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인도에 갔었다. 인도가 영성이 가득한 신비의 나라 혹은 정신의 나라, 혹은 갔을 때는 힘들어도 갔다 오면 또 가고 싶은 묘한 중독성이 있는 나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인도에는 정치가 없다’는 인상을 더 많이 받았다. 인도라고 왜 정치가 없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일 뿐,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정치가 있다면, 그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환경이 그다지도 열악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의 생활환경 차이가 그다지도 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수라인 거리에서 부유한 사람의 집 안으로 한발짝만 들여놓으면 거기는 낙원이다. 그러나 부자의 담 밖으로 한발짝만 나가면 거기가 바로 지옥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환경이 지옥인 나라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정치가 없는 나라다. 그러나 멀리 인도까지 갈 일이 있는가.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나라가 그러지 않은가.
독일에서 잠깐 살아본 적이 있다. 나는 독일에서 가난한 이주민이었다. 당연히 방세가 싼 동네에서 살았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고 집을 나설 때마다 나는 깜짝 놀라곤 했다. 내가 굉장히 부유한 동네에 살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라면 이 정도의 고요함이 있고 이 정도의 숲이 있고 이 정도의 안정된 느낌이 있는 동네라면 아주 부자동네임이 틀림 없기 때문이다. 독일부자들이 어떤 생활환경에서 사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독일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환경은 인도나 우리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의 환경 같지는 않았다. 나는 아, 돈 많이 없어도 사람이 이런 동네에서 살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독일에서 처음 알았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도 쾌적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최소한으로라도 갖춰진 사회, 나는 그런 사회가, 그런 나라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정치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 나라는 어떤가.
이제 이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생명을 잃지 않으려면 안전도 돈으로 지불하며 살아야 함을 뜻한다. 그런 나라가 어떻게 나라인가. 이 나라가 이렇게 된 것은 나라를 경영하라고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이 그 권력을 사사로이 사용한 결과다. 이제 권력은 돈 많은 자들한테 아부하고 돈 많은 자들과 결탁하여 돈 많은 자들의 뒷배를 봐주고 선하게 쓰라고(선정을 베풀라고) 위임받은 권력을 돈 많은 자들이 돈 더 많이 벌 자유를 누리게(규제완화)하는 데만 쓰고 있다. 위임받은 권력을 사사로이 쓰는데 어떤 부끄러움도 없는 그들에게 있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재주뿐이다.
그들의 재주는 참으로 현란하다. 그들의 선한 사람인척하는 연기력(선거철에 그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된다)에 속거나 속아주는 사람들 덕에 그들의 사익추구형 권력의 악행은 너무도 뻔뻔하게, 그러나 우아함으로 포장되어 자행되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 그것도 죄라면 이 나라에서 태어난 죄, 그리고 사는데 애쓴 죄밖에 없는 부모들과 그 부모들의 아이들이 죽어나간다.
이 나라 백성들은 언제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쾌적하고 안전한 삶은커녕 죽지만 않으면 다행인 그래서 결국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겨우겨우 지탱해 나가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리고 언제쯤이나 그런 백성 때문에 괴로워하는, 진실로 눈물 흘리는, 그런 백성들에게도 따뜻이 다가오는 권력자를 만날 수 있을까.
최종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말만하고 실제로는 차갑고 매몰찬 대통령의 화사한 모습을 보는 일은 한겨울 얼음구덩이 속에 처박히는 것처럼 무섭고 괴로웠다.
이 나라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사람이 기거하는 곳처럼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을 바라지도 않는다. 이 나라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의 집처럼 안락하고 좋은 환경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이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으로 산다는 이유만으로 언제 어디서 죽을지도 모를 삶을 살아가는 백성들이 존재하는 한, 자신이 가진 권력의 자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잊지 않는 권력자를 갖고 싶을 뿐이다. 나의 이 소박한 꿈은 언제쯤 이루어질까.
이제부터 선거할 때는 정책이나 공약뿐 아니라 그 사람의 품성(따뜻한 사람인가, 아닌가)도 유심히 살펴야 하겠다. 나는 무엇보다 권력이란 원래 다 이렇게 차가운 것이라는 것만 배운 듯한 권력자의 모습을 보는 일이 너무나 괴로웠다.
나는 80년 광주에서 보통의 시민들이 자신들을 지켜주라고 세금 내서 거두는 군인들로부터 죽임을 당한 현장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 군인들을 지휘 통솔하는 정점에 있는 사람이 제 나라 군인들이 제 나라 백성을 죽인 것에 어떤 식으로든(차마 잘못 지휘한 자책감으로 자결했어야 한다는 말은 못하겠다) 책임을 져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때, 이 나라에서는 제 나라 군인들이 제 나라 백성을 죽인 사건에 대해 어떤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용산에서 철거민들이 불에 타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때도 제 나라 백성이 불에 타 죽었는데도 제 나라 백성을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한 데 대한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는 권력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세월호다. 백주대낮에 시퍼런 바닷물 속으로 멀쩡한 자식이 수장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부모들이, 그 갈갈이 찢겨서 철철 피 흘리는 가슴을 붙안은 부모들이 왜 지난 여름 내내 그 고생을 해야만 했는가. 아이들이 수학여행가다 배가 뒤집어져 물속에 가라앉았다. 그것은 사고다. 그러나, 선령 제한을 풀어 그 노후한 배를 운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은, 그래서 끝내는 사고가 나는 결과를 불러온 것은 그놈의 규제완화를 뻔질나게 외치는 권력자들에 의해서다. 그리고 이 사고를 사건(사태)이 되게 한 것은 구해 줄 거라 믿고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을 한명도 구하지 못해 마지막 순간까지도 놓지 않았을 절박한 믿음을 산산히 깨버린, 안전과 구조를 포함한 국가경영의 힘을 부여받은 권력자들의 무능이다! 무책임이다! 그리고 자식 잃은 부모들과 그 부모들의 슬프디 슬픈 모습을 일상처럼 보면서도 슬퍼하지 않는 권력자들의 뻔뻔함이, 매몰참이, 또 한번 이 나라 보통의 백성들에게는 상처가 되었다. 제 나라 백성의 안전을 책임지라고 제 나라 백성들은 세금을 내고 권력자를 뽑았다. 그러나 그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권력을 연장할 수 있는 기회인 선거철만 빼고는 작든 크든 권력을 가졌다 하는 순간, 뻔뻔하고 심지어 위풍당당하기까지 하다. 자신들의 무능과 무책임과 권력 오남용에 대해 도무지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른다.
그런 뻔뻔함, 그런 철면피는 이제 그만보고 싶다. 그만 볼 때도 한참 지났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안전한 삶은커녕 언제 어디서 죽을지도 모를, 죽어도 구조되지 못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풍경을 우리가 언제까지 보고 살아야 하는가. 이 나라에서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그런 괴로운 환경을 인내하며 일상을 살도록 강요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이런 판을 어떻게 끝장낼 수 있을 것인가. 언제! 어떻게! 누가!
그런 물음에 답하기 위해 11월 15일(토) 광화문에서 오후 2시부터 세월호 연장전이 열린다. 동료 문화예술인들이 창작의 도구로 쓰는 각종 ‘연장’들을 들고 나온다고 한다. 나는 어떤 ‘연장’을 들고 나갈까. 당신은 어떤 ‘연장’을 들고 나올 터인가. 함께 하자. 아직 세월호 참사의 아픔과 진상규명을 해나갈 ‘골든타임’은 끝나지 않았고, 우리 모두가 이젠 이 시대의 마지막 남은 구조대가 되어야 한다.
■ <세월호, 연장전> 문화예술인 선언 소셜펀치 페이지()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