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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살인자', 한일 관계 100년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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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살인자', 한일 관계 100년의 그늘 [구보타 쇼크 10년, 한일 석면 문제 대해부 ⑦]
2015년 8월 15일로 광복 70년을 맞는다. 오래전 이야기, 이제는 역사책에서나 살펴볼 수 있는 일본 침략 36년의 한일 간의 역사와 사회관계를 석면 문제의 눈으로 살펴보면 어떨까?

'기적의 광물'이라는 칭송에서 '침묵의 살인자'라는 오명을 얻기까지 석면은 중요 산업용 광물로 이용되다가 인체 유해성이 알려지면서 산업재해 물질, 환경오염 물질로 인식되고 있다. 1910년 일제에 의한 한반도 강제 합병으로부터 최근까지 한일 관계 100년의 역사 곳곳에서도 석면 문제를 찾아볼 수 있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군수 물자인 석면을 한반도 곳곳의 석면 광산 개발을 통해 조달했다. 석면은 열전달을 차단하는 단열성, 불에 타지 않는 내화성, 산에 부식되지 않는 성질을 특징으로 한다. 매우 가볍고 광산 개발을 통해 많은 양을 저렴하게 얻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군함, 전투기, 탱크의 엔진 부위 등에서 단열재 내화재로 석면은 필수였다.

최근까지도 포병에서는 포를 발사하는 과정에서 달구어진 기기를 다루는데 석면 장갑을 사용했다. 전쟁 이전에는 주요 석면 수출 국가인 캐나다로부터 수입했는데 전쟁이 터지면서 석면 운반 선박이 격침되어 더 이상 수입에 의존할 수 없게 되자 일본은 식민지 나라들에서 석면을 찾아냈다.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에 위치한 광천 석면 광산은 1930년대 한국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아시아 최대 규모의 백석면 광산이다. 일제는 충남의 홍성, 보령, 청양, 서산 그리고 충청북도 제천과 단양 또 강원도 영월과 경상북도 영풍, 경기도 가평 등 남한 일대에서 50여 개의 석면 광산을 개발했고 북한 지역에서도 10여 개의 석면 광산을 개발했다.

일제는 '중요 광물 비상 증산 강조 기간'을 설정하고 강제 징용한 한국인을 석면 광산 노역에 동원했다. 정지열 전국석면피해자와가족협회 위원장의 증언이다.

"광천 석면 광산 등 홍성, 보령 일대의 석면 광산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들이 많았습니다. 제 선친과 친인척 여러 사람이 석면 광산에서 징용 일을 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가족 친지 중에 석면 질환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열 명이 넘습니다."

일본으로 징용된 한국인 수십만 명은 일본 전역의 광산을 비롯하여 오사카 일대의 군수 산업에 동원되었는데 센난과 한난 지역의 석면 공장에도 동원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내선일체라는 명목으로 한국인 징용과 징병을 본격적으로 진행했어요. 재일 한국인에 대한 강제 노역이 실시되어 오사카 지역에 사는 40만 명의 재일 한국인이 석면 방직 공장이나 군함 만드는 중공업 시설에 투입되거나 간사이공항 만드는 노역에 동원되었어요."

재일 한국인이 많은 일본 오사카 부 센난 시에서 시의원을 지냈고 '센난 석면 피해 시민의 모임'을 만든 하야시 씨의 증언이다.

▲ 1930년대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삼정리 소재 광천 석면 광산 사진. 일본 군복을 입은 사람과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보인다. 광천 석면 광산은 한국 최초의 아시아 최대 석면 광산이었다. ⓒ전국석면피해자와가족협회

1945년 해방 후 남한 지역의 석면 광산은 방치되다가 1960~70년대에 석면 경제 수요가 늘어나면서 다시 가동되다, 외국으로부터의 수입량이 증가하면서 대부분 폐광되었다. 문제는 석면광산 일대가 안전 조치 없이 방치되면서 인근 거주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석면에 노출되어 왔다는 점이다. 2008~2010년경 정부 조사에서 주민들의 석면 피해가 대거 확인되었다.

부산 지역에서의 석면 피해도 이 시기에 크게 제기되어 환경단체, 노동단체, 석면 피해자 들의 요구로 국회에서 2010년 석면피해구제법이 제정되었다. 2011년부터 시행된 이 제도에 의해 2015년 6월까지 1635명의 석면 질환 피해가 인정되었다. 이중 상당수가 충남 지역 거주자들인데 대부분이 석면 광산과 관련이 있다.

일본에서 해방을 맞은 징용 한국인 가운데 일부는 일본에 남았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석면 마을인 센난, 한난의 석면 공장에서 일했다. 이는 일본 사회에서 재일 한국인 차별과 냉대의 결과이기도 했다. 일본의 석면 산업은 군수 산업으로서 1950년대 한국 전쟁과 1960년대 베트남 전쟁 시기에 전쟁 특수를 누렸지만 노동자들의 석면 피해를 막기 위한 조치는 소홀했다.

2005년 일본의 대형 석면 공해 사건 '구보타 쇼크'가 발생하여 일본 전역에서 석면 피해가 조사되었다. 센난 지역에도 많은 석면 피해자가 나왔는데 상당수가 재일 한국인들이었다. 이들은 석면 피해를 막지 못한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가 배상 소송을 제기하여 10여 년에 걸친 소송 끝에 2014년 대부분의 원고가 숭소했다.

1971년 일본 최대 석면 회사 니치아스가 청석면 방직 기계를 부산에 옮겨 합작 회사 제일아스베스트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20여 년 동안 수 십 개의 일본 석면 공장이 한국으로 '공해 수출'되었다. 이는 1964년 굴욕적인 한일 외교 정상화 이후에 발생한 일로 박정희 군사 정권은 일본으로부터 전쟁 보상의 형식으로 공해 공장을 들여왔다. 나중에 한국에서 가장 큰 산업재해 사건을 일으키는 원진레이온공장도 일본이 한국에 공해 수출한 것이다.

공해 수출이란 환경오염과 노동자 및 주민의 건강 피해를 일으키는 산업이 자국 내의 규제가 강화되자 값싼 노동력과 규제가 없는 저개발 국가로 공장 설비를 옮기는 행위를 말한다. 공해 설비를 수입한 나라에서는 환경 문제와 건강 피해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공해 수출 국가는 생산된 제품을 수입하는 형식으로 가져가 사용한다. 생산 과정에서의 문제점만 고스란히 저개발 국가에 떠넘기며 시장 논리 또는 무역 자유화 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본과 산업의 어두운 그늘이다. 미국에서 넘어간 농약 회사 유니언카바이드가 1984년 인도 보팔에서 일으킨 보팔 참사가 대표적인 공해 수출 사건이다.

일본에서 들여온 석면 공장의 가동으로 부산은 충남의 석면 광산 피해 다음으로 전국에서 석면 피해가 많은 지역이 되었다. 니치아스의 석면 기계를 도입했던 제일E&S(당시 제일화학공업사)의 양산 공장에 근무 중이던 여성 노동자가 1994년에 석면 암인 악성중피종으로 사망했다. 이 사례는 한국 최초의 석면 피해이자 한국 최초의 직업성 암 환자이다. 이 노동자는, 생존 시 산업재해보상보험을 신청했는데 사망 후에야 인정되었다.

2007년 말 부산지법은 '제일화학 부산 공장에 근무했던 악성중피종 환자 고 원점순 씨 가족에게 석면 피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이는 석면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의 건강 피해에 대한 회사의 책임을 인정하는 최초의 판결로서 이후 수십 명의 제일화학 전직 노동자들이 단체 소송을 내는 계기가 된다. 일본과 독일의 석면 방직 기계를 들여온 제일E&S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석면 직업병을 발생시키는 회사가 되었다.

▲ 2010년 한일 합방 100년을 맞아 한국의 광산 석면 피해자와 일본 센난 지역의 재일 한국인 석면 피해자들이 국내 최대 석면 피해 지역 충남 홍성 광천 광산에서 모여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최예용

석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민 사회의 활동이 일본에서는 산업 보건 운동의 주도로, 한국에서는 환경 운동과 산업 보건 운동의 주도로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특히 2005년 구보타 쇼크 이후 한일 시민 사회 간의 교류가 매년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석면 추방 운동가들과 피해자들이 주축이 되어 2009년 4월 홍콩에서 '아시아석면추방네트워크 ABAN'이 결성되었다. 일본과 한국에서는 석면 사용이 금지되었지만 대부분의 아시아 나라들에서는 여전히 석면 사용이 계속되고 있고 일본과 한국에서 공해 수출된 석면 공장들도 많이 있다.

한국의 석면 추방 운동가들과 피해자들이 일본 센난 지역을 자주 방문하여 재일 한국인 석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일본 쪽에서는 충남 홍성과 보령 지역 석면 광산 일대를 방문하여 피해자 간에 교류한다. 이 과정을 통해 한일 시민 사회는 지난 100년 동안의 굴곡진 한일 역사 관계 속에 남아 있는 석면 문제를 인식하고 상처를 치유해가고 있다.
한일 관계 석면 문제 주요 일지

1910년 : 한일 합방
1920~1940년대 : 일제의 한반도 석면 광산 개발, 한국인 강제 징용 광산 노역.
1937년 : 중일 전쟁, 내선일체 명목으로 강제 징용 본격화.
1945년 : 광복, 일본에 남은 한국인들 센난·한난 석면 공장 지대로 이동.
1950년대 : 한국 전쟁, 일본의 군수 산업 석면 수요 증가.
1960년대 : 베트남 전쟁, 일본의 군수 산업 석면 수요 증가.
1964년 : 한일 외교 정상화, 공해 수출의 계기.
1971년 : 일본 최대 석면 공장 니치아스(일본석면) 자회사 다츠타공업, 한국 부산으로 청석면공장 이전. 제일E&S(당시 제일화학공업사), 한국 최대 석면 직업병 발생 사업장.
1970~1990년대 : 일본 센난 지역의 석면 공장 부산 등 한국으로 이전, 충남 이어 부산 석면 질환자 최다 발생 지역.
2005년 : 구보타 쇼크.
2008년 :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일본 방문단, 재일 한국인 석면 피해 지역 센난 첫 답사. 니치아스 동경 본사 항의 방문.
2009년 : 한일 석면 추방 운동가 주도로 '아시아석면추방네트워크 ABAN' 홍콩에서 발족.
2014년 : '일본 정부는 센난 지역 석면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 일본최고재판소 판결.
2015년 : '센난 석면의 비' 제막, 센난 지역 석면 피해자를 추모하기 위한 기념비.
2005년~2015년 : 매년 한일 시민 사회 교류하며 석면 문제 해결, 석면 피해자 대책 활동 공유.

(최예용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은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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