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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축복과 정치적 모험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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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축복과 정치적 모험의 선택 [김민웅의 인문정신] 정치혁명의 시대를 갈망하며
몰락을 통한 재생, 가능할까?

패배와 몰락은 재생의 기초다. 재기불능의 지점까지 철저하게 무너진 뒤에 오는 깨우침은 벤야민이 말했듯이 “사리의 기초에 도달하는 인식”이다. 그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경험이자, 새로운 모험을 향해 갈 수 있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2014년의 7. 30 보궐선거는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박근혜 정권의 무능과 불통, 그리고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새누리당의 멸시와 오만에도 불구하고, 야권의 전멸로 확정되었다. 이러한 극한의 하강사태는 사실 이미 예견되었던 것이기에 충격은 그리 크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 야권은 몰락의 충격을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까?

문제는 언제나 “교정능력”이 있는가에 있다. 문제점이 벌써 다 노출되었고 정치적 판단과 결정의 궤도를 바꾸라는 요구가 있었음에도, 새정치 민주연합의 김한길-안철수 대표체제는 이를 철저히 무시하고 말았다.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박근혜 못지않은 불통과 정치적 판단의 미숙함이 자초한 결과였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중심이 된 지도부의 책임은 막대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도부의 움직임에 대해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방향설정을 요구하지 못한 새정치 민주연합 소속의원과 당원들의 책임 또한 심각한 수준이다.

시민들은 야당이 분명한 전투력을 가지고 대여투쟁에 나설 것을 기대했으며, 유리하게 조성된 정세를 반영할 수 있는 움직임을 요구했다. 그러나 제1야당은 다부지고 끈질긴 근성도 보여주지 못했고, 내부적으로는 민주적 숙의과정을 통한 결정을 내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도 실패했다. 이렇게 된 것에는 구 민주당과 새정치 연합의 통합과정부터가 기형적이었던 탓도 있고, 안철수의 새정치가 내용이 비어 있는 채로 공허한 구호로 방치된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된 것도 이유가 된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으로는 야당이 왜 정치를 하는지에 대하여 날이 갈수록 오리무중이 되게 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정치는 왜 하는가?

세월호참사가 국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했다면, 야당의 무기력과 무능은 이들이 왜 정치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묻게 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가 야당은 이해할 수 없게도 국민들을 위해 정치적 모험을 해야 하는 순간 계속 머뭇거렸고, 장애물에 대한 돌파의지도 강하게 과시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두고 새누리당 소속 의원들이 “교통사고 운운”했는데도 새정치민주연합의 김한길-안철수 두 대표가 아무런 분노와 반응도 보이지 않은 것을 두고, 단식투쟁하던 같은 당 의원들이 허탈해하면서 속을 끓였던 것도 모두 이러한 예에 해당한다.
강력한 전투의지를 가진 야당은 정치 전반을 긴장하게 만들고 민심이 이를 주목하게 하는 동시에, 집권세력의 행동방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김대중-김영삼-노무현 등으로 회상되는 지난 시기의 정치에서 이들은 정치적 모험이라는 선택을 통해 국면을 바꾸어 냈으며, 새로운 동력을 창출하는 계기를 스스로 주도해나갔다. 그것은 하나의 격변을 일으키는 드라마로서의 기능을 하면서 우리 사회에 예기치 않은 경험을 하도록 하고, 그것을 통해 미래형 담론을 확산시키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김한길-안철수 두 지도부는 교착상태를 뚫고 나갈 무게 있는 선택에 대한 고뇌도 없었고, 무한책임의 심도를 가지고 정치적 열정을 뿜어내지도 않았다. 그런 상태의 야당에게서 누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으며, 다음 장면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관전이라도 하겠는가? 세월호 참사라는 끔찍한 비극이 벌어졌는데도 이에 대해 필사적으로 매달려 정치의 근본을 바꾸어내려는 의지는 별로 없고, 선거 구도를 짜는 것도 옹졸하게 했으니 이런 야당에 대해 질타와 정치적 응징이 내려지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치는 언제나 변화를 지향해야 한다. 그 어떤 기존질서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며 교정의 대목과 여지가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변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은 국민적 차원의 동력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러자면 여기에는 모험에 대한 용기가 필수적이다. 기계적 관성이나 공학적 판단은 이러한 모험의식을 훼손시키고 만다. 책임과 긴장이 고강도로 심화되는 정치에서 절박한 선택과 그에 대한 의미 있는 평가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르게 되는 결과가 실패라고 해도 그 실패는 높은 평가를 받는 성취로 전환될 수 있다. 이런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른바 “정치적 야성(野性)”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은 매우 거칠게 나오고 있는데도, 이에 대응하는 야당의 자세는 어느새 개별적 안락을 추구하는 순치된 정치세력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정치적 모험의 의미

그것은 고도성장 시대를 누리면서 정치적 역동성을 잃어버린 일본사회에 대해 “혈색은 좋으나 죽어 있는 사회”라고 했던 후지따 쇼오조오(藤田星三)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제자인 그는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이라는 저작을 통해, 모험적 경험을 하려들지 않는, “안락에 대한 예속 상태”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경험 속에서는 사물과의 만남, 충돌, 갈등에 의해 자의(恣意)의 세계는 동요하고 균열이 일어나며 희망적 관측은 흔들리고 욕구는 혼돈 속에 내던져져 그 혼돈이 초래하는 괴로운 시련을 거치면서 욕구나 희망이 재편되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말한 “경험”이란 의도와 결과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피하지 않는 고통에 대한 선택을 의미한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정신적 가치가 단련되고 지향점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길이 확보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말은 야당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중요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권력의 논법에 대해 꾸준히 비판을 제기하면서, 그 비판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모험을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야당은 정치적 존립의 근거를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채로 권력의 동원 체제는 강화되어가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제동력은 소실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학 입문(A Grammar of Politics)>에서 해롤드 라스키(Harold Laski)가 오래 전 갈파했듯이 권력은 거의 언제나 파시즘 또는 전체주의의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치는 그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발언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진정한 정치는 마비되고 만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자본은 권력의 협력을 통해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를 관철할 수 있는 구조를 별 저항에 직면하지 않은 채로 관철해나간다. 이런 식으로 정치가 기력을 잃고, 민주주의의 동력이 약화되면 동원 체제를 강화하는 권력의 파쇼화는 대중의 정치적 좌절과 혐오를 바탕으로 진행되어나가고, 보통 사람들의 경제적 안전은 날이 갈수록 위협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권세력은 끊임없이 이루어낼 의지도 없는 약속을 만들어내면서 대중들을 현혹하고 권력에 대한 이들의 비판과 저항의식을 소멸시켜나가기 마련이다. 결국 보통사람들의 사회적 불행이 지속, 심화되고 마는 것이다.

야당의 정신적 퇴폐와 정치혁명

안철수는 지난 4개월의 대표직을 통해 이른바 “압축경험”을 했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이러한 발언에는 정치적 책임의 무게를 전혀 볼 수 없다. 우리의 정세는 정치적 아마추어인 그에게 압축경험을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그의 압축경험이 우리의 정치적 미래에 의미 있는 자산이 될 수 있는지도 분명치 않다. 그가 해야 할 말은, 자신의 미숙과 착오 그리고 오만이 가져온 정치적 참사에 대한 깊은 반성과 사과를 책임 있게 밝히는 일이었다. 그를 비롯한 야당 지도부의 정치적 착오가 가져온 문제를 지고 희생적으로 지고 가는 것은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은 문자로 밝힌 사퇴였다. 이것은 야당의 책임자로서 국민에 대한 비례(非禮)일뿐만 아니라, 그의 장래에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은, 고통을 직면하고 이를 용기 있게 감내하는 정신구조가 그에게 부재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에게만이 아니라 일부 극소수를 제외하고 야당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적 퇴폐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그것은 야권 전체의 혁명적 재편이다. 사람들의 기대와 요구를 받아 안지 못하는 정당은 대의정치를 파산시키고, 권력으로 하여금 전체주의적 지배의 유혹에 빠지도록 할 뿐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위기이자 정치 자체의 존폐여부가 갈리는 상황이 된다. 바로 이러한 국면에서 재기불능의 몰락을 경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게 된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진보세력에게 이 끝없는 침몰의 현실은 더더욱 의미심장하다. 박근혜 정권 등장 이후 정치가 야권에게 말하고 있는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각자의 정체성을 존중하되 힘을 합치라는 것, 둘째 전투력을 강화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요소를 기반으로 무엇보다도 미래비전을 확실히 보이라는 주문이다.

이것은 정치혁명을 향한 투철한 의지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지금 무엇보다도 당장에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하고 이후의 대책을 논의할 수 있는 정치가 붕괴될 위험이 전면화 되고 있다. 집권세력은 진상규명의 정치적 절차를 봉쇄전략으로 대응하고 있으며, 이번 선거결과는 그러한 추세를 더더욱 강화해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 그리고 이것을 지켜낼 수 있는 정치를 만들어 내는 일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정치의 책무다. 국가개조와 혁신을 부르짖으면서 책임의 소재를 불분명하게 만들고, 새로운 동원 체제를 만들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 집권세력 앞에서 야권은 사즉필생(死卽必生)의 각오로 임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몰락을 장래의 축복으로 바꾸는 것은 정치혁명의 고통을 두려움 없이 껴안고, 지금 이 땅에서 고난을 겪는 이들과 하나가 되려는 절실한 의지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큰 판을 벌려 새로운 통합의 중심을 세워나가는 광폭(廣幅)의 담대함과 정치적 모험의 선택은 우리의 정치를 급속하게 비평형상태로 만들어나갈 것이다. 노벨 화학상을 받았던 일리야 프리고진이 말했던 것처럼 비평형상태의 혼돈에서만이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창조된다. 그 혼돈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적 전투력에서 우리의 희망이 탄생할 것이다.

이제 우선 먼저 할 것은, 세력을 가리지 않는 야권전체의 집결과 시민사회가 함께 하는 비판적 대 토론이다. 오늘의 현실에서 야권은 모두가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이지 독자적 생존의 힘을 가진 개별정치세력이 아니다. 정치의 복원은 이 과정에서 보다 강도 높은 긴장을 통해 이루어져나갈 것이다. 미적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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