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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주먹 분노케 한 대통령과 회장님의 은밀한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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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전설의 주먹 분노케 한 대통령과 회장님의 은밀한 거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73> 한일협정, 열한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덟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일협정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65년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했다. 그러나 그 후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상대방을 잘 이해하면서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맺어왔는지는 논란거리다.

서중석 : 한일협정 체결 이후 한일 관계가, 국교 정상화를 했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된 한일 관계냐 하는 것이 지금까지 크게 논란이 돼왔다. 정치인 김대중은 "한일 우호 관계는 두 나라 정부 간의 우호 관계 이상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이게 정곡을 찌르는 지적 아니겠는가. 상당 기간 동안 그랬다. 정부 간 우호 관계였을 뿐 두 나라 국민 사이의 우호 관계는 있지 않았다. 문화 교류 같은 것이 활발하긴 하지만, 두 국민 사이의 우호 관계 문제는 지금도 그렇지 않나.

김대중이 그렇게 이야기했고, 강상중과 현무암 이 두 교수가 쓴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라는 책의 머리말을 보면 도쿄대 교수였던 강상중 세이가쿠인대학교 학장은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라는 두 인물을 통해 만주국과 전후의 일본, 그리고 해방 후 한국의 연속성에 주목했다." 이 책을 쓴 의도가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전후의 일본과 한국이 어떻게 만주국과 연속성을 갖는가, 이 이야기다.

일본 내 만주 인맥의 향수와 박정희의 향수가 정부와 정부만이 관계를 갖는 그런 한일 관계를 만들어낸 것 아니겠는가. 한일 관계가 이렇게 된 데에는 만주 인맥의 대일본제국과 연결된 한국에 대한 향수,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등이 예전에 품었던 긍지 어린 향수 같은 것도 관계된 것 아니겠는가. 친한파, 반한파에 대해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친한파라고 불린 이들은 일제가 만주 침략, 중국 침략을 할 때 중요한 활동을 한 사람들이고 일제 패망 이후에도 대일본제국 '경영' 문제에 계속 신경 쓰던 사람들이다. 기시 노부스케건 고다마 요시오건 야쓰기 가즈오건 만주 인맥을 중심으로 쭉 보면 그렇다. 고다마 요시오는 기시 노부스케와 같은 형무소에 있으면서 서로 지기(知己)가 됐다고 하는데, 이미 1950년대부터 이 사람은 한국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고다마 요시오는 박 정권으로부터 수교 훈장도 받는다.

만주 인맥 이 사람들은 한국의 분단 강화를 통해 남한과 북한을 제어하고, 한반도 역량을 약화해 일본에 긴박하고자 하지 않았나. 그걸 통해 대일본 경제 또는 대일본 속에 한국을 위치시키려는 활동을 주로 한 사람들 아닌가. 그러면 이건 반한파지 어째서 친한파라고 할 수 있는 건가.

반한파는 1960년대에 사용된 말은 아니고 1970년대 유신 체제 때 많이 사용됐다. 김지하가 구속되고 김대중이 납치되자 이들은 김대중과 김지하 구출 운동, 석방 운동을 치열하게 벌이면서 유신 체제를 비판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한국의 인권에 관심을 가졌고, 1970년대에 활동할 때에도 이미 과거사 문제에 대해 심도 있게 반성, 비판, 사죄를 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야스쿠니 신사 참배, 전쟁 국가화 움직임, 그래서 개헌하려고 하는 것 등에 반대했다.

1990년대 언젠가부터 이 사람들의 인상이 바뀌어 갔다. 한국의 민주주의에도 관심을 보이면서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일본의 잘못된 모습을 비판하는 좋은 사람들이라는 인상으로 바뀌어 갔다. 특히 2000년대에 한국에서 그런 경향을 보여주지 않았나. 그러면서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의 글도 언론에서 많이 실어줬다. 와다 하루키도 1970년대부터 활동했다. 이처럼 친한파, 반한파라는 말은 박정희 정권 당시 한일 관계의 일그러진 면, 잘못된 부분을 잘 보여준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남한을 하위 생산 기지로 만들려 한 일본과 심각한 대일 무역 역조

프레시안 : 한국 경제가 일본에 예속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많았다.

서중석 : 한일 관계에서 제일 크게 논란이 된 것은 경제 문제였다. 정치적으로 한국을 침략한다는 이야기는 잘 안 나왔고, 문화적인 얘기가 조금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경제 관계를 갖고 애기했다. 1960∼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할 만한 징표가 사실 많이 있었다. 그래서 계속 경제 관계를 걱정하는 걸 볼 수 있다.

1970년 서울에서 제2차 한일경제협력위원회 총회가 열렸는데, 일본 국책연구회 간부이자 한일 관계의 막후 인물인 야쓰기 가즈오가 여기서 '한일 장기 경제 협력 시안'을 발표했다. 여기에 일본 측이 구상한 한일 경제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야쓰기 가즈오는 자국의 노동 집약적 산업과 철강, 조선, 석유화학, 전자 공업 등 사양 산업을 남한에 이전하고, 그에 더해 일본의 관서(関西, 간사이) 경제권과 남한의 포항 이남 남해 공업 지대를 연결할 것을 제안했다. 한국의 값싼 노동력과 땅을 이용해 남한을 하위 생산 기지로 만들겠다는 속셈이었다. 야쓰기 가즈오의 시안에는 합작 회사에서 노동 쟁의를 금지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도 담겼다. 이 마지막 부분도 바로 실현됐다. 수출 자유 지역에서 노동 쟁의를 사실상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지 않나.

('야쓰기 구상'으로 불리는 이 시안에는 수출 자유 지역, 그리고 관세 부과를 보류한 상태에서 수입 원료를 가공하는 보세 가공 지역을 확대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도 있었다. 1960년대에 일본 경제는 중화학 공업 과잉 투자와 공해 산업 문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공해 산업을 한국에 떠넘기고 한국을 하청 기지로 만들어 과잉 투자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 야쓰기 구상이다. "협력 내건 하청 눈독"(1970년 4월 24일 자 <동아일보>) 등으로 표현하며 야쓰기 구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언론 등에서 바로 나왔다. 그러나 이 구상은 박정희 정권에 하나의 돌파구로 다가갔다. 경공업 중심 발전 전략이 한계에 부닥치고 차관 기업들의 부실 문제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러 정권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던 상황에서 벗어날 출구로 여긴 것이다. '편집자')

제일 많이 얘기하는 게 무역 관계다. 한국의 대일 무역은 1965년에 수출 4500만 달러, 수입 1억7500만 달러였는데 10.26사건이 일어나는 1979년에는 각각 33억5300만 달러, 66억5700만 달러가 된다. 수출도 늘어나지만 수입과 수출이 33억 달러 차이, 꼭 2배 차이가 나는 걸 볼 수 있다. 한국의 무역 적자가 대부분 대일 무역 적자 때문에 생기고 그것이 한국 경제와 외환 수급을 굉장히 어렵게 한다는 지적을 끊임없이 받았다.

한 자료에 의하면 1966년에서 1984년 7월까지 19년간 한일 무역을 보면 한국이 약 300억 달러의 무역 역조를 보였다. 이 기간에 한국의 총 무역 적자의 75퍼센트, 총 외채의 약 4분의 3을 차지했다. 일본은 상당히 오랫동안 과도한 수입 규제 정책을 썼다. 무역 관리령이라든가 수입 할당제, 수입 승인 제도, 수입 사전 확인제, 수출 자율 규제, 차별 고율 관세 등을 통해 한국의 수출을 상당히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무역 역조가 한국 경제의 큰 장애물이었고 이를 어떻게 시정할 것인가가 고민거리였다.

그와 함께 '한국의 기술과 기계, 그중에서도 특히 기계 부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품은 일본에 종속되는 것 아니냐', 한때 이런 우려가 많았다. 자동차 같은 경우 1990년대까지도 제일 중요한 부품은 일본에서 수입했다. 한국산업기술협회가 1996년에 한 연구를 보면, 1962년부터 1995년까지 기계류 분야에서 한국의 기술 수입 중 58.6퍼센트가 일본에서 왔고 자본재와 중간재 수입을 포함하면 이 비중은 더 높아질 것이라고 돼 있다. (이와 관련, 10.26사건 직전인 1979년 10월 4일 자 <동아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1978년 대일 무역 적자의) 85퍼센트가 기계류 무역 역조로 나타났다. (…) 산업 기계 수입의 70퍼센트가 대일 의존이기 때문에 중화학 공업화에 따른 산업 기계 수입의 확대가 우리나라 전체 무역 역조와 대일 무역 적자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로부터 10년 넘게 지난 후에도 이 문제는 걱정거리였다. 1991년 8월 15일 자 <한겨레>는 "1980년부터 1990년까지 기계류의 대일 무역 적자는 총 340억 달러에 이르렀다"며 경제 예속을 우려했다. '편집자')

▲ 박정희 대통령과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1977년 9월 29일). ⓒ연합뉴스


한일 관계에 나쁜 물을 들인 검은 유착과 박정희 정권

프레시안 : 한국과 일본의 특정 세력들을 끈끈하게 이어준 검은돈 문제도 심심찮게 불거졌다.

서중석 : 이런 한일 간의 경제 관계 같은 것에 또 일정한 선(線)들, 그러니까 고다마 선, 기시 선 같은 것이 작용했다는 점에서도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게 파이프라는 건데, 예컨대 기시 선에는 세 개의 파이프가 있었다고 한다. 일본 자본이 한국에 진출하는 경우 이런 것과 연결됐다.

한일 국교 정상화가 되기 전부터, 그러니까 5.16쿠데타 직후부터 보세 가공이 많이 있었다. 일본 자본이 초기에 한국에 진출한 대표적인 방식이 보세 가공인데, 이런 보세 가공을 주로 주선한 사람이 유가와 고헤이라는 인물이다. 이 사람은 1936년 2.26사건 때 혁신계 장교로 가담한 군국주의자라고 한다. (1962년 3월 8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유가와 고헤이는 황도파 장교들이 일으킨 2.26사건 때 경시청을 점거했던 반란군의 지휘관이었다고 한다. 쿠데타를 주동한 장교들이 처형될 때 유가와 고헤이는 한 귀족의 청원으로 사면을 받았고, 석방 후 이름을 바꾸고 활동했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편집자') 나이 차이는 많이 났지만 박정희 의장과 옛날 일본 육사 동창이었다. 동창이라는 걸 내세우면서 박 의장 등 거물을 만났는데 1961년 이토 상사, 그리고 일제 때도 한국에 진출한 유명한 회사인 오노다 시멘트, 도쿄은행 등 23개 사 중역들과 함께 내한하고 그랬다.

보이지 않는 이런 손들이 한일 경제 관계에서 작용하는 속에서 검은 유착이 생기고 검은돈이 왔다 갔다 하는 것 아닌가. 그중에서도 2000년대 들어 크게 화제가 된 게 6600만 달러 건이다. 2004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미국 CIA 특별 보고서를 발견하면서 불거진 검은 유착이다. 1961년부터 1965년 사이에 6개 일본 기업이 각각 100만 달러에서 2000만 달러씩 총 6600만 달러를 민주공화당에 지원했다는 내용이다. 이와 관련해 'CIA가 파악한 게 이 정도다. 이건 전체 액수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하는 주장도 있다. 1964년 3월 김준연 의원이 '박정희 정권이 일본으로부터 1억3000만 달러를 받았다'고 폭로했는데, 당시 구체적인 것을 제시하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CIA 문서를 공개한 후 김종필 측은 "그럴 리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며 의혹을 부인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의 정치 자금과 관련된 검은 유착 의혹은 이것만이 아니다.

서중석 : 이 검은 한일 관계와 관련해 제일 이야기가 많이 나온 게 지하철 리베이트였다. 1970년대 초중반에 서울지하철 공사를 할 당시 리베이트 문제였다. 서울지하철 수주 경쟁과 리베이트 수수설 등 검은 뒷거래 얘기가 많이 나왔다. 또 예컨대 화력 발전 플랜트 도입을 둘러싸고 일본 상사 간에 암투가 일어났을 때에도 한일 관계 리베이트 문제가 거론됐다. 어쨌건 1970년대 초 일본 차관 도입과 관련해 말썽이 된 최대 의혹 사건은 서울지하철 부정이었다.

이상우 씨가 쓴 것에 의하면 여기에는 미쓰이, 미쓰비시 등 4개의 일본 대기업이 개입했는데, 민주공화당 자금줄로 불리던 김성곤 등이 관련됐던 것으로 나온다. 1971년 4월에 이 4개 상사의 연합 측이 1차로 120만 달러를 김성곤이 지정한 미국 체이스맨해튼 은행의 뉴욕 지점에 불입하고 그 후 몇 차례에 걸쳐 더 불입한 것으로 나온다. 이 서울지하철 리베이트 문제가 들통 난 것은 당시 일본의 지하철 차량 가격하고, 한국에 팔았다고 하는 가격이 너무 큰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국내 가격은 차량 1대당 3204만 엔이었는데, 한국에는 6350만 엔에 판 걸로 돼 있다.

아까 6600만 달러 의혹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당시로서는 참 대단한 액수 아니었나. 한일협정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무상'으로 받은 게 3억 달러밖에 안 되는데, 그것의 5분의 1이나 되는 엄청난 액수였다. 이게 정치 자금화해서 권력 쪽으로 넘어갔다고 하면 그건 대단한 것이다. 또 차관을 도입하면 그 차관을 경제 발전에 100퍼센트 써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5퍼센트 정도를 정치 자금으로 다 뗐다고 한다. 기업이 이윤을 5퍼센트 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그걸 다 박 정권이 먹어버렸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 정권은 욕을 얻어먹어야 한다. 앞뒤가 다른 소리를 한 것이다.

(1968년 <신동아>는 차관 관련 의혹을 보도했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신동아>는 그해 12월호에서 박정희 정권이 차관을 국내 기업에 배정하는 과정에서 일부 재벌에 특혜를 줬고 그 대가로 여당이 검은돈을 받았다는 등의 내용을 심층 보도했다. 이렇게 5퍼센트 커미션설 등을 보도하자 중앙정보부는 반공법을 내세워 <신동아> 측을 압박했다. 차관과 정치 자금의 연관성을 보도한 부분에 반공법을 적용한 것은 중앙정보부의 월권이라고 <신동아> 측에서 반박하자, 중앙정보부는 그해 10월호 <신동아>에 실린 기고를 문제 삼아 <신동아> 간부들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편집자')

나라를 발칵 뒤집은 '한비' 밀수 사건과 청와대-삼성의 힘겨루기

프레시안 : 1966년에는 삼성 재벌 관련 사건이 터져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 역시 한일 간의 검은 거래 문제와 이어져 있었다.

서중석 : 검은 거래와 관련된 사건들이 끊임없이 있었는데, 그중 제일 크게 충격을 준 사건이 바로 한비(한국비료) 밀수 사건이라는 것이다. 1966년에 일어난 사건 중에서 이게 제일 컸을 것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1966년이 퍽 조용한 해인 셈이었는데 그해에 이 사건으로 아주 시끄러웠다. 이것 때문에 학생 데모까지 일어나고 그랬다.

삼성 측이 미쓰이물산 차관으로 울산에 3만 톤 규모의 요소 비료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게 한국비료 공장이다. 한비라고 불렸다. 여기서 사카린 밀수가 있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에 의해 이걸 다뤄야 하는데, 벌금 징수라는 가벼운 처벌로 끝났다. 1966년 5월에 있었던 이 일을 4개월 후인 9월 15일에 <경향신문>이 처음 터트렸다. 그러면서 이병철의 차남 이창희가 구속됐다. 국회에서는 총책임자인 이병철도 구속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큰 파동이라고 할까 충격을 불러일으킨 것은 오물 사건이다. 한국독립당으로 당선된 김두한 의원이 9월 22일, 국회 등에서 이 문제를 갖고 시끄러울 때였는데, "부정과 불의를 합법화하는 이 국회를 용서할 수 없고 관계 장관들은 부정부패를 합리화한 피고로서 사카린 맛을 봐야 한다"면서 오물을 살포해버렸다. 김두한 의원은 "선혈의 얼이 담긴 파고다공원 공중변소에서 퍼왔다"고 했는데, 어쨌건 이게 정통으로 맞았다. 당시 정일권 총리, 장기영 부총리, 민복기 법무부 장관, 박충훈 상공부 장관의 옷을 몽땅 버리게 했다고 한다. 이날 저녁 전 국무위원이 사퇴를 결의하고 일괄 사표를 냈다. 김두한 의원은 자진 사퇴를 했는데, 모 기관에 끌려가서 아주 심하게 당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몇 년 후 세상을 떠났다. 일제 말부터 1950년대에 걸쳐 시라소니, 정치 깡패 이정재와 함께 오랫동안 한국 주먹을 대표하던 분이고 국회의원을 두 번이나 했는데 마지막에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모 기관에 갔다 오고 얼마 후 죽었다. 그렇게 오래 못 살았다. (김두한은 54세이던 1972년 세상을 떠났다. '편집자')

이 사건과 관련해 납득이 안 가는 게 또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내각 일부를 개편하고, 삼성 측에는 한비를 건설한 후 국가에 바치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1966년 9월 27일 한국비료 공장을 예정대로 건설하라고 지시하고, 11월 10일에는 "이병철 씨가 한비를 국가에 헌납한다고 말했으므로 헌납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편집자') 이 시기에 정부 말을 기업이 안 듣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대통령이 직접, 공개적으로 이런 얘기를 한 것 아닌가. 그래서 장기영 부총리가 삼성 쪽에 몇 차례 간 걸로 돼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에는 장기영 부총리가 이병철 삼성 총수한테 큰소리를 치고 이병철 총수 쪽에서는 약하게 나오고 그래야 할 것 같은데, 그와 반대되는 정황 같은 것이 나온다.

하여튼 이 시기에도 삼성은 상당히 오랫동안 버틴다. 1967년 10월까지 버틴다. 그러다가 결국 주식의 51퍼센트를 헌납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당시 신문을 보면 '51퍼센트라는 것에 정부에서 불만이다. 국가에 바치라는 건 전체를 바치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는 않았다. 일부 언론에서는 사카린 밀수 사건과 관련해 그것만 밀수한 게 아니라 변기, 전화기, 표백제 등 제3의 밀수가 있다고 했는데, 더 이상 논란이 되지는 않고 묻혔다.

(한국비료 헌납 문제를 두고 박정희 정권과 삼성은 힘겨루기를 했다. 1966년 9월 헌납 의사를 밝혔던 이병철은 그다음 달 장기영 부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한비 주식 51퍼센트의 헌납 확약을 한 사실도 없으며 (…) 각서도 자의에 의해 작성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부총리를 몰아붙였다. 그 후에는 "주식을 26.2퍼센트밖에 내놓을 수 없다"는 식으로 버텼다. 박 대통령은 "이것은 분명히 정부를 우롱한 것"이라고 분개하며 1967년 10월 3일 장기영 부총리를 전격 경질했다. 그로부터 8일 후인 10월 11일 이병철은 주식 51퍼센트를 헌납하고 운영권도 정부에 넘기겠다고 물러섰다. '편집자')

이 사건은 또 장준하 구속을 불러왔다. 장준하는 1966년 10월 15일 민중당이 주최한 '특정 재벌 밀수 규탄 대회'에서 "재벌 밀수를 막지 못한 죄는 바로 대통령에게 있다",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이게 허위 사실을 유포한 것이라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장준하를 구속했다. (대구에서 열린 이 행사에는 3만5000여 명의 청중이 모였다. 구속영장 내용을 보도한 1966년 10월 26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장준하는 "박정희란 사람은 우리나라의 밀수 왕초다",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는 것은 박정희 씨가 잘났다고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베트남에서 흘릴)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편집자') 장준하는 다음 해 총선에서 옥중 출마해 당선됐다. 이렇게 수많은 파란을 몰고 왔는데, 그런데도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 2013년 2월 19일, 서강대 캠퍼스에 걸린 연극 '한강의 기적 - 박정희와 이병철, 정주영' 현수막 아래로 학생들이 지나가는 모습. ⓒ연합뉴스


밀려난 후계자 이맹희가 증언한 박정희와 이병철의 은밀한 거래

프레시안 : 한국비료 밀수 사건은 삼성의 후계 구도에도 영향을 끼친다.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 이병철의 큰아들 이맹희가 훗날 펴낸 회고록은 세간의 관심을 모은다.

서중석 : 이 사건의 진상이라고 할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이맹희가 나중에 구체적으로 밝힌다. 이맹희는 1993년 <묻어둔 이야기>라는 회고록을 내는데, 여기에 구체적인 이야기가 들어 있다. 앞에서 한일 간 검은 유착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나. 이맹희는 한비 건설에도 당연히 리베이트가 있었다고 썼다. 당시 미쓰이가 공장 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면서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건넸다는 것이다.

이 회고록을 보면, 이병철이 정치 자금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이런 리베이트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린 것으로 돼 있다. 박 대통령은 여러 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며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문제는 현찰 100만 달러를 일본에서 들여오는 게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 않나. 삼성은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돈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릴 겸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일이 진전된 것이다. 밀수를 하면 100만 달러가 아니라 그 몇 배가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맹희 자신이 밀수를 현장에서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이를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밀수하기로 결정한 다음에 삼성 측에서는 정부도 모르고 있던 몇 가지 욕심을 채우기로 한 것이다. 평소에 들여오기 힘든 공작 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었다. 이맹희는 그와 함께 자신들이 밀수한 주요 품목이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리스판이었고 거기에다 사카린 원료를 같이 들여왔다고 밝혔다. 사카린 밀수는 부수적인 것이었다. 냉장고, 에어컨, 양변기 같은 것들이 당시 한국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들여오면 몇 배로 팔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회에 이런 것들까지 들여오자고 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쓴 걸 보면, 일본에서 이를 들여와 국내 시장에 팔면 4배 정도의 돈을 모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고 한다. 당시 밀수 총액은 한화로 10억 원인데, 현재 물가로는 200억 원 정도였고 실제 그 무렵에 피부가 와 닿는 감각으로는 무려 2000억 원에 해당하는 돈이라고 이맹희는 말했다. 여기서 '현재'라는 건 이 책을 펴낸 1993년경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맹희의 이러한 회고는 10억 원이라는 게 엄청난 돈이었고, 그와 함께 이 리베이트가 어떤 식으로 처리됐는지를 이야기해준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일흔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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