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쌍용자동차의 대규모 정리해고가 '적법'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13일 대법원은 쌍용차 해고자 153명이 낸 해고무효 확인소송에서 원고들이 승소했던 원심을 파기하고 사측의 손을 들어줬다. (☞관련 기사 : 2002일 기다림, 20초 선고, 쏟아진 눈물)
6년 전, "해고는 살인"이라고 외치며 77일간 옥쇄파업을 벌였고, 이후 2000일 동안 스물다섯 명의 해고자와 그 가족이 목숨을 잃었다. 올해 겨울엔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꿈은 대법원 선고로 다시 좌절됐다.
다음 편지글은 해고자 이창근 씨(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기획실장)의 아내 이자영 씨가 15일 쌍용차 평택공장 앞에서 열린 '파업 2000일 집회'에서 낭독한 글이다. 이 씨는 지난 13일 초등학교 2학년 아들 주강이와 함께 대법원을 찾기도 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편지글을 전문 게재한다. 편집자
안녕하세요. 이창근의 아내 이자영입니다.
2주 전, 오늘 무대에서 얘길 좀 하라는 말을 듣고 편치 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잠시 멈추어있을 때면 가슴에서, 머리에서 쉴 새 없이 지난 일들이 지나가더라고요. 영화가 끝나면 출연진과 스텝을 열거한 글자들이 빠르게 화면을 지나가 듯이요. 그동안 괴롭고 괴로워서 글 쓰는 일이나 인터뷰를 피해왔는데 예상은 빗나가질 않네요. 언제가 되어야 담담하게 회상할 날이 올런지요. 이틀 전 대법원 판결 하나면 다 묻어둘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삶은 공짜가 없나 봅니다.
대법원에 함께 갔던 초등학교 2학년 주강이가 쓴 일기입니다.
날씨 : 얼음처럼 춥다.
제목 : 눈물의 재판
엄마가 요가원이 끝나고 서울에 있는 대법원으로 갔다. 거기에서 딱 10명만 법원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도 들어가고 싶었는데. 그 결과는…재판에 졌다. 아빠가 우는 모습을 처음 봤다. 나도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대법원 판결의 여파는 저에겐 이렇게 나타납니다. 남편 얼굴은 다시 타들어갈 것이고 남편이 지금보다 더 집에 못 들어오게 될 것이며, 나와 주강이 단둘이 보낼 시간은 늘어나겠구나. 남편과 조합원들은 더 극단적인 투쟁에 몸을 맡길 수도 있겠다. 높아지는 긴장이 일상의 폭을 좁게 만들 것이다, 라고요.
이렇게 생각하는 제가 소인배 같지요…? 판결이 노동자에게 미칠 영향, 정치권의 움직임, 힘의 역관계 같은 건 생각이 되질 않습니다. 어쩔 수가 없네요. 제가 느끼고 책임질 반경이 그렇게 밖에 되질 않아서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다만 공장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를 한 가닥 희망으로 품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이 투쟁 2000일 기념하는 자리이죠. 6년은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고, 중학생이던 아이는 대학생이 되는 시간입니다. 30대였던 분들은 40대, 40대였던 분들은 50대가 되어가는 시간이고요. 그 사이 밖에서 벌어진 일들도 엄청나게 많았지만, 그걸 대하는 제게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던 시간이었습니다.
고통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고통은 나쁜가, 고통은 없으면 좋은 건가, 고통을 겪는 사람은 피해자이고 약자인가, 고통을 겪는 이는 동정과 연민을 받아야 하는가, 고통을 준 이는 가해자인가. 그 가해자는 나쁘고 그래서 응징 받아야 하는가. 가해자가 응징을 받으면 고통 겪는 이의 아픔은 사라지는가, 그것이 정의인가, 뭐 이런 생각들 말입니다.
네 살에 쌍용차 사태를 겪은 뒤로 눈에 분노와 공포를 잔뜩 안고 있던 우리 주강이는 지금은 9살. 많이 통통해지고 개그맨처럼 넉살도 떨고 성대모사도 곧잘 하는 어린이가 됐습니다. 네다섯 살 때만 해도 다른 사람의 작은 자극에도 소리를 지르고 분노하고, 온몸을 무장하면서 스스로를 지키려고 했던 주강이는 지금도 무기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앉은 자리에서 총, 창, 검, 칼, 방패, 투구, 갑옷, 물, 불, 얼음, 바람, 흙, 풀 등 공격과 방어에 관해 상상력을 펼치면서 스케치북을 채워갑니다. 이런 주강이에 대해 뭐라고 할까요. 여전히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상태라고 진단할까요, 부모의 죄책감을 자극하니 아이에게 그만 두라도 야단을 칠까요. 주강이에게 끔찍한 경험을 하게 만든 제 자신을 한없이 질책했고 그걸 만회하느라 몇 년을 지나치게 진지하고 무거운 엄마로 있었습니다. 지금은 주강이에게 잔소리도 많이 하고 가끔 꿀밤도 먹일 만큼 평범한 엄마로 돌아가고 있고, 주강이 모습을 재능으로 인정하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로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에 올라가 위태롭게 계실 때, 주강 아빠는 김진숙을 위해, 한진 해고자 가족을 위해 희망버스를 꾸리고 부산으로 달려갔습니다. 한 달에 두 번, 짐을 바꾸러 집에 들어오는 것이 다였습니다. 저녁에 왔다가 그날 밤에 다시 떠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 남편에 대해 저는 처자식도 아픈 상태인데 그런 우릴 놔두고 다른 이를 구하러 달려갔다는 느낌을 받아버린 겁니다. 처자식을 버렸다, 우린 버려졌다고요. 매일을 울면서 잠이 들고 울면서 일어나고 가슴을 있는 데로 할퀴던 시간이었습니다. 남편 가슴에 아내와 아이가 없다는 느낌, 저와 주강이가 이창근에겐 1순위가 아니란 느낌으로 괴로웠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있는 데로 원망하고 피해의식에 빠져있을 때 몇몇 분들의 말씀이 저를 지옥에서 꺼내 주었습니다. 제가 가시나무처럼 가시를 뻣뻣이 세우고선 남편이 다가올 때마다 사정없이 찌르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저를 외롭게 한 면도 있겠지만, 저 또한 못지않게 남편을 초라하게 만들고 외롭게 했다는 것을요. 또 남편을 가해자로 삼고 있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가해자를 용서하세요"란 누군가의 말을 듣고 정신이 들었던 겁니다. '아, 내가 고통의 원인을 남편으로 몰아가고 있었구나'라는 것을요. 그렇게 인식을 바꾸게 되자, 희망도 내가 만들 수 있고, 절망도 내가 만들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처지를 지옥으로 느끼고 있으면 지옥은 내일도 모레도 글피에도 이어질 것이지만, 이렇게 하고 있는 나를 알아차리게 되면 그 다음은 제가 창조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일어나는 상황을 피할 길은 없었습니다. 특히 파업 77일은 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어떤 수로 바꾸거나 피할 수 있었나요. 우리보다 더 큰 힘으로 작동하는 일들을 무슨 수로 피할 수 있었을까요.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란 것은 상황이 일어난 다음에 발휘되도록 신은 설계했나 봅니다. 상황은 일어나는데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 일어난 일에 대한 결과를 받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무슨 허튼 소리냐 하고 기분 나빠하실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제 경험은 그랬습니다. 의지를 발휘함에 있어서 제 뜻을 고집하면 할수록 고통은 깊고 오래갔습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나면 그 다음에 선택하고 행동할 범위는 생겨났습니다. 제 선택에 대한 책임도 기꺼이 질 힘이 생겨났고요.
파업 이후로 제 얼굴이 엉망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눈과 입 주위가 점차 조여들더니 붉어지고 이내 예전 얼굴을 기억해내기 어려울 만큼 얼굴이 찌그러져갔습니다. 조여들다 못한 얼굴은 곳곳이 갈라져서 진물이 나고 아팠죠. 사태가 악화될수록 제 얼굴도 따라서 악화되어 갔네요. 얼굴에 손을 대면 하얗게 일어난 피부가, 물고기 비늘 벗겨지듯 후두둑 바닥에 떨어지고요.
왜 하필 얼굴일까? 얼굴이 아니라, 옷으로 가릴 수 있는 부위였다면 덜 힘들었을 텐데, 덜 창피할 텐데, 덜 수치스러울 텐데. 그 얼굴을 하고 마트를 가고, 남편 구치소 면회를 다니고, 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주강이 어린이집 행사에 참석하고. 그 얼굴로 남동생 결혼식에 참석했고, 그 얼굴로 매일 요가 수업을 했습니다. 요가를 하면 피부가 맑아지고 마음이 편해진다는데, 가르치는 사람 꼴이 이러했습니다. 수치스러움을 느끼지 않기 위해 감각 기관을 온통 닫았지만 얼굴은 사정없이 제 가슴 상태를 드러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얘기는 다음 얘깁니다. 이런 와중에 한 가지 신기하고 고마웠던 일이 있었던 겁니다. 그 얼굴로 매일 요가 수업을 하는데도 요가원 회원들이 떠나질 않는 겁니다. 1년여 동안, 저의 부침에도 아랑곳없이 우리 요가원을 와주었습니다. 그 때부터 함께한 요가원 회원이 지금까지도 있습니다. 우리가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을 때 더 뜨거운 연대로 우리를 지켜주었던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요. 이런 오묘함이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흐르고 있으리라 믿고 있고 멀지 않은 어느 날, 우리가 축복으로 체감할 수 있길 기다려봅니다. 우리의 처지가 고통만은 아닐 수 있음을, 고통이라면 더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서, 일어나는 흐름 앞에 자신을 더 낮추었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보다 더 큰 정의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과 함께 저는 잊고 있었던 분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파업 때 공장에서 함께 지냈던 우리 남편들입니다. 그 때를 떠올리면 진압 당했을 때 못지않게 눈물이 납니다. 그 분들이 너무도 눈이 부셔서요. 당시 사진들을 우리 조합원들은 갖고 있지 않죠? 자기들이 얼마나 멋있고 빛났는지 모르고 있을 것 같습니다. 도장 공장 옥상에 올라서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까치발 하며 두 팔을 애타게 흔들었던 때였습니다.
공장을 지키고 동료를 지켜낸 우리 동지들이 대접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중간에 공장 밖으로 나갔든, 마지막 날까지 있었든 상관없잖아요? 그 분들이 일군 하루하루, 그 분들이 견뎌오면서 일어났던 상념과 감상, 그 모두가 존중되고 존경받길 바랍니다.
이틀 전 대법원에 가니까 몇 년간 못 뵀던 조합원들을 뵐 수 있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안타까운 결과 앞에 한 마디도 뱉지 못하고 쓸쓸히 돌아선 해고자들 모습이 아프게 남습니다. 무참히 진압된 후 세상과 연결되지 못한 채 쓸쓸하게 잊힌 우리 빛나는 영웅들이 온전히 기억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먼저 퇴직하신 분들과 가족, 고인이 되신 분과 그 가족들을 고이고이 기억합니다.
또 하나, 이분들도 더 많이 인정받길 바랍니다. 공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이요. 이분들이 계시기에 공장이 돌아가고 회사가 유지되고 있는 거잖아요? 회사가 있기에 우리가 들어갈 희망도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해고자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지켜주고 계신 분들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회사 경영진은 우리 해고자들을 인정해 주길 바랍니다. 당신들 입에서 당신들 손으로 피를 묻혀 해고한 우리들에 대해 거론하는 걸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과 함께 회사를 굴러가게 했던 사람들이고, 그런 우리들의 운명을 당신들 손으로 정했습니다. 그에 대해 책임을 지십시오. 그 시작은 해고자와 그 가족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당신들의 운명공동체 안에 넣는 것입니다. 당신들과 우리는 운명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없는 사람 취급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닌, 엄연히 깊숙이 얽혀 있는 존재들이기에 우리를 더 이상 외면 말길 부탁드립니다.
아까 '고통을 겪는 자는 피해자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만, 저는 그렇습니다. 더 이상 피해자로 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회사를 가해자로 못 박고 싶지도 않습니다. 우리보다 큰 쪽은 회사, 당신들입니다. 당신들이 우리를 품어야 당신들도 살고 모두가 살겠지요. 그렇게 공존이 되었을 때 평화로움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 평화로움을 함께 누리고 싶고 우리와 동고동락했던 많은 분들의 가슴에 사랑을 증명해주고 싶습니다.
저란 사람이 참 어리석어서 몸으로 느끼기 전에는 도무지 알질 못합니다. 그런 제가 겪어온 얘기였습니다.
설익은 얘기인데,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추운데도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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