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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학살 피해자 방한…고엽제전우회 "종북"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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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학살 피해자 방한…고엽제전우회 "종북" 반발 "위안부 문제와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다르지 않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당시) 저는 8살이었는데, 그날 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한국에 와서 참전 군인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들로부터 위로받고 싶었는데, 여기 와서 이런 일을 겪을 줄은 몰랐습니다. 진실을 알리고 싶었을 뿐인데, 그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게 너무 가슴 아픕니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인 응우옌티탄(여·55) 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인 응우옌떤런(남·64) 씨도 눈시울을 붉혔다. 한국에서 베트남전 참전 군인에게 위로받고 싶었다던 이들은 7일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의 '반대 집회'를 마주했다.

평화박물관의 초청으로 방한한 두 사람은 7일 서울 조계사 근처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증언했다.

맞은편에서는 '대한민국 고엽제전우회' 회원 300여 명이 집회를 열었다. 고엽제전우회는 "평화박물관이 월남전 참전 용사를 양민 학살자로 둔갑시켜 명예훼손을 했다"고 반발했다. 이들은 "행동하는 양심? 행동하는 종북"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걸고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등의 노래와 군가를 틀기도 했다.

▲ 고엽제전우회 회원 300여 명이 7일 서울 조계사 앞에서 집회를 열고 베트남전 민간인 피해자들의 기자간담회가 열린 데 대해 '월남전 참전 용사들이 모욕당했다'고 주장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한 고엽제전우회 회원은 "우리 손자들은 할아버지가 월남전에 자유 십자군으로 참전해 국위를 선양하고 경제발전의 초석이 됐다고 여기는데,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다는 주장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며 "전쟁의 영웅을 양민 학살자로 둔갑시켜 죄인 취급을 받는 현실에 통탄한다"고 말했다.

같은 시각, 기자간담회장에서 "밖에 있는 참전 군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받은 응우옌떤런 씨는 "먼저 저는 참전 군인을 만나면 정중하게 인사드리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참전 군인 여러분이 한국 정부를 위해 베트남을 도우러 왔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영광스럽게 느끼실 것"이라면서도 "그럼에도 안타깝게도 여러분이 도왔던 남베트남 정부는 베트남 국민에 반하는 정부여서 국민에 의해 무너졌고, 여러분은 베트남에서 우리 국민에게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지른 바 있다"고 말했다.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했다"

응우옌티탄 씨는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 생존자다. 청룡부대 주둔지였던 베트남 퐁니 마을에서 살았던 그는 8살 되던 해인 1968년에 "얼룩덜룩한 군복을 입은" 한국군에게 홀어머니와 언니, 동생을 잃었다.

응우옌티탄 씨는 "한국군이 이모와 아이들이 숨어 들어가 있던 방공호에 수류탄을 까 넣는 시늉을 하면서 나오라고 손짓했다"며 "하지만 나가는 대로 한국군들이 총으로 쐈다"고 말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언니의 시신을 봤다.

그는 "팔에 아이를 안고 있던 이모가 집에 불을 지르려는 한국군을 말리려고 붙잡았는데, 한국군이 그 자리에서 이모를 칼로 찔러서 죽였다"며 울먹였다. 그는 "5살이었던 제 동생은 숨 쉴 때마다 엄청난 피가 흘러 나왔지만, 그때 8살이었던 나는 너무 어려서 아이를 안고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엄마도 잃고 고아가 돼서 그 이후로 삶이 죽고 싶을 만큼 너무 고통스러웠다"며 "어떻게 사람들을 다 죽일 수가 있느냐"며 눈물을 흘렸다.

▲ 베트남전 피해자인 응우옌티탄 씨(왼쪽)와 응우옌떤런 씨(오른쪽). ⓒ프레시안(최형락)

1966년 당시 15세였던 응우옌떤런 씨는 한국군 맹호부대 주둔지였던 베트남 따이빈사 안빈마을에서 어머니와 당시 13살이었던 여동생을 잃었다.

1966년 음력 1월 23일 총소리에 방공호에 숨었던 그의 가족은 "호랑이 무늬가 그려진 군복"을 입은 한국군에 발각됐다. 한국군은 노인과 어린이를 포함한 20여 가구 마을 주민들을 논에 한데 모아놓은 뒤, 비무장 상태인 이들에게 총과 수류탄을 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응우옌떤런 씨는 "어떤 사람은 팔이 잘리고, 어떤 사람은 하반신이 잘리고, 어떤 사람은 배가 터져서 창자가 밖으로 나오고, 어떤 사람은 머리에서 뇌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며 "부모는 자식을 부르고 자식은 엄마를 부르고, 온통 비명과 신음소리로 아수라장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그날 어머니와 여동생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한국군이 떠난 뒤 마을 사람들이 옮겨온 어머니는 두 다리가 산산조각이 나서 거의 하반신이 없는 상태였고, 여동생은 머리가 심하게 깨져서 쉬지 않고 비명을 질렀다. 밤 12시쯤 여동생의 비명이 잦아들자, 마을 주민들이 말없이 여동생 시신을 돗자리에 말아서 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여동생을 묻고 돌아오자마자 어머니가 뒤를 따랐다.

응우옌떤런 씨는 "한국군이 그날 새벽부터 마을을 수색해 땅굴에 숨어 있는 마을 사람들을 찾아서 쏴 죽였다"며 "그날 내가 있던 논두렁에서만 65명이 희생당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진실 인정해야"

지난 4일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난 응우옌떤런 씨는 "한국에서 같은 전쟁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서 반가웠다"며 "위안부 문제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는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정부가 이 진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억울한 유가족과 피해자들의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응우옌티탄 씨는 "우리가 서로 위로하고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라도 한국 정부와 참전 군인들이 진실을 인정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한편, 고엽제전우회 회원 일부는 이날 집회가 끝나고 기자회견장으로 가려 했으나 경찰에 막혀 발길을 돌렸다. 고엽제전우회는 응우옌떤런 씨에 대해 "부친과 형이 베트콩이었는데, 자신은 민간인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응우옌떤런 씨는 "부친이 어땠는지는 나는 너무 어려서 잘 몰랐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어머니와 나와 여동생은 민간인이었다"고 반박했다.

앞서 평화박물관은 이날 조계사에서 베트남전을 다룬 사진전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의 환영 행사를 열 예정이었으나, 고엽제전우회의 반발로 행사가 열리지 못했다. (☞관련 기사 :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 첫 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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