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주변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이러한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복지이다. 올해 세 모녀 죽음을 계기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지만, 현실이 그만큼 나아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새누리당, 기초생활보장제를 민생법안이라 홍보하지만…
지난 몇 년간의 사건·사고들을 보아도,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여전히 사회보장정책에서 주변에 머물고 있다. 최근에는 기초생활 수급 노인에게 기초연금을 '줬다 뺏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복지가 시민, 학계, 정부 모두의 주된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수의 국민은 본인과 밀접한 관련이 없기에 도외시하고, 학계 역시 보편적 복지를 강조한 나머지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이슈화하는 노력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정부 역시 다른 복지 제도들보다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뒷순위에 두어 왔다. 그로 인해 세 모녀 죽음과 같은 사례들이 이어져 왔다.
최근 새누리당이 민생법안이라며 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을 홍보하고 있다. 기초생활보장 급여체계를 개별급여로 전환하면서 마치 대단한 개혁인양 과시하지만 정작 기초생활보장제가 안고 있는 근본 문제, 즉 부양의무자제, 추정 소득, 재산의 소득 환산 등 수급 자격 기준에 대해선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선 지난번 내만복 칼럼이 기초생활보장제도 개편의 핵심은 개별 급여체계가 아니라 '수급 선정 기준의 개선'이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관련 기사 : "박근혜표 기초생활보장법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사회적 재분배의 토대, 기초생활보장제도!
이번 글에서는 수급 선정 기준을 개선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좀 더 근본적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사회정책(복지정책)은 사회적 재분배(사회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정책이다. 그중에서도 공공부조는 다른 여타의 사회보장제도들과 달리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회적 분배가 가장 일차적으로 실현되는 토대다.
그럼에도 사실상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사회적 분배가 잘 작동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쌍방적 교환을 기본으로 하는 원리가 작동한다. 즉 일한 만큼 세금을 내고, 그 세금이 다시 복지 혜택으로 돌아오는 '교환'의 원리가 성립된다. 그러한 예가 바로 사회보험이고, 이는 매우 권리성이 강한 제도이다.
그런데 공공부조제도는 부유한 사람의 세금이 가난한 사람에게 복지 혜택으로 증여되는, 이른바 일방적인 '이전(transfer)'의 원리에 의해 운영된다. 이 때문에 사회적인 부(富)를 재분배받아야 할 권리가 가난한 사람에게는 약해진다. '교환'의 원리에 부합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점은 공공부조가 가장 취약한 권리 기반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지나치게 혹독한 보충성, 자조, 열등 처우 원칙
가난한 사람에 대한 취약한 권리는 공공부조가 지니는 기본 원칙에서 더욱 여실히 드러난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대신 몇 가지 장치를 둔 것이다.
첫째, '보충성(보족성)'의 원칙이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그들이 가진 것을 확인한다. 즉, 가난한 사람이 보유하고 있는 자원들(가족, 소득, 재산, 근로능력 등)이 무엇이 있을지 파악하고 그러한 자원들을 우선적으로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조건을 두었다.
둘째, '자립 자조'의 원칙이다. 부를 소유한 사람의 자원이 가난한 사람에게 이전되는 것이 당위적인 것이냐는 질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조건(근로 동기)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전제조건이 부여된다.
셋째, '열등 처우'의 원칙이다. 복지 혜택을 주되, 일하는 하층 노동자보다 많지 않도록 기준을 설정하였다. 즉, 가난한 사람 중 근로능력이 있으면 일할 수 있도록 하되, 그들의 급여는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의 급여보다는 적게 하려 했다. 이는 복지혜택을 받지 못하는 하층 노동자들에 대한 형평성을 전제한 것이다.
우리의 공공부조인 기초생활보장제도에는 이러한 원칙들이 모여 있다. 열등 처우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보충성 및 자조의 원리가 적용되는 보충급여제도이다. 그런데 이러한 원칙들이 지나치게 혹독하게 적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가난한 사람의 취약한 권리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어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현재 최저생계비는 최저임금을 적용한 근로자들의 급여보다도 훨씬 적은 금액이다. 2014년 기준 1인 가구의 최저생계비는 약 60만 원이다. 2014년 기준 최저임금을 월급으로 환산하면 약 109만 원이다. 열등 처우의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최저생계비는 적을 수밖에 없다손 치더라도, 무려 50만 원 차이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자신의 주거 전세금을 활용하고 또한 가족이라는 자원에 의존해야 하는 '보충성(가족부양책임)'의 원칙, 일할 능력이 있으면 일을 해야만 하는 '자조'의 원칙이 지나치게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수급자가 받을 급여 수준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 즉 간주부양비, 추정 소득, 재산의 소득 환산액 등이 무리하게 적용된 후 보충적인 급여만 지급된다. 최저생계비도 낮지만 '가공의 소득을 만드는 소득인정액' 제도로 실제 급여액은 매우 낮은 수준으로 전락한다. 이로 인해 제도 내에 편입하지 못하는 비수급 빈곤층이 발생하고, 가난한 사람의 취약한 권리조차 지키지 못하게 된다.
수급 선정 기준의 개선은 부정 수급을 낳는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 선정 기준에는 이러한 독소 조항들이 존재함에도, 왜 개선되지 않는 것일까? 이른바 도덕적 해이를 낳게 된다는 '부정 수급'의 문제가 그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일할 수 있음에도 일하지 않고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은 부정한 것이다." "자식이 타워팰리스 사는데, 그 집에 사는 노인이 수급권자가 되는 것은 부정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재산이 있다면 그것은 가난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재산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라."
사실 이러한 이야기들은 틀린 말이 아니다. 공공부조제도의 원칙을 적용한 것이다. 부정 수급을 방지하기 위해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추정 소득, 간주 부양비, 재산의 소득 환산액 등 방어기제를 만든 것이다. 문제는 자조와 보충성의 원칙을 극대화해 독소 조항 수준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러한 규정들이 폐지되거나 개선된다면 일정 부분 부정 수급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위 부정 수급에 해당하는 자들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이러한 정치적 슬로건들을 이용하여 지나치게 가혹한 독소 조항들을 가동하고 있는 것이 현재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가장 큰 폐해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 프레임을 바꿔야 할 때
우리 사회는 그동안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이야기할 때 '부정수급 방지'라는 프레임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가치가 따로 있다.
첫째, 최저생활 보장의 원칙이다. 이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일차적 목적이자 사회보장제도의 철학에서 가장 지켜져야 할 핵심이다. 최저생활 보장은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생활유지에 있어 최소한의 필요 급부를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현행 제도에서는 낮은 최저생계비 기준 및 각종 독소 조항으로 최저생활 보장을 달성하기 어렵다. 정부 개편안 역시 최저생활 보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탈수급에 초점을 두고 있어 제도의 일차적 목적은 사라진 지 오래다. 예산 제약형 기초생활보장제도만 존재할 뿐이다.
둘째, 보편성의 원칙이다. 다른 여타의 조건 없이 빈곤하다고 인정되면 누구나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보편성을 확립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실질 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함에도 여타의 방어기제들을 존치시킴으로 인해 가난한 사람을 배제하고 있다.
셋째, 사회적 연대성의 원칙이다. 사회적 연대성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의 유기적 생활 속에 빈곤이 발생하는 원인을 개인의 몫으로 방치하지 않고, 사회적 요인에 기인한다고 이해하여, 빈곤에 대한 책임을 공동으로 부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빈곤관에 기인한 사회적 연대성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됨에 따라 일차적인 사회안전망의 기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부양 의무자제 및 재산의 소득환산제 등 개인의 자원과 자산을 충분히 활용하길 강요한다. 여전히 빈곤의 책임을 국가보다 개인에게 우선시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취약한 권리기반을 갖고 있으며 부의 일방적인 이전을 통해 가난한 사람을 구제한다. 비용 부담의 주체인 중산층은 자산 조사가 엄격하게 적용되길 원한다. 여기에 급격한 복지 지출의 확대를 우려한 경제부처들의 압박은 재정 부담의 회피 및 조세 인상 회피를 운운하며 프레임을 선동한다. 사회적 연대성이 지켜지기 어려워진 것이다.
넷째, 온정적 간섭주의(paternalism)의 원칙이다. 흔히 부모와 자녀의 관계,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지칭할 때 온정적 간섭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부모가 자녀의 행복을 위해서 자식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강요하듯이, 당사자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타인의 선을 증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가난한 사람이 빈곤에 대한 그들 스스로 혹은 타인으로부터의 낙인감이 발생함에도 이들의 최소한의 삶을 유지해주기 위해 국가가 간섭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그러나 수많은 비수급 빈곤층의 발생과 세 모녀 사건과 같은 극단적 사고들은 바로 온정적 간섭주의 정신이 올바르게 적용되지 못했음을 반증한다.
이상의 원칙들은 기초생활보장제도에 매우 중요한 가치임에도 그동안 지켜지지 못했다. 그 이유의 핵심은 가혹한 수급 선정 기준에 있다는 점이다. 이제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최저생활 보장, 보편성, 사회적 연대성, 온정적 간섭주의 등이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핵심 원칙으로 존중돼야 한다. 이때의 초점은 비수급 빈곤층이고, 핵심 의제는 수급 선정 기준의 개선이 될 것이다. 그래야만 취약한 권리 기반을 가진 공공부조의 태생을 극복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과 함께하는 연대'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한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품위 있게 일용할 양식을 얻고 자기감정을 돌보는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대화는 (중략) 다른 이들과 함께 더 큰 이해와 우정, 연대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 말씀을 귀담아들었다면, 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부터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는 연대'를 실현해보는 것은 어떨까.
가난한 사람이 최후에 기댈 수 있는 기초생활보장제도, 지금은 이 최후의 보루조차 필요한 이들에게 허용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광범위한 비수급 빈곤층이 그대로 잔재한다는 것은 기초생활보장제도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삶의 보장과 부정 수급이라는 부정적 인식 사이에 힘겨운 줄다리기 싸움 위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보충성과 자조를 강조해온 그동안의 기초생활보장제도가 가난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어떤 가치에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할까. 부정 수급 프레임을 벗어나 가난한 사람에 대한 복지 권리를 확보하는 것, 특히 비수급 빈곤층을 줄여나가는 것을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 그리고 우리 모두의 관심과 의지에 달려있다.
* 내만복 칼럼은 필자가 참여하는 팟캐스트 <만복라디오>에서 상세히 논의됩니다. 지난번 칼럼을 들으세요. (☞바로 가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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