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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의 죽음, 박상옥에겐 3번 기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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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종철의 죽음, 박상옥에겐 3번 기회가 있었다" 이부영, 박종철 사건 증언…"이런 흠에도 대법관 될 수 있나"
"제가 얼마 전에 정치권을 떠난다고 얘기를 했는데 오늘 이 일이 아주 중요한 일이라서 마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28년 전 박종철 군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진, 기가 막혀도 너무나 기가 막혔던 그 일들에 관해 제가 관여된 일부분을 이야기해 드리려고 합니다."

이부영(73) 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 좌중을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지난달 11일 정치 활동을 마감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한 노장. 그러나 28년 전 그 참혹했던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했던 수사 검사팀의 한 사람이 대법관을 하겠다는 현실은, 이 노장을 다시금 국회로 불러들였다.

이인영 새정치연합 의원의 주최로 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대법관 구성, 이대로 좋은가' 집담회는 이 전 상임고문이 1987년 1월 영등포 교도소에서 처음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를 만났던 날에서부터 시작됐다.

"저는 1986년 5.3 민주화운동 배후로 지목돼 영등포 교도소에 수감돼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 2시, 남자 두 사람이 들어왔는데 알고 보니 조한경 강진규 두 남영동 소속 경찰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조한경 경위는 밤낮으로 찬송가만 불렀고 강진규 경사는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치안본부 대공3부 5과 2계 소속이었던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는,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군을 고문해 숨지게 한 혐의로 며칠 후 교도소에 수감됐던 터였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이었던 박 군은 숨진 당일 오전 8시께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됐고 불과 3시간여 만인 오전 11시 20분경 고문실 안에서 숨이 끊어졌다.

"두 사람에게 깊은 사연이 있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강진규 경사의 아버지가 면회를 왔습니다. 당시 면회실에 있었던 교도관이 저에게 몰래 와서 얘기를 해주었는데, 그 아버지가 '네가 정말 고문을 해서 학생을 죽였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저는 절대 죽인 적이 없습니다.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라고 하니 부친은 '그런데 너는 왜 구속이 됐느냐. 사실대로 얘기해 누명을 벗어라'라고 했다고 교도관이 저한테 전했습니다."

이 전 상임고문은 민주화운동을 하며 여러 차례 감옥을 들락날락한 까닭에 "교도관들과도 친형제처럼 지냈다"고 한다. 평소 친분이 있던 교도관이 강 경사가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몰래 전한 이 일을 시작으로, 이 전 상임고문은 박종철 군 사건을 둘러싼 수사기관들의 은폐·조작 사건의 강력한 '목격자'가 되었다.

▲ 1988년 7월 26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국회 내무위 신순범 평민당 의원(오른쪽) 등 야당 의원들이 박종철 군이 물고문을 받다 사망한 현장을 돌아보고 있다. ⓒ연합뉴스

교도관의 호소…"공직자들이 저렇게 조작하면 누굴 믿나"

"아마 2월 초순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안상수 (당시 서울지검 형사2부 소속) 검사와 신창언 부장검사가 두 경찰관을 면담하고 갔습니다. 실은 면담이 아니라 검찰 조사를 하러 왔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때 조한경 강진규가 '우리가 진범이 아니다'라고 얘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검찰은 남영동 대공수사단에 '당신들이 수사해 올린 것과 다른데 어떻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 같은 이 전 상임고문의 말과 당시 사건을 기록한 자료들을 종합하면, 사건은 처음 최환 검사가 부장으로 있던 서울지검 공안부장에게 넘겨졌었다. 그러나 최 당시 공안부장이 '쇼크사'라는 경찰 보고에 의문을 품고 사체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가며 부검을 지시한 후 사건은 형사 2부로 넘겨진다.

"이렇게 안상수 신창언이 다녀간 후, 남영동 대공수사단의 박처원 치안감(당시 대공수사 2단 단장)과 유정방 경정(5과장), 그리고 또 한 사람, 총 세 사람이 특별 면회를 하러 다시 왔습니다. 이젠 시간이 다 지나서 공개합니다만, 그때 면회에 입회했던 교도소 보안계장이 당시 오간 얘기를 아주 소상하게 다 말해줬습니다.

그 계장이 기록을 하려는데 박처원 치안감이 기록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들 우리하고 조사한 대로 승복해. 그러면 너희들 가족 다 먹여살려주겠다'며 1억 원짜리 통장 2개를 한 사람씩에게 보여줬다고 합니다. '우리가 조서 꾸민대로 검찰한테 응해라'라고 하면서요.

그러자 조한경 경위가 '제 자식들이 살인 고문 경찰의 자식이란 누명을 뒤집어 쓰고 사는 것은 못 견디겠다'고 했다 합니다. 이렇게 저항을 하니 '빨갱이 하나 죽인 걸 가지고 뭘 그러느냐. 우리 말 거역하면 교도소에서 나와도 이 나라에서는 못 살아'란 말도 나왔었다고 합니다.

얘기를 해주며 보안계장은 아주 치를 떨었습니다. '도대체 공직자들이, 더구나 경찰 최고 간부들이 저렇게 조작하고 그러면 우리 국민은 누구를 믿고 사느냐'고요. '형, 내가 이러고도 제복을 입고 있어야 하느냐'며 울다시피 호소를 했습니다."

이 전 상임고문은 이렇게 교도관한테서 들은 얘기를 혹여 잊을까, 화장지로 쓰는 갱지에 교도관에게서 몰래 빌린 볼펜심으로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이렇게 세 차례에 걸친 면회 결과를 들을 때마다 어렵사리 적은 편지를 친구인 김정남 전 청와대 교문수석에게 전했고, 그것이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로 이어졌다.

"폭로는 했지만 제대로 폭발력이 없으면 역추적이 돼 제가 조사를 받을 생각, 그런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고문을 해서 사람을 죽일 때니까. 그런데 5.18 미사에서 폭로된 후 항쟁이 불타오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무장관, 안기부장, 총리가 다 바뀌는 것을 보면서 저에 대한 역추적은 불가능하게 됐구나 했습니다."

▲ 28년 전 박종철 열사가 숨진 현장은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흠 있어도 대법관 될 수 있다면, 이 나라는 병든 나라"

이 전 상임고문을 이어 박상옥 후보자의 대법관 임명 시도에 "지극히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이 사람(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이 축소 왜곡을 지휘하거나 결정 내릴 위치에 있지 않았더라도, 그런 사건에 연루된 분을 사법부의 근본인 대법원의 대법관으로 임명해야 하는가에 대해 회의적"이라면서 "이런 흠이 있어도 사법부 상층부나 행정부 수장 눈에만 들면 대법관 같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다면, 이 나라는 병이 들어도 한참 병이 든 나라"라고도 했다.

박 후보자는 당시 수사검사팀의 한 사람이었지만, 일각에선 그가 말석 검사였단 이유로 사건의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박 후보자 스스로도 "최선을 다해 수사했고 외압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해명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박종철 군의 친구이자 박종철 열사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인 김학규 씨는 "무책임한 거짓 해명"이라고 반박한다.

김학규 사무국장은 "박종철 사건만큼 수사가 된 사건도 없지만, 이 사건 역시나 실체적 진실이 다 밝혀지지 않았다"면서 "경찰의 은폐·조작은 상당 부분 밝혀졌지만 검찰 은폐·조작과 관계기관 대책회의(1월 17일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등이 연 회의. 이 회의 다음날 경찰은 두 명의 수사관이 물고문을 자행한 것으로 조사를 마무리하고 그 이튿날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차원의 개입 문제는 아직 충분히 밝혀져 있지 않다"고 말했다.

김 사무국장은 이어 "박상옥 당시 검사가 막내였다고 하지만, 그가 참여한 내용은 단순한 문서 수발이나 행정 지원 정도가 아니었단 게 많이 확인되고 있고 실제로 강진규 수사를 담당한 검사였다"면서 "그런 검사가 책임이 없단 것이 말이 되나. 박상옥 검사가 참여한 수사팀이 최소 3번은 진실을 밝힐 기회가 있었는데 이를 모두 흘려보냈다. 의도적 포기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1988년 2월 26일. 서울대학교 제42회 졸업식에서 일부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박종철 군 영정을 앞세우고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라며 시위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상옥 후보자, 최소 3번의 기회가 있었다"

실제로 박 후보자가 참여한 수사팀은 1월 20일 가동돼 불과 4일 만에 1차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는 고문 수사관이 2명이라던 경찰의 조사 결과 발표와 대동소이했다. 김 사무국장은 "현장 검증을 할 때 고문 경관을 데려오지도 않았다. 짜여진 시나리오대로 경찰 조사 결과를 추인하기 위한 검사를 한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검찰은 이후 2월 27일 고문 수사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란 사실을 안상수의 조한경 면회를 통해 파악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검찰은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이를 폭로하기 전까진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김 사무국장은 "박상옥 후보자는 2차 수사 도중 여수지검으로 자리를 옮겼다며 책임을 회피하려하지만, 수사 결과 발표는 3월 12일이었고 여수로 옮겨간 시점은 3월 16일이다. 여기에서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지적했다.

마지막 세 번째 기회. 5월 18일 미사 폭로 이후 2차 수사팀이 가동되는데 김 사무국장은 이때 또한 "박상옥 검사가 파견 형식으로 수사팀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 두 번째 수사팀은 고문 검사관이 3명 더 있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사건의 핵심인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또다시 무혐의 처리한다.

김 사무국장은 "수사 외압이 있었단 것은 공공연한 사실인데 박상옥 검사가 이를 모르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코미디"라면서 "이는 박상옥 당시 검사가 이 사건의 실체를 은폐하려 한 관계기관 대책회의 등의 입장과 생각이 같아 외압을 느끼지 못했다고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해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28년이나 지난 사건이다 보니 많은 이들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 걸 활용해 기만적으로 넘어가려는 것 아닌가"라면서 "검찰이 축소은폐조작 책임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실망스러운 모습"이라고도 한탄했다.

이날 집담회에 참석한 의원들은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한 후 박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 개최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우윤근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는 "당내에선 대부분 박상옥 후보자를 부적격자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면서 "그러나 당 밖의 법조계 등의 다른 의견도 들어 3월 중엔 청문회 개최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집담회에는 이 외에도 우상호·강동원·한정애·신경민 의원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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