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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도서관이고 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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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마을이 도서관이고 학교다" [마을주의자]<16> 곡성 남양리 '마을선비' 김재형
마을은 늘 밖으로 열려있다. 사람은 태어난 고향마을에서만 평생 살지 않는다. 산 높고 물 깊은 옛날에야 태어난 마을에 살다 죽는 시절이 있었다. 현대에는 그렇지 않다. 누구나 거주이전의 자유가 보장된다. 주로 일터에 매달려 유목민이나 난민처럼 살아가는 도시는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농사공동체의 뿌리가 깊은 농촌도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농촌공동체, 농사 두레공동체가 점차 붕괴, 소멸하고 있다. 안정되고 지속할 수 있는 정주기반으로서 농촌의 사회적 효능과 가치가 줄어들고 있다. 정처로서 마을공동체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걱정이다.

이렇게 어느덧 농촌에서도 자본과 기계가 이웃과 경험을 대신하고 있다. ‘돈 버는 농업’을 추구하는 이익사회(Gesellschaft)'가 ‘사람 사는 농촌’을 염원하는 공동사회(Gemeinschaft)를 자꾸 대체하고 있다. 그럼에도 농토가 생명이자 전 재산인 농부들은 마을을 떠날 수 없다. 조상이 살던 그 땅에서 살다 그 땅으로 돌아가는 걸 인간의 숙명이자 도리로 생각한다.

하지만 땅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농촌의 소농, 일반주민들이야 좀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굳이 특정한 농지나 주거지에 매달릴 이유가 크지 않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마을 안에서만 가두면서까지 자생과 자립의 활로를 찾는 작업은 쉽지 않다. 근본적으로 고정되고 제한된 배타적 공간에 본디 자유로운 인간의 몸과 마음을 묶어두는 건 그다지 자연스럽지도 않다. 생활인으로서 최적의 생활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

이쯤에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사는 마을 안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지 않다면 마을 밖으로 눈을 돌리는 게 옳다. 우리 마을과 남의 마을 사이에 담을 쌓을 필요가 없다. 다른 마을과 협동하고 연대하는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마을과 마을을 엮는 권역공동체, 권역과 권역을 묶는 지역네트워크를 함께 기획하고 구축해야 한다. 농촌의 마을과 도시의 마을을 잇는 도농교류, 도농상생의 프로그램도 개발해야 한다.

이때 단지 농사를 잘 지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물학적인 기대수준은 뛰어넘는 게 좋겠다. 교육, 의료, 문화, 예술까지 엮고 묶고 있는 전인적인 대동사회의 네트워크를 창조하고 건설해야 한다. 그렇게 사는 곡성을 벗어나 보은으로, 고흥으로, 영암으로 마을공동체의 씨줄과 날줄을 잇는 선도적 사례가 있다.

▲ 김재형 씨가 교장을 맡고 있는 선애대안 학교의 영화제작실습 야외 수업 모습. ⓒ정기석

마을은 책 읽는 도서관이다

"곡성이 사는 마을이죠. 어디에 있든 그 마을은, 그 집은 제게는 삶의 근원적인 뿌리와 같아요. 전기도, 수도도 없어요. 두 아이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고요. 인간과 자연의 날 것 그대로를 지키려는 원초적이고 순정한 삶의 터전인 셈이죠. 지금은 대외적으로 선애학교 교장 노릇을 하고 있고, 몸은 선애빌 생태마을과 선애학교가 있는 보은으로, 고흥으로, 영암으로 건너다니느라 곡성의 마을과 집만 지키고 있지 못하지만 말이죠."

곡성의 죽곡농민열린도서관장으로 세간에 잘 알려진 김재형 씨(50). 2001년에 곡성으로 귀농해 살고 있고 여전히 본가는 곡성 남양리에 있지만, 요즘 곡성에 머무르는 시간은 많지 않다. 도서관장 자리에서 물러나 ‘다른 마을’에서 대안교육과 생태공동체마을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에 푹 빠져있다. 선애빌 생태마을에서 꾸리는 대안학교 선애학교 교장 노릇을 맡으면서다. ‘다른 마을’의 일이지만, ‘남의 일’이 아니다. 곡성의 '자기 마을'에서 하던 것처럼,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다른 마을, 우리 마을' 일에 매진하고 헌신하고 있다. 본인이 좋아서, 하고 싶어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하기 때문이다.

▲녹색당원으로서 녹색당 농민모임에 참석한 김재형 씨. ⓒ정기석
그런데, 죽곡 농민열린도서관을 빼놓고 그의 삶을 온전히 설명하는 건 어렵다. 도서관 문을 연 2004년 이후 10여 년 동안의 삶이 무미건조해진다. 그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도서관은 제가 아니라 죽곡면 농민이 만든 거죠. 그것도 자발적으로. 구체적으로 곡성군농민회 죽곡면 지회에서 만든 ‘농민문고’가 모태예요. 1만 원, 2만 원씩 형편이 되는대로 후원금도 내고 집에 있던 헌책도 다투어 들고 나왔죠. 하지만 처음에는 도서관을 어떻게 운영할지 걱정이 많았어요. 기우였죠. 하다못해 청소는 누가 할지, 서로 지혜를 모으는 과정이 감동적이었어요. 가히 ‘자발성에 기초한 문화 운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어요.”

그는 지역에 문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책을 볼 수 있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고, 바둑, 장기를 둘 수 있고,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악기를 연주해 볼 수 있고, 차를 마시며 작은 모임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그런 생각이 쌓여 도서관으로 변한 것이다.

그는 경상도 사람이지만 전라도 농부가 되고 농민운동가가 되었다. 전라도는 귀농의 터전이다. 경상도 농촌이나 전라도 농촌이나 모두 그가 보살피고 보듬어야 할 활동공간이다. 출생지나 지역 연고는 그에게 큰 의미가 없다. 어디서든 늘 '농촌에서 어떻게 하면 자발성을 일으킬 수 있을지'에 고민을 집중하고 있다. 농촌에서 농민운동을 하면서 ‘스스로 일어나는 힘’인 자발성을 일으키는 게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국 ‘오랫동안 조금씩 변화를 일으키고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방법 말고 다른 도리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그대로 묵묵히 실천했다. 농민 운동이 꼭 정치활동 성격만 가져야 하는 건 아니고 문화 활동도 중요한 조직 운동이 될 수 있다는 나름대로 실천방법도 체득했다.

농민도서관 문을 연 데 이어, 죽곡 마을시집을 펴낸 것도 그 실천의 결과다. 본인의 문학소년 시절 아득한 기억을 되살려 문집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문집을 만드는 사회적 흐름은 이미 없어졌고, 농민들은 아예 글을 쓰지 않고 시를 잊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마을시집을 만들고 싶었다.

농민들과 공부도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로 돌아가면서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정도였다. 그런데 성에 차지 않았다. 이런 정도로는 힘이 모이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욕심이 생겼다. 오랫동안 하나의 가치에 기반을 두고 공부를 꾸준히 이어가는 규모 있는 강좌를 면소재지 마을에서 할 수 있다면, 그 정도만으로도 얼마든지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새로운 상상을 불러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판단이 서자 역시 실천을 주저하지 않았다.

마을은 공부하는 학교다

2010년에 농민인문학 강좌를 개설했다. '매달 한 명 기준으로 지명도가 있는 지식인을 초대하고, 농민이 중심이 되는 자발적인 강좌 기획'을 기본 개념으로 설정했다. 강사는 지역 주민이 자유롭게 추천할 수 있다. 이른바 보수에서 진보를 가리지 않는다. 정파, 지위고하를 불문한다. 그동안 보수의 끝에는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 진보의 끝에는 백무산 시인이 놓을 수 있겠다.

도시의 대학이나 연구소를 방불케 하는 다양한 지식과 품격 있는 사유의 스펙트럼이 전라남도 산골의 일개 면소재지에 펼쳐졌다. 어느덧 농민인문학 강좌는 공부라기보다는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의 문화축제처럼 자리 잡았다. 곡성의 농민, 주민에게는 어색하거나 부담스럽지 않다.

"개인적으로 농민인문학 강좌를 10년 동안은 유지하고 싶어요. 10년이라는 시간은 많은 것을 상징해요. 의미가 있어요. 정성스러움의 단위이기도 하고,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시간이기도 하죠. 10년 동안 정성을 들이고 나면 그 사회는 다른 단계로 도약하는 변화가 시작된다고 봐요. 그 전에 이미 살았던 죽은 삶을 다시 살지 않아도 되는 거죠."

김 씨가 그리는 마을의 미래상은 한마디로 ‘공부하고 시를 쓰는 농촌 마을'이다. 이게 현실이 된다면 지식인은 대학을 자기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농촌을 자기 기반으로 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는 “사회적 변화는 이런 지식 사회의 변화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며 “지식인이 농촌 마을을 기반에 두게 되면 그 사회는 생태적 사회로 전환된다”는 확고한 신념과 전망을 가지고 있다.

"마을 운동과 사회적 변화가 만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를 항상 고민합니다. 마을과 학교가 함께 역할을 분담하거나 공유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마을은 자급과 자치를, 마을 학교는 사회적 변화와 전망을 말이죠. 요즘 선애마을과 선애학교에 온 마음을 다하는 이유죠."

▲조한혜정교수와 '마을공동체, 마을학교'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김재형 씨. ⓒ정기석

선애학교는 김 씨가 오랫동안 꿈꾸었던 학교 모델이다. 선애마을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마을 학교이자 명상을 중심에 둔 영성학교이다. 나아가 동아시아 네트워킹 학교이다. 이곳에서 그는 공동체 마을 아이들을 중심으로 한 실험을 꾸준히 하고 있다. 그동안 경험했던 어떤 교육 과정보다 학생들의 집중도, 성취도가 높다는 자평이다. 그도 역시 만족스럽다.
그는 대안학교를 통해 사람이 ‘교육으로 이렇게 변할 수 있구나’ 하는 걸 계속 깨닫는다. 왜 그렇게 많은 교육 운동가들이 마을을 기반에 두고 교육을 하고 싶어 했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오늘날 한국 농촌 마을 대부분이 마을 공동체의 가치를 잃었다. 그 마을 속에서 교육적 실험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그런데 선애마을은 다르다. "생태 공동체의 가치로 만든 마을이고, 그 마을을 기반으로 교육하는 과정에서 삶과 교육의 연결이 가능한 상태"라고 그는 선애학교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진보적 지식인들이 나서 선애학교를 도와주면 좋겠어요. 우선 학부모 입장에서 자녀를 보내기도 하고, 후원을 해주기도 하고. 강의를 맡아주었으면 바래요. 마을이 가는 어려운 길에, 생명평화의 미래까지 더불어 준비하는 그 힘든 여정에 동참해주셨으면 해요."

김 씨는 교장이나 훈장이라는 말보다 ‘선비’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그 자신도 동의한다. 남을 가르치려 들기에 앞서 먼저 배우고 깨우치는 실천을 게을리하지 않으려는 자세다. 어쩌면 한 권의 동양고전과도 같은 삶의 방식으로 비친다. 흔들리거나 흐트러지지 않는 삶을 몸소 보여주면서 ‘교육행위’를 대신하려 애쓴다. ‘마을 선비’ 같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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