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참사: 존엄(尊嚴)과 연대(連帶)
현지시각으로 2012년 3월 13일 저녁 스위스 시에르 주 부근에서 버스가 터널 벽과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벨기에 탑승객 52명 중 28명이 사망했으며, 이중 22명은 11~12세 어린이였다. 생존자 24명 또한 모두 어린이로, 이들 역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후 벨기에 사회의 대응은 여느 때처럼 진지하고 엄숙했다. 디루포 총리는 사고 다음 날 아침, 현장에 도착해 비트머 슐룸프 스위스 대통령과 기자회견을 열고 "가장 적절한 대응"을 약속했다. 국왕 알베르 2세(Albert II) 내외는 공군이 현장에서 송환한 시신을 직접 맞았으며, 총리와 국방부 장관 등과 함께 피해자 가족을 만나 위로했다.
벨기에는 '3월 13일'을 국가적 추모의 날로 선포했으며, 언론은 사고 희생자 가족의 슬픔을 무리하게 보도하지 않았다. 롬멀(Lommel)과 루뱅(Leuven)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수천 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사고 희생자 28인의 죽음은 엄숙하게 다뤄졌으며, 언어·종교·정치적 차이를 넘어 온 국민이 함께 애도했다.
2012년 당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나는 벨기에의 이 같은 대응이 별로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생명이 희생된 비극적 상황에서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고 위로하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4년 4월 16일 이후 한국 사회가 대형 참사를 다루는 방식은 벨기에와 사뭇 달랐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세월호 참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대형 참사에 대한 대응이 평소에 한 사회(문화)가 공유하는 정신적 가치 즉, 사람과 생명, 가족과 이웃을 보는 관점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라는 문제의식으로, 벨기에에서 겪은 일상적 경험담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과 타인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벨기에 사람은 불친절하다?
내가 살고 있는 루뱅(Leuven)은 인구 10만의 소도시지만, 대학교가 있어 매년 많은 한국인 이 방문한다. 벨기에에 처음 도착한 한국인과 대화를 나눌 때 자주 등장하는 주제가 있다. 바로 한국과 벨기에의 (소위 말하는) '문화적 차이'.
한국인 상당수는 한국의 '투철한' 서비스 정신을 칭찬하며, 벨기에 사람들은 서비스 정신이 없고 뭐든지 느리며 불친절하다고 불평한다. 가장 흔한 사례는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이다. 식당에 들어가 1~2분도 채 되지 않아, 주문을 완료할 수 있는 한국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벨기에 식당의 느린 서비스에 당혹감을 느끼곤 한다. 자리에 앉은 지 10분이 지나도록 주문을 할 수 없는 경우가 흔하고, 그 편리한 '테이블 위 호출 버튼'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대적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식사를 주문하는 문화적 방식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둘째는 소비 위주 문화의 부끄러운 민낯, 즉 돈이 매개됐을 때 형성되는 권력관계에 대한 분석이다.
첫째, 한국과 벨기에의 문화적 차이는 다른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행동방식이 고유의 리듬에 익숙하지 않을 때 발생할 수 있다. 음식을 주문하는 과정은 원칙적으로 두 주체가 서로를 대면하는 과정이다. 손님은 종업원에게 몇 명이 왔는지 알리고, 안내받은 자리에 앉는다. 메뉴판을 가져다주면 식사와 음료를 선택한다. 종업원은 주문을 확인한 후, 요리를 가져온다. 음식을 다 먹은 손님은 음식 값을 낸 후 나가면 된다. 언뜻 보면 간단하지만, 서유럽 문화권에서는 사실 꽤 복잡한 과정을 요구한다.
르페브르가 '가상의 리듬(Rythmes fictifs)'이라고 부른 무언(無言)의 제스처(어떤 몸짓, 눈빛, 손짓)에 익숙하지 않을 경우, 서로 오해를 할 수도 있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식으로 큰 소리로 멀리 있는 직원을 부르거나, 종업원이 먹은 그릇을 정리하기 전에 계산하려고 벌떡 일어선다면 무례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핵심은 바로 상대방의 얼굴을 마주 보고 눈을 마주쳐야 한다는 것이다. 눈을 마주치는 것은 "내가 당신을 인격적으로 대우합니다"라는 느낌을 전해준다. 벨기에 사람들은 건배할 때에도 서로 눈을 마주치며 한다. 독살이 흔하게 일어나던 시절, 서로의 음료에 독을 넣지 않았다는 신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풍습은 다른 상황에서도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문제는 한국인 손님이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무조건 탓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한국인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한국인은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다. 지하철에서는 누군가에게 발을 밟히거나 어깨를 부딪쳤을 때 얼굴을 보고 서로 사과하기보다는 거리를 둔 채 눈을 피하는 경우가 많다. 미묘한 차이지만,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벨기에 사람들도 눈을 마주하고 턱을 살짝 잡아당겨 미소를 으로 간단하게 목례하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다. 문을 열며 지나갈 때 뒤에 따라오는 사람도 지날 수 있도록 문을 잡아 주고 그 사람이 감사 인사를 할 수 있게 그의 얼굴을 잠시 봐주는 것, 좁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을 때 목례를 나누는 것, 물건을 살 때 눈을 보고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눈을 마주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눈을 마주 본다는 것은 필수적으로 쌍방향이 전제되는 상호작용이다. 타인의 눈을 바로 바라보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나의 눈을 보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찰라(刹那)지만, 그 과정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서로에게 공간을 내어준다. 눈을 마주치는 그 순간 발생하는 공간은 '공통의 공간'이며, 동시에 서로의 개인성과 인간성을 확립시켜주는 장소다.
그렇다면,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는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그것은 어쩌면 '영혼 없는' 존재로 대해도 상관이 없는 사이 즉, 사람이 목적이라기보다는 거래와 이득이 목적인 관계일지도 모른다.
독일의 사회학자 게으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은 <돈의 철학>(The Philosophy of Money, 1900)에서, 돈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질적' 가치를 갖고 있지 않는다고 말했다. 돈의 가치는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가격 형성에 의지하며, 가격을 매개한 교환 행위를 통해 '질적' 가치를 획득한다. 짐멜은 동시에, 돈이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고리대금업이나 금융업처럼 '돈이 돈을 벌 때' 즉, 돈이 소비와 교환의 수단이 아니라 생산의 수단으로 기능할 때 돈은 그 자체가 목적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한 사회가 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그 사회에서 돈을 매개하는 사람들의 관계 양상이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벨기에 식당에서 종업원과 대면하는 방식은 한국과 다른 사회적·문화적 인식의 차이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벨기에에서는 확실히 돈으로 매개하는 관계도 조금은 더 수평적인 느낌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돈은 상하관계의 위계가 철저하게 형성되어 있는 편이다. 돈이 돈을 버는 사회에서 돈은 사람보다 먼저인 셈이다.
'투철한 서비스'의 불편함이 있는 곳, 한국
한국인의 탁월한 '서비스 정신'이 불편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많은 노동자는 다중의 착취 관계에 놓여 있다. 일차적으로는 소비자와 노동자 사이의 지배-피지배 관계라는 불균형이, 이차적으로는 자신의 노동력을 구입하는 고용인과 지배-피지배 관계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당일 배송'을 약속했기에 밥 먹을 시간, 화장실 갈 시간, 잠잘 시간을 포기하며 뛰어야 하는 한 택배기사를 상상해보자. 이들은 퇴근도 없이 업무에 치여, 밤 11시에도 배달을 한다. 고객의 입장에서는 이 같은 상황이 '편리함'으로 다가오겠지만, 택배기사의 경우 과도한 업무량과 고객의 '불편 신고(클레임)'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특히 이 같은 상황이 회사 측의 부당 처우를 바탕으로 한다면, 한국의 트철한 서비스 정신은 자랑할 만한 것이라기보다는 부끄러운 것이 된다. 나의 편리함은 누군가를 착취하는 것에 기반 하기 때문이다.
돈으로만 매개되는 관계는 '하나의 개인'과 '또 다른 개인' 사이의 인격적 관계라고 할 수 없다. 갑과 을이라는 이름은 객관성만 가질 뿐이기 때문이다. '을'은 얼굴이 없는 하나의 '항(項)'에 불과하다. "내 돈 내고 내가 하겠다는데"와 같은 태도로 거드름을 피울 때, 상대는 물론 본인도 얼굴 없는 객관적 대상으로 전락한다.
불편함의 대가는 행복?
다른 북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벨기에의 시간은 조금 느리게 흐른다. 자동차 수리를 맡기면 몇 주가 걸리고, 인터넷 신청도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 시청에서 거주증을 발급받기 위해서 몇 달을 기다려야 하며, 모든 상점은 저녁 6시에 닫는다. 일요일에는 패스트푸드점과 일부 카페를 제외하고 영업하는 곳이 없으며,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에는 아예 도서관이나 공공기관까지 문을 닫아 버린다.
소비자 입장에서 당연히 불편하다. 하지만 이 같은 사회-정치적 환경은 더 많은 사람이 여가를 즐기며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적 고민 끝에 탄생한 것이다. 이를 알고 나면, 이 정도 불편함은 감수할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 벨기에 법정 근로시간은 주당 38시간이며, 2006년을 기준으로 연간 노동시간은 1461시간이다.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 2261시간과 비교하면, 800시간이 짧다. 그에 비해 임금은 연간 4만5401달러로, 한국의 2만5379달러에 비해 두 배가 많다. 적게 일하고 많이 받는 듯 보이지만, 벨기에 생산성은 한국에 뒤지지 않는다. OECD 34개 회원국 중 벨기에의 노동생산성은 5위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은 23위다. GDP 대비 벨기에의 사회복지 지출은 30%가 넘으며(한국은 10.95%), 그 중 아동복지 지출은 2.8%(한국은 0.8%)이다. 1900년부터 시작된 노령연금의 또한 안정적이다. 복지와 노동환경 덕에 인간다운 삶(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여행, 스포츠, 예술에 관심을 쏟을 수 있는 환경 등)이 보장된다, 다만, 아주 조금 불편할 때가 있을 뿐이다.
'살고 살게' 해주는 삶
대형 참사를 대하는 한 사회의 태도는 어떤 특별한 계기보다 평소에 서로를 얼마나 존중하는 사회였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가정으로 이 글을 시작했다. 우리 사회에 희망이 없다는 자조적 비판이 흔한 요즘, 희망은 '형제의 정신'을 가지고 공존하는 삶을 꾀하는 것 아닐까.
불편함을 조금 감수하더라도, 이웃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것. 그리고 그 공간을 통해 얼굴을 마주 보고 눈을 마주치는 것. 나의 행복만큼이나 타인의 행복을 위해 사는 사회, 나의 고통만큼이나 타인의 고통을 아파하는 사회, 한국 사회가 그렇게 얼굴을 마주 보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벨기에 노동시간, 평균 임금 및 노동 생산성: //stats.oecd.org/mei/default.asp?lang=e&subject=11&country=BEL- 앙리 르페브르, 리듬 분석 (정기헌 역, 갈무리, 2013)- 가스통 바슐라르,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 (정영란 역, 문학동네, 2002)- <돈의 철학> (게오르그 짐멜 지음, 김덕영 옮김, 도서출판 길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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