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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일성, 1인 독재 위해 뒷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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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정희와 김일성, 1인 독재 위해 뒷거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10> 유신 쿠데타, 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현대사 이야기 연재 이전 주제 바로 가기]

[유신 쿠데타, 첫 번째 마당] 여당도 당황케 한 청와대의 '공화국 죽이기' 작전

[유신 쿠데타, 두 번째 마당] 궁정동의 은밀한 '사업'과 박정희, 그 특별한 관계

프레시안 : 용어 문제를 짚었으면 한다. 박정희 세력은 5.16쿠데타에 대해서는 '혁명'이라는 강변을 많이 했다. 그렇지만 1972년 10월 17일의 이 사건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내세우는 대신 10월유신으로 규정했다. 혁명이라고 하기에는 자신들도 낯 뜨거워 그렇게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한 10월유신이라는 말을 그대로 써도 무방할지, 아니면 유신 쿠데타나 10.17쿠데타로 불러야 할지도 따져볼 문제다.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서중석 : 10월 17일 일어난 사건을 1972년 10월 17일 쿠데타라고 하면 너무 긴 것 같고, 유신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붙은 건 그 이후이기 때문에 이걸 유신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점도 조금은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딱 적당한 말이 없는데 10.17쿠데타, 유신 쿠데타를 병용하면서 어떤 말이 제일 적합한지 찾아봤으면 좋겠다.

10월 17일 박정희가 발표한 특별 선언을 보면 "유신적 개혁"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니까 10월 17일 이때 이미 유신이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주일 후인 10월 24일 유엔데이를 맞아 한 치사에도 "유신적 개혁"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다가 쿠데타 열흘 후인 10월 27일, 헌법 개정안에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서명하는 날이던 이날 윤주영 문공부 장관이 10.17 특별 선언을 10월유신으로 통일해서 부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때부터 10월유신이라는 말이 쓰이면서 10.17쿠데타를 10월유신이라고 권력 쪽에서는 부르게 된다. 그러면서 그 헌법을 유신 헌법이라고, 또 그 헌법으로 있었던 권력 체제를 유신 체제라고 부르게 된다.

프레시안 : 유신이라는 말은 근대 들어 동아시아에서 특정한 맥락에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메이지 유신과 쇼와 유신도 그렇고, '위안부' 관련 망언 등으로 악명이 높은 일본 극우 정치인 하시모토 도루가 만든 정당이 유신당이라는 데서도 이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유신이라는 말은 동아시아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쓰인 표현이다. 어떤 식으로 사용됐나.

서중석 : 원뜻을 살펴보면 유신은 혁신이라는 말과 비슷한 점이 있다. 일본에서는 1930년대 같은 때에 파시스트, 군국주의자들이 혁신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우리나라에서도 극우 세력이 혁신이라는 말을 쓴 경우가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나 일본에서는 혁신이라는 말이 대개 진보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어쨌건 혁신이든 유신이든 뭔가를 새롭게 고친다는 뜻이다.

한자 사전에서 유신 뜻풀이를 찾아보면 모든 걸 고쳐 새롭게 함, 묵은 제도를 아주 새롭게 고침, 이런 식으로 돼 있다. 중국의 <서경>을 보면 구염오속함여유신(舊染汚俗咸與維新, 예전에 물든 더러운 습속을 모두 새롭게 하다)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유신이라는 말은 만사가 개신된다는 뜻으로 사용됐다. <시경>에도 유신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주수구방기명유신(周雖舊邦其命維新), 그러니까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지만 그 명을 새롭게 해서 오래오래 간다는 뜻이다. 여기서 유신이라는 표현은 정치 체제가 새롭게 혁신된다는 뜻으로 쓰였다. 내가 알기로는 메이지 유신을 할 때 이러한 뜻을 차용했다.

그러면 박정희의 유신은 뭘 가리키는 것이냐. 이것과 관련해 메이지 유신이냐 쇼와 유신이냐를 가지고 얘기가 나오고 있다.

유신 쿠데타와 더 깊은 관계가 있는 건 메이지 유신이 아닌 쇼와 유신

프레시안 :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박정희 본인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 않나.

서중석 : 메이지 유신은 몇 가지로 얘기를 할 수 있다. 우선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생각할 수 있다. 존왕양이는 어떻게 보면 척사적인 것 같은데 이게 나중에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내세운다는 뜻으로 된다. 메이지 유신에는 이런 뜻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서양의 새로운 문명, 문화를 일본식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메이지 유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천황 절대주의나 관료제, 그리고 조슈와 사츠마의 두 번을 중심으로 하고 천황을 정점으로 해서 형성된 과두 권력에 의한 개혁을 메이지 유신으로 보기도 한다.

박정희는 1961년 11월 미국에 가기 전 일본에 들르는데, 이때 메이지 유신과 관련해 이야기한 것으로 돼 있다. 일본에 들른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를 두 차례에 걸쳐 만났다. <기시 노부스케의 회상>에 따르면 이때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킬 때 메이지 유신 지사들을 떠올렸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부분은 참 많이 인용되는 대목이다. 이런 부분을 근거로 박정희의 유신이 메이지 유신 지사를 본받으려 한 것이라든가, 쿠데타 때 메이지 유신 지사를 떠올렸다고 한 것과 연관해 유신을 설명하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데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를 일으킬 때 정말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박정희는 1963년 발간된 <국가와 혁명과 나>에 세계사에서 부각된 혁명의 각 양태에 대해 썼는데, 거기에 두 번째로 '명치 유신(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근대화'라는 6쪽짜리 짧은 글이 있다. 거기서 박정희는 메이지 유신이 그 사상적 기저를 천황 절대주의의 국수주의적인 애국에 두었다고 설명했다. 메이지 유신을 박정희가 어떻게 이해했느냐 하는 문제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메이지 유신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건 일본에서 그렇게 많이 얘기되고 우리도 잘 아는, 막부 말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려 할 때 활약한 지사들에 대해 이 책에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 지사들에 대해 박정희가 이러저러하게 말했다'고 기시 노부스케가 이야기한 것과 부합하는 내용이 이 책엔 안 나온다.

물론 이 책에서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근대화 부분은 전문가들이 써준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다가 박정희가 부분적으로 자기 의견을 달았다고 난 본다. 그렇지만 아무리 전문가들이 조력자로서 상당 부분을 써줬다고 하더라도 박정희 자신이 '막부 말, 메이지 유신기의 지사들이 중요하다. 난 거기에서 감동을 받았다'고 하면 그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야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예컨대 "지사들이 메이지 유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든가 하는 말이 들어갔을 텐데 그에 관한 언급이 없다. 이런 것으로 볼 때, 메이지 유신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박정희도 했을 것이라는 건 당연하지만 박정희의 유신이라는 것이 거기서 연유한 것인가 하는 부분은 조금 불확실한 점이 있다.

프레시안 : 메이지 유신보다는 쇼와 유신 쪽이 박정희의 유신 쿠데타와 더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뜻인가.

서중석 : 박정희가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기저로 천황 절대주의의 국수주의적인 애국을 들지 않았나. 그게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1930년대 쇼와 유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거기서는 천황을 그야말로 절대화, 신격화하면서 현인신(現人神), 살아 있는 인간신이라고까지 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쿠데타를 일으켜 군인들을 중심으로 단칼에 굉장한 개혁을 하고 강력한 통치를 해야 한다는 쇼와 유신을 부르짖지 않나. 황도파의 영향을 받은 일본 청년 장교들이 1936년 2.26쿠데타를 일으킨 것도 그 때문인데, 박정희가 영향을 크게 받은 건 이쪽이 아니겠느냐고 많은 연구자가 쓰고 있다. 나도 그쪽이 더 맞지 않겠느냐고 본다.

물론 메이지 유신이 중요한 것도 틀림없고 박정희가 그걸 중요한 것으로 봤던 것도 틀림없다. 그렇지만 박정희가 왜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는가와 관련해서 볼 때는 쇼와 유신과 박정희 유신 체제가 더 근접성이라고 할까, 상관성이 많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1년 일본에 들렀을 때 기시 노부스케를 두 차례 만났다. 기시 노부스케는 이때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킬 때 메이지 유신 지사들을 떠올렸다'고 말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렇지만 유신 쿠데타와 관련해 박정희가 더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은 메이지 유신이 아니라 쇼와 유신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은 1977년 9월 29일 청와대에서 악수하는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연합뉴스


유신 체제와 유일 체제는 박정희·김일성이 짜고 친 고스톱?

프레시안 : 유신 쿠데타 문제를 짚을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 시기 국제 정세와 북한의 변화다. 1970년대 초 국제 사회에 데탕트 흐름이 나타난다. 한반도에서도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나오며 그에 발맞추는 듯했다. 그런데 이러한 긴장 완화 조류를 뒤집고 그해 연말 남한에서는 유신 체제가 나타나고 북한에서는 유일 체제가 강화된다. 남북한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1인 독재 권력이 강화된 것을 두고 '박정희와 김일성이 모종의 뒷거래를 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다. 이 문제, 어떻게 보나.

서중석 : 박정희의 유신 체제와 주체 사상의 나라, 수령 유일 체제가 1972년 남북한 양쪽 헌법에 같이 나타난다. 남한에서는 그해 10월 헌법안으로 나와서 11월 국민 투표로 결정되고 북한에서는 12월에 수령 유일 체제, 주체 사상의 나라 헌법이 공포됐다. 이것에 대해 거울(mirror) 효과로도 보고 '짝퉁'이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남북한 권력자들이 짜고 친 고스톱 아니었느냐, 7.4남북공동성명을 이용해 서로 독재를 해먹은 것 아니냐고 비난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그게 사람들한테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 다가가는 모양이다.

이 시기에 공포된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은 국가주석직을 설정하고 국가주석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끔 했다. 또한 국가주석이 명실공히 국가의 최고 지도자임을 헌법에서 규정했다. 그런 점에서는 유신 헌법과 비슷한 점이 있다. 그렇지만 북한이 실질적으로 주체 사상의 나라가 되고 김일성의 수령 유일 체제와 비슷한 면모를 갖추는 건 1972년 사회주의 헌법 공포 이전이다. 그전에 이미 그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해방 후 북한 정권은 여러 세력이 권력을 나눠 갖는 형태로 출범하는데, 그 후 김일성 계열을 제외한 여타 세력이 차례로 제거된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로당 계열이 거세되고 특히 1956년 8월사건을 거치면서 연안파와 친소파, 이 두 개의 중요 세력이 거세된다. 8월사건에 연루된 세력들이 완전히 제거되는 게 확인되는 시기는 1958년인데, 이 사건을 거치면서 김일성을 실질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어떤 세력도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면서 이 무렵 천리마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이 운동은 사상 개조 운동과 병행해 1958년 크게 확대되고 1959년에도 거대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큰 규모의 농업 협동조합에 의한 농업 협동화가 1958년에 완수되고, 시장 경제 요소를 없애는 것이나 공업 부문을 사회주의적 공업 소유 형태로 바꾸는 작업도 그전에 이미 이뤄진다. 이런 여러 면에서 1958∼1959년에는 김일성 중심의 사회주의 체제가 북한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에 가면서 이게 바로 수령 유일 체제, 주체 사상의 나라로 가진 않았다. 이것이 주체 사상의 나라, 수령 유일 체제로 가는 데에는 1960년대 북한의 상황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프레시안 : 어떠한 상황 변화가 그러한 전환에 영향을 줬나.

서중석 : 무엇보다도 북 3각 체제와 남 3각 체제가 1960년대에 엄청난 변화를 맞게 된다. 남쪽의 경우 1950년대까지는 한일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1965년 말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짐으로써 미국이 구상하고 있던 미국-일본-한국의 수직적 안보 체계, 공산권에 대항할 수 있는 동아시아 안보 체계 구성 작업이 잘돼가고 있었다. 그에 비해 북쪽 권력과 깊은 관계에 있던 중국과 소련은 1950년대 말부터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중소 분쟁은 1960년대에 가면 더 심해진다. 즉 북한-소련-중국의 3각 체제는 이미 1957∼1958년부터 균열을 보이고 1960년대에 들어서면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가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월남전에 대해서도 남북이 굉장히 긴장하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남쪽에서는 월남에 대규모 파병을 하지 않나. 그에 맞서 북베트남을 지원하는 방법, 그리고 그것과 함께 북한의 군사 체제 강화 같은 것이 북한으로서는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북한과 긴밀한 관계에 있어야 할 중국과 소련은 심각한 분쟁 상태였다. 북한으로서는 남의 3각 체제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 체제를 강화하고자 엄청난 군사비를 쓸 수밖에 없었다.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 같은 이야기가 나온 것도 이 무렵인데, 어쨌건 1967년에 가면 북한이 군사비에 쏟아부은 금액이 예산의 30퍼센트를 넘어섰다. (1965년 4월 김일성은 인도네시아에서 한 강연을 통해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가 조선노동당의 일관된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편집자>) 북한에서는 예산이 GNP와 별 차이가 없는데, 정말 굉장한 비용이 들어간 것이다.

그러면서 경제가 계속 곤경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북한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나중에 중국에서 하게 되는 개혁·개방 같은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인민의 열정과 사상에 의해, 그러니까 나중에 주체 사상 또는 그쪽에서는 혁명 사상이라고도 이야기되는 그런 사상으로 경제난을 타개하려는 움직임을 1960년대부터 전면적으로 보이게 된다. 다시 말해 1960년대 북한에는 강력한 존재가 이미 한 명 있었고, 여러 상황 변화 속에서 수령 유일 체제로 그걸 구체화해나가는 것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이면, 문화혁명이 일어났을 때 중국 쪽에서 김일성을 공격한 것도 김일성 쪽으로 하여금 주체 사상의 나라로 가게 하는 데 상당히 큰 역할을 직접적으로 했다. 이 시기에 북한 쪽에서 중국에 대한 아주 강한 반발과 비판을 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소련하고는 이미 사이가 굉장히 나빠진 상태였다. 그러면서 북한은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더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김일성 유일 체제는 1972년 헌법 공포 전 실질적으로 이미 등장

프레시안 :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변화를 되짚어보면 1956년 8월사건이 중요한 분수령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8월사건의 밑바탕에는 전후 복구 및 경제 건설을 둘러싼 노선 갈등이 있었다. 중공업 중심 노선을 내세우고 사회를 급속히 사회주의 체제로 개조하려 한 김일성 계열과 달리, 연안파(연안 독립동맹 계열)는 인민의 생활 수준을 높이기 위한 경공업 건설과 농업 발전에 무게를 두고 당내 민주주의도 주장했다. 그러한 연안파가 8월사건으로 제거된 것은 북한 역사에 여러모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1955년을 전후해 북한의 일각에서 나왔던 주장대로 더 부드러운 사회주의 체제로 갔으면 북한이 앞에서 이야기한 방향으로 가지는 않았으리라고 본다. 그렇지만 북한은 권력이건 경제 체제건 훨씬 더 경직된 체제로 나아갔다. 북한 사람들은 사회주의 체제라고 부르지만 난 아주 경직된 체제라고 보는데, 어쨌건 그것으로 강하게 나아가고 그걸 더 몰아붙이는 쪽으로 가려다보니까, 그리고 남한 및 남쪽 3각 체제와 대결하려다보니까 북한을 더욱더 제도적으로 한 사람의 지도자 속에 묶어 넣으려는 움직임이 커져갔다고 볼 수 있다.

일제 때 있었던 빨치산 활동을 높이 평가하는 작업이 1950년대 말부터 이뤄지고 그 사람들의 활동 기록 같은 것이 연달아 나오는데, 처음부터 개인숭배하고만 연관됐던 건 아니지만 나중에 가면 연관이 된다. (북한 정권은 1959년부터 <항일 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를 널리 배포하고 이를 학습하게 했다. 만주 일대에서 전개됐던 항일 무장 투쟁에 대한 학습은 초기에는 그 역사를 이어받는다는 측면에 무게를 뒀으나, 그 후 김일성 개인숭배 성격이 강화됐다. 특히 1960년대 중반 이후 이런 현상이 심해졌다. <편집자>) 그러면서 1965년에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 같은 네 가지가 나오고, 1966년 조선노동당 제2차 당 대표자 대회 이후 수령에 대한 숭배가 훨씬 더 강화된다.

북한에는 1945∼1946년부터 김일성 숭배가 있었지만 그때와 이때는 양적,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1967년을 전후해서는 김일성 개인은 물론이고 그 어머니 강반석을 비롯한 김일성의 가족, 그것도 외가까지 포함해 김일성 일가를 숭배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만경대 생가를 신성시하는 것도 이 시기에 나타난다.

이 당시 휴전선 이남 서해안 지방 중 일부에서도 북쪽 방송이 들리는 경우가 있었다고 그런다. 예컨대 농민이나 어민들이 일기 예보를 들으려고 라디오를 틀어놓으면 북쪽 방송이 잡히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서해를 통해 그렇게 된 것 같은데, 어쨌건 그렇게 들려온 북쪽 방송에서 1967년 무렵 김일성 개인과 그 일가에 대한 숭배가 너무 심해서 '저런 사회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고 했다고 하더라. 그때 중국은 문화혁명 시기였고 문화혁명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모택동(마오쩌둥) 이름 앞에 그 사람을 숭배하는 수사가 서너 개 붙기도 했지만, 김일성 앞에 붙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게 김일성 숭배가 강조되던 시기인 1967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대남 총책이던 이효순, 당 간부였던 박금철 같은 사람들이 숙청됐다. 갑산파라고 불린 이 사람들은 대개 조국광복회와 관련 있던 사람들이었다. (조국광복회의 정식 명칭은 재만한인조국광복회다. 1936년 결성된 항일 민족 통일 전선 단체로 김일성 쪽과 연계를 맺었다. <편집자>) 이 사람들도 김일성 지지 세력이었다. 김일성 지지 세력으로 빨치산 세력과 이 세력, 이 두 개가 있었는데 그중 더 직접적인 쪽은 빨치산 세력이었다. 그리고 이효순은 온건 세력을 마지막으로 대표한 인물로 꼽힌다. 그러한 갑산파까지 제거되고 거의 같은 시기에 강경파가 등장하면서 1968년 남북 간에 여러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

지금까지 쭉 살펴본 것처럼, 1960년대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상황 변화 속에서 김일성 신격화라고 할까, 실질적인 주체 사상의 나라, 수령 유일 체제가 1967년쯤 되면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건 바로 그것이다. 1970년 11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 이건 1961년 이후 9년 만에 열린 대회였는데 여기서 사상, 기술, 문화의 3대 혁명을 더욱 심화하자고 하면서 그러한 수령 유일 체제가 강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1972년 사회주의 헌법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유일 지도 체제를 구축하고 사상 개조 또는 혁명 의식 강화를 통해 경제난을 타개하려는 움직임이 1960년대 후반에 나타났고 그게 1970년대에 더 강화되는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972년 북한과 남한에서 나타난 권력 체계의 경직화 현상을 동일시해서 거울 효과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건 별로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난 예전부터 이것을 거울 효과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건 좀 안 맞지 않느냐는 생각을 했다.


▲ 1972년 사회주의 헌법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사진은 평양의 축구 경기장을 시찰하는 김일성 부자의 생전 모습. ⓒ연합뉴스


북한의 분수령이 된 1956년 8월사건…"반종파 투쟁" 규정은 부적절

프레시안 : 데탕트 흐름에 대한 반응으로 북한에서 유일 체제가 등장한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는데, 실제로는 그것과 별개였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서중석 : 그 이전에 이미 그렇게 됐다. 북한으로서는 북의 3각 체제 붕괴가 제일 무서운 것이었다. 그것에 반비례해 남의 3각 체제는 갑자기 강화되지 않았나. 그 이전에 없었던 현상이 안보, 경제, 그리고 월남 파병을 포함한 군사 부문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이 그 방향으로 무섭게 나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북한 경제가 잘 안 돌아가지 않았나. 이미 1958∼1959년 무렵부터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모습을 보였는데, 1960년대에 와서는 그게 더 안 돌아가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럴수록 북한은 인간 개조를 통해 뭔가를 해보려는 방향으로 가버린 것이다. 수령에 의해 하나로 뭉쳐 처리하는 식이었는데, 아주 잘못된 방식이었다.

1955∼1956년 논쟁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연안파에서 주장한 것처럼 부드러운 사회주의 체제로 나아가고, 아울러 8월사건을 그런 식으로 일으키지 말고 연안파, 친소파 중에서 좋은 사람들과는 손을 잡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프레시안 : 정리하면, 유신 헌법과 유일 체제 헌법이 거의 동시에 나타났지만 그 맥락과 경로는 달랐다고 이해하면 되나.

서중석 : 그렇다. 북한에서는 이미 그전에 다 그렇게 형성돼가고 있었던 것이고, 김일성 노선에 따른다면 그렇게 형성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 김일성 노선은 아주 경직된 노선이고 그런 노선을 택한 게 잘못이었다. 그렇지만 잘못된 길을 택했다 하더라도 한 번 그렇게 정해지면 또 그 운동을 해나가게 되는 것 아닌가.

이런 문제는 오늘의 북한을 이해하는 데에도 굉장히 중요하다. 오늘의 북한까지 다 연결되는 문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프레시안 : 용어 문제를 하나 더 짚었으면 한다. 1956년 8월사건을 북한에서는 반(反)종파 투쟁으로 규정한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여전히 적지 않다. 그런데 반종파 투쟁이 적절한 규정인지 의문이다. 반종파 투쟁이라는 용어는 연안파에 종파라는 낙인을 찍고 그걸 제압한 김일성 세력만이 옳았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계파 간 권력 다툼의 성격만이 아니라, 북한 사회가 나아갈 길을 둘러싼 노선 갈등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는 점을 가린다는 점에서도 부적절해 보인다.


서중석 : 반종파 투쟁이 아니라 1956년 8월사건으로 불러야 한다. 연안파는 종파가 아니었고 종파 싸움을 하려던 것도 아니었다. 사회주의 원칙을 나름대로 견지하려 했다. 남로당의 경우 문제가 심각했고 종파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만한 게 그 안에 있었다고 보지만, 연안파는 그렇게 봐선 안 된다. 공생했어야 하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 모택동은 문화혁명 때 등소평(덩샤오핑)을 죽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모택동이 죽은 후 등소평은 4인방(장칭,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는다. 그러고 나서 오리아나 팔라치라는 유명한 이탈리아 여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오리아나 팔라치가 천안문 광장에 걸려 있는 모택동 초상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자, 등소평은 "영원히 보존할 것"이라면서 "주석(마오쩌둥)의 과오는 공적에 비해 부수적인 것"이라고 답했다. 또한 "우리는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다루듯이 마오쩌둥 주석을 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등소평이 이런 태도를 취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자신이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모택동이 보호해준 것도 그와 연관해 생각해볼 수 있다. 모택동이 말기에 가서 사실상 황제 역할을 하긴 했지만 반대파를 완전히 없애려고 하지는 않았다. 당이라는 건 반대파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중국과 달리 반대파 일소한 북한, 스스로 출구 봉쇄한 격

ⓒ오월의봄
프레시안 :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마오쩌둥의 주요 정적으로 꼽히던 류사오치 등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그렇지만, 지적한 것처럼 모든 정적이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덩샤오핑을 비롯해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마오쩌둥 사후 다른 노선으로 중국을 이끌었다. 그렇게 해서 중국은 그전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이와 달리 북한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세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8월사건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권력 중심부에서 한때 밀려났다고 하더라도 북한이 위기에 처했을 때 돌아와서 다른 노선을 제시할 수 있는 세력을 남겨놓지 않았다. 북한 정권의 그러한 잘못된 선택이 위기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을 가능성을 스스로 대폭 축소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그런 세력이 없어지고 김일성 노선 하나만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마땅한 방법을 찾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정일 문제도 생각해볼 수 있다. 1964년 대학을 졸업한 김정일은 1967년 갑산파를 제거하는 데 관여한 것으로 돼 있다. 중국에서 임표(린뱌오) 사건이 나고 나서 3년이 지난 1974년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 추대되는데, 임표 사건도 여기에 영향을 줬다. (저명한 홍군 지휘관 출신인 린뱌오는 문화대혁명 기간에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떠올랐다. 그 후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자 린뱌오는 마오쩌둥을 암살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계획이 발각되자 린뱌오는 소련으로 망명하려다 도중에 생을 마감했다. 린뱌오 사건은 마오쩌둥에게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줬을 뿐만 아니라, 김일성에게도 후계자 문제를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게 만든 계기로 꼽힌다. 린뱌오 사건 2년 후인 1973년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장 겸 선전선동부장으로 임명되며, 당의 핵심 기구인 조직과 선전 부문을 장악하게 된다. 이듬해인 1974년 2월에는 당 중앙위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는 한편 후계자로 추대된다.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먼 부자 세습 결정을 북한이 곧바로 대외에 공표한 것은 아니다. 김정일이 후계자임을 북한에서 공식 천명한 때는 1980년이다. 그 사이에 김정일은 북한 신문 등에서 "당 중앙"으로 불렸다. <편집자>)

난 김정일이 여기서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본다. 김정일이 나중에는 어떻게든 북한을 구해보려는 노력을 나름대로는 했다고 보지만, 이 무렵 김정일은 3대 혁명 소조 운동 같은 걸 너무 강조하고 김일성 우상화에 박차를 가했다. 전국에 그 거대한 김일성 동상을 만든 작업도 김정일이 지휘한 것이다. 북한이 아주 경직된 노선으로 가게 하는 데 김정일도 결정적 작용을 했다. 그러면서 주체 사상을 체계화하는 데에도 앞장서지 않나.

그 후 언젠가부터 그게 잘못이었다는 걸 김정일이 알았다고 본다. 특히 1994년 김일성이 죽은 후 정말 심각한 위기를 만나지 않았나. 그 이전인 1990년대 초반에도 북한은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고 소련, 중국도 남한하고 국교를 맺지 않았나. 북한으로서는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러니 핵무기로 더 간 것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열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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