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깔을 파먹어/ (…) /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열한 살짜리 초등학교 여자 아이가 썼다고 보기엔 섬뜩한 느낌이 드는 시다. 이 시는 2015년 5월 어린이날을 앞두고 나온 <솔로 강아지>라는 제목의 동시집에 나온다. 시의 제목은 '학원 가기 싫은 날'이다. 이 시와 함께 그보다 더 섬뜩한 느낌이 드는 삽화(한 아이가 쓰러진 어머니 옆에서 입에 피를 묻히고 심장을 먹고 있는 그림)가 같이 언론에 소개되면서 작은 파문이 일었다.
그 기사를 본 시민들이나 아이들은 대체로, 동심이 담긴 시와 그림이라고 보기엔 내용이 너무 자극적이고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출판사는 어린 작가의 의도를 생각해 가감 없이 실었다고 설명했다. 표현의 자유 내지 예술성 등 출판사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언론 등 시민 사회의 반응은 시와 그림에 대한 혐오감, 그리고 출판사의 도덕성 내지 신중성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심지어 10살 어린이를 '패륜아' 또는 '사이코패스'로 취급하기도 했다. 또 그 어린 작가의 부모에게도 "어떻게 이런 책을 출판하게 내버려 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원래 "이것을 보고 시대의 슬픈 자화상을 발견하고 어른들의 잘못된 교육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랐던 출판사도, 오히려 모진 역풍이 거세게 일자 3일만에 유통 중인 시집 전량을 회수하고 재고 도서도 전량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출간된 책을 전량 폐기한다는 결정은 참 쉽지 않은데도 출판사 측이 발 빠른 반응을 보인 셈이다.
그런데 이를 들은 동시 작가의 어머니(시인)가 발끈하고 나섰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딸의 시가 사회적으로 잔혹성 논란을 일으켜 송구스럽다"고 전제한 뒤, "책을 회수하는 것은 맞지만 전량 폐기는 반대한다"고 했다. 그러나 출판사가 실제로 전량 회수 폐기라는 특단의 결정을 내리자 이에 반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그 책의 '회수 및 폐기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나는 개인적으로, 법정 논란보다 양측 사이에 원만한 조정과 합의가 이뤄져 갈등이 조기에 마무리되기를 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사안이 그 본질상 이 양 측 사이의 이해관계 갈등으로 좁혀질 문제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아버지가 1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출판사의 뜻에 따라서 솔로강아지 전량 폐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면서 "폐기 금지 가처분 신청을 취하한다"고 적은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법정에서 누가 더 옳은지 판가름 난다고 해도 승자가 진짜 승자이며 패자가 진짜 패자인지는 불분명하다.
사실, 이 일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생각할 점을 던진다. 특히 시의 내용이나 삽화가 전해주는 끔찍함과 동시집이라는 매체 사이의 관계 문제, 나아가 출판을 추진한 아이 어머니와 출판사의 의도나 책임성 문제, 또, 이 문제에 대한 시민 사회의 반응들과 아이에 대한 낙인이 가진 문제, 표현의 자유, 예술성이나 문학성 등의 문제 등등이 모두 화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동심의 세계와 어른의 세계 사이의 충돌이다. 이번 논란을 생각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학원 가기 싫은 날'이란 시에 드러난 동심, 즉 아이의 마음이다. 눈만 뜨면 공부 하라고 하는 엄마, 매일같이 학원을 반강제로 가라고 하는 엄마가 정말 지긋지긋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그 아이는 자신의 눈을 열고 가슴을 연 채 엄마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설사 그 속마음을 털어 놓았을 때 혹시라도 엄마에게 혼이 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솔직하게 보여주고 싶은 순수함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시를 본 엄마의 태도도 정말 남달랐다. "처음에는 그 시를 보고 화가 났지만 미안함도 생겼다. 아이가 학원에 가기를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줄 전혀 몰랐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아이가 다니기 싫어하는 학원을 그만두게 했다"고 말했다. 아이의 정직한 표현에 엄마도 정직하고 성숙되게 반응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많은 가정에서 그러한 것처럼 엄마는 '엄마 아빠가 네 장래를 위해 얼마나 고생하면서 학원을 보내주는 건데, 무슨 배은망덕한 소리만 하느냐?'며 혼을 냈을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이 아이와 엄마는 정말 건강한 소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솔로 강아지>라는 멋진 동시집이 나왔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보고 한국 사회가 특히 5월 가정의 달과 어린이날을 맞아 아이의 눈으로 세상과 삶을 다시 성찰하게 되었다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돌아갔을 터이다. 그러나 세상은 아직 그런 방향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이와 엄마의 마음이 동심의 세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면, 사회나 언론은 잘못된 어른의 세계를 고집스럽게 드러냈던 것이다. 즉, 사회나 언론은 시나 그림이 가진 '끔찍함'을 넘어 자신과 사회를 차분히 성찰하는 보다 성숙한 어른의 세계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잘못된) 어른의 세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편으로, 동심의 순수함이나 솔직함과 달리 출세나 세속적 성공의 욕망, 즉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거나 돈을 벌고 싶은 마음,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시 속에서 '학원' 문제로 드러난, 잘못된 교육 현실이나 사회 현실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이를 애써 숨기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일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동심의 세계와 다른 비뚤어진 어른의 세계가 이런 측면을 갖고 있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물론, 우리는 얼마든지 보다 성숙하고 바람직한 어른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잘못된 어른의 세계에 빠져 있다.
우리가 보다 정직하게 이런 잘못된 어른의 세계를 솔직히 인정한다면 이런 질문을 추가로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동심의 순수함을 있는 그대로 유지하지 못할까?' 그리고 '왜 우리는 잘못된 교육 현실이나 사회 현실의 문제점을 제대로 고치려 하기보다 계속 고수하려고만 할까?'
그것은 한마디로, '먹고사는 문제'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 먹고사는 문제가 인생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번 더 물어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으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답인가?' 이런 질문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이런 식으로 먹고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넓은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예컨대, 왜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이웃사촌'과 더불어 행복한 마을을 이루며 살지 못하는 걸까? 왜 우리는 억지로 학원에 가서 국·영·수에 매진하고 오로지 일류대학만 바라보고 재미없는 공부를 한 뒤 또 '스펙' 쌓느라 대학의 낭만이나 비판적 지성도 즐기지 못한 채, 취업 뒤엔 '팔꿈치'로 옆 사람을 밀치는 경쟁을 하며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일을 계속 하며 살아야 하는가? 바로 이런 근본적 질문이 필요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소망이나 의견과는 달리, 아래는 없고 위는 좁은 '사다리 질서' 내지 '피라미드 질서' 안에 살고 있다. 팔꿈치로 옆 사람을 제치고 무조건 위로 올라만 가면 우리는 돈과 권력을 한꺼번에 쥘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건 오로지 내 앞만 바라보고 오로지 내 가족만 챙기면 행복해질 것이라 믿고 있으면서 '경쟁력' 키우기에만 골몰한다. 하지만 사태의 진실은, 바로 그런 치열한 경쟁에서 극소수만 승자 그룹에 들어가고 대다수는 평생 허덕거리며 살아야 한다는 점, 나아가 누가 승리하는가와는 무관하게 경쟁이라는 게임에 들어간 모든 사람들은 자본과 권력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본과 권력은 사람들이 분열되어 경쟁하지 않고 연대하고 협동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동심의 세계가 연대와 협동에 가깝다면, 어른의 세계는 경쟁과 분열에 가깝다. 그러나 참된 인생의 원리는 연대와 협동, 사랑과 우정에 있다. 하지만 '사다리 질서' 내지 '피라밋 구조'는 우리는 부단히 경쟁과 분열로, 위계와 차별로 몰아넣는다. 사랑과 우정, 연대와 협동의 원리로써 이것을 극복해내지 못한다면 우리 삶의 비극은 계속된다는 것이 우리 삶의 진실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는 이런 문제의식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학원 가기 싫은 날'과 같은 동시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시에서 아이의 마음은 정직했다. 그리고 아이는 어른스런 수준의 시를 수시로 많이 쓸 정도로 재주가 뛰어나다. 바로 그런 아이가 시를 통해 동심의 세계를 잘 대변했고 이로써 어른의 세계와 정면충돌한 셈이다.
비록 이번 논란에서 이런 문제의식이나 사회적 성찰이 부각되지 않았지만, 이 문제는 시나 그림의 '끔찍함' 문제보다 훨씬 본질적이다. 사실, 이번엔 아이가 쓴 시가 문제가 되었지만, 어른의 세계에 저항하는 동심의 세계는 '자살'이라는, 훨씬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지도 않던가? 한둘도 아니고 일 년에 무려 250명 내지 300명의 10대 청소년이 자살을 하는 사회가 바로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다. 한 아이가 죽어도 온 사회가 고통스러워하며 근본 해결책을 찾아 나서야 할 판국에, 수백 명이 자살로 호소해도 우리는 '집단 불감증'에 빠져 냉담하거나 무관심, 심하면, 낙인찍는 일에 골몰한다. 바로 이러한 우리의 태도나 사회적 분위기가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끔찍한' 작품을 쓸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해답은 어른의 세계 속에 있다. 오로지 극소수의 특권층에 들고자 하는 욕망에 젖어 자신의 인간성이나 사회성을 잃어버린 어른의 세계를 보다 건강하게 고쳐내야 한다. 정치경제, 사회문화, 교육언론, 예술종교 등 모든 영역에서 사력을 다해 잘못된 구조와 분위기를 쇄신해야 한다. 이런 운동이 범사회적으로 벌어질 때 비로소 더 이상 '어머니의 심장을 파먹고 싶은' 왜곡된 동심의 세계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잘못된 어른의 세계를 정직한 동심의 세계로 성찰하도록 만들어준 <솔로 강아지>의 시에 대해 '잔혹동시'니 '패륜아'니 하는 낙인을 찍어대며 진정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며 몸부림치는 온갖 사회적 저항에 대해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며 낙인을 찍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대단히 잔혹하며 지극히 패륜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온 사회의 잘못된 구조나 풍토 자체를 고치려 하기보다 무관심과 냉담함으로 대하는, '집단 불감증'을 하루빨리 극복하지 않는 한, 계속될 비극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