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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으로 피파 개혁은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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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으로 피파 개혁은 글렀다 [분석] 축구를 검게 물들인 피파의 부패 역사
국제축구연맹(FIFA, 피파)이 다시 부패 추문으로 흔들리고 있다. 제프 블래터 피파 회장은 장기 집권을 포기했고 새 회장 선거가 열릴 예정이다. 정몽준 대한축구협회(KFA) 명예회장을 포함해 적잖은 회장 후보들이 피파 개혁을 화두로 삼고 있다.

그러나 피파를 오랜 기간 지켜본 이들의 추적 결과를 살펴보면, 피파가 내부 개혁으로는 치료되기 힘든 중병을 앓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부패한 조직은, 외과 수술로 썩은 부위를 전부 들어내지 않는 한 또 썩기 마련이다.

피파 회장은 남다른 대우를 받는다. 제프 블라터가 이동할 때마다 안전 요원이 따라붙고, 각국 경찰이 그를 호위한다. 일등석 비행기 좌석과 오성 호텔은 필수다. 독일 정부는 이 스위스인에게 공로 훈장을 수여했고, 여러 나라 대학이 그에게 명예교수직을 줬다. 뒤에선, 돈이 돌아다녔다.

▲ 제프 블래터 피파 회장. 뒤에 보이는 두 개의 축구공 마크는 현재 사라진 상태다. 피파가 소송에서 졌기 때문이다. ⓒwikipedia.org

스포츠 자본이 검게 물들이다

1904년 피파가 창설했을 때만 해도 그 힘은 크지 않았다. 잉글랜드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곧바로 피파를 탈퇴할 정도였다. 프랑스의 쥘 리메(Jules Rimet)가 1921년 피파 회장이 되어서야 이 집단은 이름에 걸맞은 국제 축구 단체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74년, 유럽 '젠틀맨'(그간 피파의 회장은 유럽의 귀족 출신이 지냈다) 시대가 가고 벨기에계 브라질인 주앙 아벨란제(Joao Havelange)가 권력을 잡았다. 아벨란제는 한 독일인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피파 회장이 되었다. 세계적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의 2대 수장 호르스트 다슬러(Horst Dassler)가 아벨란제의 배후였다.

호르스트는 아디다스의 창립자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아디 다슬러(Adolf Dassler, 아디는 아돌프의 애칭)와는 근본부터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약관이었던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출전 선수에게 아디다스 신발을 배달하는 임무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멜버른 올림픽은 최초로 전 세계에 텔레비전 중계가 시작된 이벤트다. 호르스트는 첫 업무를 통해 스포츠 브랜드 마케팅 사업에 눈 떴다. 올림픽 이벤트 승리자에게 아디다스 브랜드를 신기면 효과가 나타났다. 그는 TV 중계 기술과 축구의 인기가 만나면 상상하지 못했던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각축전에서 그는 뒷돈을 이용한 로비에 기댔다. 각국 스포츠 연맹에 아디다스의 돈이 흘러들어 갔다. 각 나라 선수들이 아디다스 장비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스포츠는 비즈니스고, 비즈니스는 로비 자금으로 움직이는 국제 정치와 한몸이 되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관련된 각종 인사가 헤르초게나우라흐(Herzogenaurach, 독일 바이에른 주의 도시. 아디다스 본사가 있는 곳)를 찾아가, 로비를 위해 개조한 호르스트의 집에서 묵었다. 이제, 축구의 차례였다.

호르스트는 거대 스포츠 마케팅 대행사 ISL(International Sports Culture & Leisure Marketing)을 세워 피파를 상대로 스포츠 마케팅 계약 체결권을 따냈다. 그 결과 ISL은 피파가 주관하는 월드컵 공식 파트너 지정, 공식 공급 업체 지정, 월드컵 중계권 판매 사업에 모두 관여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호르스트는 이 권력을 이용해 1974년 6월, 주앙 아벨란제가 피파 회장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 피파 회장인 제프 블래터도 호르스트가 아벨란제를 감시하기 위해 피파에 심은 인물이다. 아벨란제와 블래터는 추후 적대적 공생 관계가 된다.

이로써 피파는 완전히 아디다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러나 제국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호르스트의 방만한 경영으로 아디다스는 몰락하고 나이키에 권좌를 물려줬다. 그러나 그가 만든 스포츠-권력-돈의 삼각관계 구조는 견고했다. 다슬러 가문은 아디다스를 매각했으나, ISL은 그대로 소유했다. 호르스트를 대신해 피파는 ISL과 동맹을 맺었고, 스스로 삼각 축의 핵심이 되었다.

부패의 시대

다슬러 가문의 전횡에 지친 ISL 임원 몇몇은 새로운 스포츠 마케팅 회사 '팀(TEAM)'을 설립했다. 그리고 팀은 유럽축구연맹(UEFA)을 설득해 유럽 내 클럽 대항전인 챔피언스리그 출범을 이끌었다. 축구로 들어오는 돈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피파는 가난했다. 피파는 1990, 1994, 1998 월드컵 중계권료로 고작 3억4000만 프랑을 벌어들였다. 유럽 챔피언스리그 단 한 시즌의 수익에 불과했다. 피파의 어딘가에서 돈이 샜거나, 경영을 잘못한 것이다.

UEFA가 다른 스포츠 마케팅 회사를 등에 업은 이상, 아벨란제-블래터의 피파 권력도 흔들릴 건 자명했다. 팀이 챔피언스리그 마케팅 수익으로 벌어들인 자금이 UEFA를 적실 것이며, UEFA 회원국 대표들은 이 자금을 이용해 아벨란제의 권력을 흔들려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유럽 내 축구와 관계된 모든 이가 (마치 지금 블라터를 비난하듯) 아벨란제의 부패한 피파를 청소하겠다고 위협했다.

ISL-피파(아벨란제, 블래터) 동맹은 새로운 수익원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더 많은 뒷돈을 챙겨, 세계 축구인의 표심을 돈으로 사야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월드컵 중계권에 더해 광고권 판매 시장이 본격적으로 커졌다. 축구 변방국을 피파 위원회에 꾸준히 늘리면서 검은돈을 더 받아들였다. '축구 세계화'와 피파 회장단의 뒷거래가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한때 주요 위원회에서 여섯 자리를 차지했던 잉글랜드는 2006년 월드컵 조직위원 24석 중 단 한 자리를 가질 정도로 입지가 줄어들었다. 범 브리티시 회원들이 피파 수뇌부의 비리 의혹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대신 통가, 타히티, 피지, 케이맨제도 등이 주요 위원회의 상당수 자리를 꿰찼다. 모두 블래터의 측근이었다. 돈이 얼마나 오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허울 좋은 축구 세계화의 실상이다.

기업이 월드컵 방송 시간에 갖다 붙이는 광고야말로 거액의 금광이었다. 자연히 검은돈이 흘러넘쳤다. 1995년에서 1996년에 걸친 방송 중계권과 1997년의 마케팅 권리에 관해 피파는 두 차례의 공개 입찰을 벌였다. 결과는 뻔했다. 코카콜라, 아디다스 등 오랜 파트너가 그대로 들어갔다. 피파 임원이 지속해서 뒷돈을 챙기기 위해서는 ISL의 독점권을 보장해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2002 월드컵 중계권 경쟁에서 그 추악한 뒷거래의 흔적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1995년 8월, 미국 스포츠 에이전시 IMG는 2002 월드컵 마케팅 권리를 10억 달러에 사겠다는 입장을 피파에 밝혔다. ISL과 파트너십을 끝내고 자신들과 손을 잡자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ISL로부터 뒷돈을 받고 있다는 의혹에 휩싸였던) 블래터는 시종일관 변명으로 일관했다. 돌연 2002 월드컵의 중계권과 마케팅 권리는 오직 패키지로만 판매하고, 이 독점권은 ISL에 있다고 선언했다. 이에 더해 이미 피파는 2002년과 2006년 월드컵의 독점 계약을 ISL과 체결했다는 소식까지 전했다. 누가 봐도 뒷거래가 있었음이 짐작 가능한 결말이었다.

<피파 마피아>(토마스 키스트너 지음, 김희상 옮김, 돌베개 펴냄)에 따르면, 2008년 3월 열린 재판 결과 1989년에서 2001년 사이 ISL이 각국 스포츠 연맹에 뿌린 뇌물의 총액은 1억5600만 프랑에 달했다. 그중 1800만 프랑은 피파 임원들이 빼돌린 비자금으로 확인됐다. 책에 따르면 "뇌물은 마치 봉급처럼 정기적으로 지불"되었고 이 비자금은 "몇 달마다 조세 회피처로 계좌 이체가 이뤄졌다."

▲ 프랑스 파리에서 피파 차기 회장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은 18일 오후 인천공항에서 언론을 상대로 제프 블라터 회장을 강도높게 비난했다. ⓒ연합뉴스

자정 불가능한 조폭 집단

축구가 지구촌 최대의 신앙이 되자, 축구의 인기는 더 많은 돈, 더 많은 권력을 피파에 집중시켰다. 월드컵 참가국 숫자는 32개국으로 늘어났다. 축구를 둘러싼 더 많은 사업이 만들어졌고 더 많은 프로젝트, 더 다양한 마케팅 라이선스가 개발됐다. 이젠 누구나 2022 월드컵 선정권을 카타르가 따낸 과정에 무언가 있었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카타르에서 숱한 노동자들이 죽어가는 데도 피파가 침묵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추측하고 있다. 이 모든 게 피파의 사업이 되었고, 수뇌부의 돈줄이 되었다. 1998년 아벨란제의 뒤를 이은 블래터도 다르지 않았다.

2002년 월드컵은 일본의 단독 개최가 유력했다. <피파 마피아>에 따르면, 정몽준 명예회장은 아벨란제의 사위 히카르두 테이셰이라(Ricardo Teixeira)를 공략해 흐름을 바꿨다. 입증된 건 없지만 2006년 월드컵 개최국 선정 투표 8일 전, 독일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무기 판매를 결정했고 사우디 왕족인 피파 임원은 독일에 표를 던졌다. 당시 정몽준 명예회장도 독일을 지지했다. 다임러 크라이슬러는 현대자동차에 약 8억 마르크의 자본 투자를 약속했다.

2000년 거대 회계법인 KPMG가 피파의 감사를 맡았으나, 필요한 30개 서류 중 피파가 제출한 것은 겨우 3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별문제 없이 감사는 끝났다. 이로써 KPMG도 피파와 한몸이 되었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왔다.

피파와 16년간 거래해 온 마스터카드는 2010년과 2014년 월드컵 마케팅 권리를 갱신하려 했다. 그러나 피파는 몰래 경쟁 기업 비자와도 계약을 맺었다. 블래터가 이상하리만치 비자를 고집했다. 비자와의 계약서는 위조 혐의까지 받았다. 마스터카드는 9000만 달러의 배상금을 받았고, 피파는 소송 1년 동안 신용카드 광고 파트너를 잃어 거액의 손실을 봤다. 소송 결과, 피파는 축구공이 둘 그려진 고유의 로고마저 잃어야 했다.

부패에도 위기는 왔다. 2001년, 오랜 기간 피파의 돈줄이었던 ISL이 파산했다. 2002년 5월로 예정된 피파 총회에서 블래터는 재선해야만 했다. 아직 유럽축구연맹은 그에게 적대적이었다. 권력을 잃는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이 끝난다는 말과 같았다. 더구나 피파는 바로 직전 해에 3억 프랑의 대출금까지 안고 있었다.

블래터는 월드컵 마케팅 권리 계약의 일부를 선금으로 받는 방식으로 2002년도 결산 수치를 적자에서 흑자로 바꿨다. 계약 기업의 미래 수익을 보전해주는 조건이 붙었다. 이 사실상의 회계 조작으로 피파는 오히려 4억4000만 유로를 확보했다. 그리고 매년 각 협회에 25만 달러의 수익을 보장했다. 덕분에 블래터는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실상 피파는 월드컵 독점권만 가진 빚더미 조직으로 전락했다. 월드컵이라는 화수분을 갖고 있으면서도 조직은 시간이 갈수록 더 망가진 셈이다.

개혁을 위해 내부감사위원회(IAC)가 설립되었다. 설립 초기 블래터의 대척점에 섰던 이들은 IAC가 'KPMG도 살펴보지 못한' 회장실 감찰 권한까지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블래터는 시간 끌기로 맞섰다. 피파 집행위원회원들은 각국의 엘리트다. 빠듯한 일정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귀국해야 했다. 시간을 끌던 블래터는 자신의 측근들만 남자, 그때야 표결을 진행했다. 그리고 누더기 법안을 통과시켰다. 피파 자체 개혁이란 불가능함을 입증하는 사례다.

2007년, '옛 조수'였던 미셸 플라티니(Michel Platini, 프랑스의 전설적 미드필더 출신 축구행정가)가 UEFA 회장이 되면서 마침내 블래터는 유럽까지 장악했다. 플라티니는 곧바로 UEFA 핵심 요직을 모두 갈아치웠다. 블래터는 2012년 1월 23일 <데일리메일>과 인터뷰에서 플라티니를 두고 "그는 이미 (피파 회장직에) 준비가 되어 있다. 내면 깊숙이 회장 자리를 바란다"고 말했다. 드디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줄 후임자를 찾아냈다.

올해 선거에서 유럽의 도박사들은 플라티니가 차기 자리를 물려받는 데 배팅했다. 피파는 항상 프랑스와 은밀한 관계를 이어 왔다. 만일 플라티니가 실제 차기 피파 회장이 된다면, 아벨란제-블래터의 뒤를 잇는 철권통치는 흔들림 없이 유지될 것이다. 다른 개혁가의 손을 들어줘야 한다고? 그런 사람이 누가 있나?

정몽준 명예회장은 지난 17일 프랑스 파리의 샹그릴라 호텔에서 차기 피파 회장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블라터와 측근들이 40년간 구축한 부패 체제를 청산해야 한다"는 출마 일성을 밝혔다. 피파 회장과 집행위원회 간 상호 견제 기능을 강화하고 재정 투명성을 높이는 한편, 회장직 임기에 제한을 둔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러나 그도 오랜 기간 피파의 부회장이었다. 아시아축구연맹(AFC)은 정 명예회장이 지난 2010년 파키스탄 홍수 당시 기부한 40만 달러에 대한 조사를 피파에 요청한 상태다. 피파 부회장 선거를 앞둔 때였다. 당장 정 명예회장이 이끌던 대한축구협회부터 여러 잡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패한 조직을 내부에서 개혁하는 건 불가능하다. 키스트너의 말대로 "권력욕을 가진 정치가는 축구를 상대로 절대 중립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피파 수뇌부 모두가 부패 의혹을 받고 있는데, 현 집권자를 치운다 한들 다른 부패 권력이 그 자리를 차지할 뿐이라는 냉소가 축구계 전반에 걸쳐 깊다. 권력과 관계없는 이가 피파에 필요하다. 외부의 기관이 피파를 깊숙이 감시할 수 있어야 하고, 총회는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조직을 개혁해야 한다. 회장의 권력을 크게 축소해야 한다.

축구는 여전히 온 세계인의 꿈이다. 아스날(Arsenal FC, 영국 런던의 축구 클럽)의 인기 스타 알렉시스 산체스(Alexis Sanchez)는 칠레의 가난한 탄광촌에서 맨발로 축구공을 차며 가족을 일으켰다. 지금도 이런 신화가 가난한 나라의 오지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들에게 축구는 삶을 바꿀 유일한 희망이다. 피파는 이런 희망을 더러운 돈잔치로 바꿔, 축구를 '쩐의 전쟁' 판으로 물들였다. 몇몇 부패한 조폭과 같은 이들이 노동자의 신화에서 세계인의 종교가 된 스포츠를 좀먹고 있다는 건, 실로 불행한 일이다.

▲ 축구는 여러 사람의 희망이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이득을 본 건 선수나 팬이 아니다. 누굴까.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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