휴대전화를 이용해 전남 소방본부에 "배가 침몰한다"며 신고. 해경과도 3자 통화 이뤄짐. 하지만 해경이 최초 신고 시간으로 확정 발표한 시각은 오전 8시 58분.

-세월호가 관제센터에 침몰 사고 신고한 시각: 오전 8시55분. 세월호는 사고 해역 관할 진도 관제센터에 신고하지 않고 제주관제센터에 "본선이 위험하다, 지금 배가 넘어간다"고 신고.

-진도 관제센터가 세월호에 연락한 시각: 진도관제센터는 제주관제센터로부터 연락받고서야 세월호에 교신 시도. 오전 9시 7분에서 9시 38분까지 31분간 교신. 진도관제센터 "세월호가 침몰 중이냐?"라고 묻자 세월호는 "그렇다"고 응답. 9시 17분 세월호는 "50도 이상 좌현으로 기울어져 사람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 9시 38분에는" 배가 60도 좌현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보고.

-세월호 침몰 사고 현장 TV 중계 시각: 16일 오전 9시 30분쯤부터 세월호가 좌현 쪽으로 반쯤 침몰한 사고 현장이 TV로 전국에 생중계됨.

-해경의 구조활동: 9시30분경부터 구조활동 개시했으나 세월호에 갇혀있는 승객들에 대한 구조활동은 전무.

-이준석 선장 등 선박직 직원 15명 탈출 시점: 진도관제센터와 세월호 교신이 끝나는 38분 전후로 선장 등 선박직 직원들 탈출.

-승객 자체 탈출 시점: 오전 9시 40분경. 승객과 승무원 등 150∼160명이 세월호에서 뛰어내림. 해경은 자체 탈출한 승객들을 구조선으로 옮기는 활동에만 전념.

-탈출 안내 방송 시각 : 오전 10시 15분 탑승객에게 "뛰어내리라"고 안내 방송. 이전까지는 계속 "구조 기다리는 게 안전. 움직이지 말라"고 거듭 안내 방송. 해경의 '탈출 지시' 노력 전무.

-'전원구조' 헛소문 전파 시점: 4월 16일 오전 10시 27분 당시 단원고 행정실장이 경찰의 '2학년 1반 전원구조'라는 미확인 무전 내용을 '전원 구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아듣고 '헛소문' 퍼뜨림.

-'전원 구조' 오보 확산 시점: 4월 16일 오전 11시경 MBC의 최초 오보 등 다수의 매체들이 자체 확인 없이 '전원구조'라는 헛소문을 사실처럼 보도함. 경기도교육청 역시 보도만 믿고 확인 없이 출입 기자들에게 '전원 구조'라고 두 차례에 걸쳐 공지.

476명의 탑승자 중 자체 탈출한 생존자 172명 이외에 최초 실종자 304명 중 24일 현재10명은 아직 실종 상태이고 모두 시신으로 발견됐다. 10명의 실종자의 생존에 대한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다면, 302명 모두 고스란히 사망자라고 할 수 있다.
뉴스 보고 침몰 사고 인지한 청와대와 '8시간 행방묘연' 대통령

이제 따져볼 것은 304명 중 대부분을 살릴 시간이 충분했었다는 검찰의 첨단 시뮬레이션 '과학 수사' 결과나 감사원의 조사 결과를 고려할 때, 구조당국의 대응이 왜 이렇게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었느냐는 점이다. 그 책임도 이미 죽었다는 유병언 씨에게 떠넘길 수 있는 것일까?

구조 과정에서의 총체적 부실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묻는 조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구조당국은 사실상 구조하지도 않고 있는데, '전원구조'라는 허위사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까지 사실처럼 보고되었다. 청와대는 4월 16일 오전 9시 19분 YTN 보도를 보고서야 세월호 침몰 사고를 처음 인지했다. 또한 박 대통령에 서면보고한 10시 이후 중앙재난대책본부에서 박 대통령이 직접 방문하기까지 단 한차례도 대면보고가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대통령이 주재하는 비상회의도 열리지 못했다.
세월호 침몰 당일인 지난 4월 16일 오전 9시 30분경 해경이 '업무상 과실치사'에 해당하는 직무유기 상태였다는 것이 검찰의 과학수사로도 확인됐다. 세월호 참사로 빚어진 막대한 인명피해가 해경의 구조 활동만 기본적으로 이뤄졌어도 초래되지 않을 수 있었다는 희생자 가족들의 항의가 검찰의 판단으로도 인정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5월 19일 세월호 참사 관련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던 중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의 '잃어버린 8시간'이 진상규명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2014.7ⓒ연합뉴스

당국의 은폐 의혹들

-여전의 의문으로 남은 세월호 침몰 시각: 16일 오전 8시 48분이 세월호 침몰 공식 시각이다. 하지만 국립해양조사원의 '항행경보(제14-155호)'에 나타난 시각은 그 이전이다. 항행경보에는 "16일 오전 8시 30분경 전남 진도 부근 해상에서 인천에서 제주로 항해 중이던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 중이며, 세월호에는 수학여행 학생 등 승객 471여 명이 탑승 중이니, 인근 해역을 항해 중이던 선박과 어선은 조난구조에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혀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잃어버린 8시간': 수백 명이 갇힌 채 침몰하는 대형사고를 청와대가 방송을 보고서야 인지한 오전 9시 19분부터 박 대통령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직접 방문한 오후 5시15분까지 8시간 동안 박 대통령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경호상 비밀'로 묻혀있다. 대통령 일정은 사전에는 비밀이어도 특별한 일정이 아니라면 사후에까지 밝히지 못할 비밀이 아니다.

-대통령의 직무태만이냐 청와대의 허위 보고냐: 박근혜 대통령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보를 방문했을 때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300명이 넘게 배 안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박 대통령은 마치 모두가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 뛰어들었다고 보고받은 듯, 첫 질문이 "구명조끼 입었다고 하는데 발견하기 힘듭니까"였다.

"갇혀 있기 때문에 구명조끼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는 안전행정부 2차관의 답변에 박 대통령은 "아, 갇혀 있어서요?"라고 반응했다. 청와대가 침몰 사고를 방송을 보고서야 알았다고 해도 그 후에 상황파악을 해서 제대로 보고할 시간은 8시간이 있었다. 그때까지 유선 및 서면 보고가 스무번 이상 있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중대본을 찾을 때까지 아무 것도 몰랐다.

-세월호와 진도관제센터(VTS) 사이 교신기록 은폐· 편집 의혹: 세월호와 진도VTS 간 교신에 대해 당국은 처음에 아예 기록 자체가 없다는 입장이었으나 지난 4월 20일 뒤늦게 교신기록을 공개했다. 하지만 녹취 파일에 부분적으로 덮어쓰기를 해서 원래의 소리를 지운 흔적이 있다는 소리공학 전문가의 분석이 KBS에 의해 보도되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다. 실제 교신 기록의 처음 2시간 가량을 지금도 은폐하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세월호가 진도 해역에 진입한 시각은 오전 7시 8분이지만, 진도 관제센터와의 첫 교신은 2시간 뒤인 9시 6분이다.

선박은 관제센터 관할구역에 들어서면 관제센터에 신고해야 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관제센터에서 몇 분 내에 연락을 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처음 두 시간 동안의 교신 기록도 있어야 한다는 것.

-구출 활동 외면한 해경: 사고 현장에서 해경이 하는 구조 활동은 바다에 뛰어든 탑승객들을 건져 올리는 일 뿐이었다. 매뉴얼은 선내 수색이 기본으로 되어 있다. 제일 먼저 사고 현장에 도착한 해경은 선박으로 올라가서도 선내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구명벌 펼치는 데만 온힘을 쏟았다. 그런 행동을 고스란히 담은 동영상이 해경이 구출활동 자체를 외면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검찰 조사에서 해경 헬기와 경비정은 16일 오전 9시 30분께 도착했으며, 탑승객이 카카오톡을 통해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시간은 10시 17분으로 최소한 47분의 여유가 있었다.
해경이 세월호에 도착한 9시 30분에는 선체가 45도밖에 기울지 않았으며 해경이 직접 선내에 들어가 마이크로 승객들에게 탈출 안내 방송을 하거나 승객을 안내만 했어도 전원 구출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세월호 침몰 사고를 300여 명의 '몰살 참사'로 악화시킨 정부 당국의 대응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고 '모든 게 유병언 탓'으로 돌려버리는 또다른 '참사'가 빚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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