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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지옥'을 기록하자, 세상은 '구원'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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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지옥'을 기록하자, 세상은 '구원'을 얻었다 [2015 노벨상 읽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우리 시대의 아픔과 용기를 담아내는 데에 기념비적인 공로를 세웠다."

벨라루스 출신의 여성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67)가 2015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로 선정되었다. 기자 출신의 알렉시예비치는 허구가 아닌 여럿의 인터뷰에 기반을 둔 르포르타주로 '목소리 소설' 혹은 작가 자신의 말로는 '소설-코러스'라고 부르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문학의 외연을 넓혔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가 한 수천 건의 인터뷰는 우리가 잘 몰랐던 인간 존재의 역사(사건의 역사)를 알려주는 동시에 감정의 역사, 영혼의 역사를 보여준다"며 "우리 시대의 아픔과 용기를 담아내는 데에 기념비적인 공로를 세웠다"고 노벨 문학상 선정 이유를 밝혔다. 노벨 생리의학상(기생충 연구)에 이어서 다시 한 번 노벨상이 인류의 '고통'과 그 '극복'에 주목한 것이다.

이 시점에 알렉시예비치의 수상은 특히 각별하다. 올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그가 저자로서 이름을 세상에 알린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1985년)는 제2차 대전 참전 여성 200명을 인터뷰해 그들의 목소리를 엮은 책이다. 여성으로서 온몸으로 전쟁을 체험한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는 남성 중심의 전쟁 이야기를 전복한다.

올해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진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알렉시예비치는 그 핵폭탄의 부산물인 핵발전소가 낳은 우리 시대의 가장 끔찍한 비극 가운데 하나인 1986년 체르노빌 사고 피해자를 만나서 사고의 참상과 고통을 담았다. 10년간 이어진 그의 작업은 1997년 <체르노빌의 목소리>로 세상에 나왔다.

알렉시예비치가 체르노빌의 고통을 증언한 지 채 20년도 되지 않아서 2011년 일본 후쿠시마에서는 다시 한 번 핵발전소 사고가 이어졌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노벨 문학상이 그에게 돌아감으로써 20세기에서 21세기로 이어지는 핵에 의한 고통이 다시 한 번 조명될 가능성이 크다.

알렉시예비치는 1948년 5월 31일 우크라이나 이바노프란콥스크에서 당시 군인이던 벨라루스 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 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 있는 벨라루스 국립대학교 언론학과를 1972년 졸업하고 나서는 공립학교 교사를 거쳐서 지역 신문 기자로 일했다.

알렉시예비치는 이후 기자로 일하면서 첫 책 <나는 마을에서 떠났다>를 집필했으나, 시골 주민의 도시 이주를 금한 소련 정부의 정책을 비판한 탓에 출판되지 못했다. 정부 당국과의 악연은 계속되었다. 1983년 탈고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참전 여성을 '영웅'으로 그리지 않았다고 2년이나 출판이 금지되다 1985년에야 출판되었다.

알렉시예비치가 10년간 혼신을 기울여 1997년 펴낸 <체르노빌의 목소리>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았으나 정작 모국 벨라루스 정부는 그의 모든 책을 절판하고 학교 교과 과정에서도 삭제했다. 저자가 증언한 고통의 목소리를 감당할 능력이 그의 모국에는 없었던 것이다.

현재 프랑스에 있는 알렉시예비치는 스웨덴 시각 8일 오전 11시에 발표된 노벨 문학상 당선 소식에 "다림질하다가 전화를 받았다"며 "수상 소식을 듣자마자 이반 부닌,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등 노벨 문학상을 받은 (선배) 러시아 작가들의 이름을 떠올렸다"고 답했다. 그는 "한편으론 정말 환상적이지만 동시에 혼란스럽다"고 덧붙였다.

국내에 출간된 알렉시예비치의 책은 2011년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 <체르노빌의 목소리>(김은혜 옮김, 새잎 펴냄)가 나온 것이 유일했다. 대형 출판사 문학동네가 8일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펴냄)를 작가의 노벨상 수상과 동시에 펴냈다. '고통의 목소리'가 상업 출판의 돈벌이 수단으로 변질되는 씁쓸한 현실이다.

ⓒnobelprize.org

<프레시안>은 2011년 '프레시안 books' 지면을 통해서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여러 번 비중 있게 조명했었다. 2011년 9월 16일 이계삼 당시 밀성고등학교 교사가 쓴 <체르노빌의 목소리> 서평을 다시 한 번 싣는다. 이계삼 씨가 이 서평을 쓰고 나서 몇 개월 뒤 2012년 1월 16일 경상남도 밀양에서는 이치우(74) 어르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관련 기사 : [변방의 사색] 부산 핵발전소 사고! 대통령의 행방은?)

이치우 어르신은 핵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옮기고자 밀양에 세워지는 고압 송전탑이 평생을 지켜온 삶의 터전을 훼소하는 것에 항의해 분신했다. 이 사건 이후 지역 노인이 중심이 된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조명을 받았다. <체르노빌의 목소리> 서평을 쓴 이계삼 씨는 교사를 그만두고 송전탑 반대 운동의 중심에서 지금까지 싸우고 있다.

"1986년 4월 26일, 하룻밤 사이에 우리는 새로운 역사적 공간으로 이동했다."

▲ <체르노빌의 목소리>(김은혜 옮김, 새잎 펴냄). ⓒ새잎
<체르노빌의 목소리>의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이 역사적 전환의 의미를 올해 후쿠시마 사태가 일어날 때까지 사실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체르노빌의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옮겨 적은 이 책을 읽으며 대단히 고통스러웠다. 나는 지금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통해 후쿠시마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옮겨보려고 애쓰고 있지만 잘 될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아직도 이 사태의 의미를 가늠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에 등장하는 언어들은 하나같이 시적이고 철학적인 아우라를 거느리고 있다. 체르노빌은 참조할 만한 그 어떤 선례도 없었다. 그 원인을 무언가에 돌리기엔 그것들이 초래한 결과에 대조하니 너무나 빈약했다. 그들은 언어의 무력함을 느껴야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은 근원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고통은 시적인 언어로밖에 담아낼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옮겨 적은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이 지금껏 지구의 종말을 그려냈지만, 우리의 삶보다는 기이하지 않다"고.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이 주로 살고 있는 벨라루스는 체르노빌이 속한 우크라이나의 접경국이다. 사고 당시 바람의 방향 대문에 체르노빌 사고에서 배출된 방사성 물질의 70퍼센트가 도달하게 되었다. 국토의 4분의 1이 오염되었고, 4분의 1의 숲이 못쓰게 되었고, 암환자는 74배가 늘어났다. 사고 이후 몇 년간 전체 아이들의 90퍼센트가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변화해버린 끔찍한 재앙을 겪었다.

모든 것이 낯선 세계였다. 오염된 땅의 표토를 카펫 말듯이 둘둘 말아 구덩이에 파묻는다. 풀도 나무도 벌레도 함께 파묻힌다. 살아있는 모든 짐승들을 사살한다. 그리고 구역 내 모든 인간들을 강제로 이주시킨다. 거대한 굴삭기로 집을 떠서 묻고, 자동차와 오염된 모든 물건들을 파묻는다. 그 작업에 강제로 동원된 이들의 상당수는 병들어 죽었고, 지금도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그들의 2세들도.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진보'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100년 후면 사람이 아름다워질 것'이라던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믿음 같은, 그런 기대가 지금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렸는지를 생각했다. 그 100년 사이에 우리는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와 체르노빌과 9·11과 후쿠시마를 겪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현실은, 대한민국 경상남도에 살고 있는 나에게도, 내 자식에게도, 내 자식의 자식에게도 반드시 재현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그렇지 않겠는가?

원자력이 안전하다고?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지금 체르노빌처럼, 거기 아이들처럼, 거기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처럼, 거기를 떠난 사람들처럼 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이것을 깨닫게 되었다. 재앙의 범위와 밀도의 차이일 뿐이다. 이 세계는 체르노빌과 같은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고, 체르노빌을 향하여 가고 있다. 후쿠시마는 하나의 기착지가 될 것이다. 나는 이 세계사적 전환의 의미를 이 책에서 얻은 바를 바탕으로 조금 소개하고자 한다.

되돌아온 사람들

여기는 체르노빌 발전소 인근의 오염 구역이다. 사고가 나고, 전국 각처에서 징집된 군인들이 구역으로 들어왔다. 모두를 쫓아냈다. 작은 보따리 하나와 고양이를 데리고 오는 할머니는 말한다. "고양이 없이는 못 가. 어떻게 혼자 두고 가. 내 가족이야". 그들은 하루아침에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 '체르노빌 세상'에 착륙했음을 믿지 않았다. 그들 삶의 오래된 의미가 그렇게 한순간에 삭제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번도 버린 적 없었던 자기들의 땅, 생을 마치면 겸손하게 땅의 일부가 되었던 오래된 삶의 방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쫓겨났다. 대문에 못을 치고 버틴 사람도 끄집어냈다. 그러나 다시 되돌아왔다. 어디를 가도 그들은 '체르노빌레츠'라는 이름으로 박대당했다. 이 땅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이곳은 늑대와 여우가 돌아다니는 곳, 여전히 위험 수치를 훨씬 넘은 수백 배의 방사능이 넘실거리는 곳이 되었다. 거기에는 숨어들어온 범죄자들, 중앙아시아의 끔찍한 내전을 피해 온 사람들, 광신자, 주정뱅이, 그리고 되돌아 온 노인들이 산다. 그들끼리 산다.

땅은 거절하는 법이 없지.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죄인도 받아들이지. 그것 말고는 이 세상에 정의란 없어. (…) 심심해지면 조금 울면 되지. (…) 즐겁게 살던 때가 있었어. 기념일이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췄어. 나비도 날아다니고 땅벌도 윙윙거리는데, 방사선이 말이 되냐고. (운다) (…) 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보상해 주겠어. (…) 닭의 볏이 붉은 색이 아니라 까맸어. 방사선 때문이지. 치즈도 안 만들어졌어. 몇 달을 치즈와 커드크림 없이 살았어. 우유가 발효되지 않고 가루로 변해버렸어. 하얀 가루로. 방사선 때문에. (…) 봐 살기 좋아. 여기는 이제 농장이 아니라 코뮌이야. 코뮤니즘. (…) 우리가 돌아온 곳은 집이 아니라 100년 전 과거야. 맞는 말이지. 낫으로 풀을 베고, 아스팔트 위에서 도리께로 타작하지. 영감은 바구니를 짜고, 겨울에는 내가 바느질하고 뜨개질하고.

그러나 그들은 예전의 그들이 아니다. 외부에서 사진작가와 다큐멘터리 작가와 관광객들이 찾아오면 적당한 타이밍에서 눈물을 흘릴 줄도 알고, 동정심을 자아내어 구호물자를 당겨 오게 할 줄도 안다. 그들은 체르노빌을 겪으면서 모두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은 철학자이자, 장사꾼이자 시인이 되어 있다. 그들은 신께 기도를 올리지만, 질문은 하지 않는 냉정한 허무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땅의 사람들만이 가진 한 마음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깊은 감동으로 새긴, 주민의 이야기를 읽어보자.

안나 수시코를 찾아주세요. 우리는 한 마을에 살았어요. 등이 굽었고, 어릴 때부터 말을 못했어요. 연세는 예순이에요. 이주할 때 그녀를 구급차에 태우더니 어디로 데려갔는지 모르겠어요. (…)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녀를 가련하게 여겼어요. 어린아이한테 하듯 돌봐주었죠. 나무를 해주는 사람도 있었고, 우유를 가져오기도 했어요. 저녁에 집에 찾아가 보기도 하고…. 난로도 피워주고요. 우리는 낯선 곳을 떠돌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지 2년이 됐어요. 그리고 집이 잘 있다고 전해주세요. (…) 어디서 괴롭게 사는지, 주소만 알려주시면 저희가 가서 데려올 거예요. 외로워서 죽는 일은 없도록…. 제발 이렇게 부탁합니다. 아무 잘못 없는 영혼이 낯선 곳에서 고통 받고 있어요. 한 가지 더 있어요. 잊고 있었는데, 아픈 곳이 있으면 노래를 불렀어요. 가사 없이 목소리 만으로요. 말을 못 해요. 아프면 '아아아'라면서 목소리로 불렀어요. 아……. 아……. 아…….

참상

체르노빌 원자로가 폭발했을 때, 주변 프리피야트 주민들에겐 굉장한 구경거리였다 한다. 원자로는 안에서부터 신비한 빛과 광채를 내면서 불탔다. 10킬로미터 밖에서부터 일부러 구경하러 오는 사람도 있었고, 다시 없을 이 장면을 구경시키기 위해 베란다에서 아이를 들어 올려 주기도 했다. 그러나 목이 따갑고 눈물이 절로 흘렀다. 뭔가 '지구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냄새가 났다.

사고 이후 발전소 바로 옆에서 일하던 한 해체 작업자―여러 형태의 수습 작업에 동원된 이들을 이 책에서는 '해체 작업자'라고 부른다―는 죽을 때 몸이 부어올라 드럼통처럼 커졌고, 크레인을 운전하던 그의 친구는 숯처럼 까매지고 어린아이처럼 야위어갔다. 사고 다음날 발전소 옆에 있던 텃밭을 갈던 여자의 다리는 발부터 무릎까지 체처럼 작은 구멍이 뚫렸다.

한 여인이 있다. 열여섯 살에 취직한 전화국에서 스물세 살의 남자를 만났다. 기계공이었고, 2미터에 가까운 준수한 남자였다. 열렬하게 사랑했고, 결혼했다. 그리고 십수 년을 살았다. 자신의 생일 파티가 예정되었던 날, 남편은 집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를 타고 체르노빌로 갔다. 그리고 해체 작업에 종사했다. 주민이 떠난 마을의 전기를 차단하는 일을 했다. 그 일을 함께 했던 동료들은 모두 죽었고, 마지막으로 그가 죽었다. 돌아올 때 목에 림프부종이 있었다. 그리고 1년 사이 서서히 죽어갔고, 그의 몸은 조금씩 괴물로 변해갔다.

림프선을 제거하니 혈액 순환에 문제가 생겼고, 코가 자리를 이동해 세 배로 부풀었어요. 거기다, 눈도 이상해져서 눈동자가 각각 다른 쪽을 향했고, 그 속에 낯선 빛과 느낌이 생겨 마치 그가 아닌 다른 뭔가가 그 속에서 내다보는 것 같았어요. 나중에는 한쪽 눈이 완전히 감겨버렸어요.

남편은 말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암세포가 가슴 위로 상체로 얼굴로 올라갔다. 몸에 까만 점이 났고, 턱과 목이 사라졌고, 혀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혈관이 터져 출혈이 시작되었다. 소에서 젖을 짜낼 때 나는 소리를 내며 핏줄기가 흘렀다. 진통제를 놓아도 퍼지지 않아 보드카를 주사기에 부어 먹이면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체르노빌에 간 것, 후회는 없다고 했다. 죽기 전, 아내의 이름을 부른다. 아내는 마지막 행복의 기억을 안고, 남편은 숨을 거둔다. 남편이 죽은 뒤 찾아 온 사람들은 겁을 먹고 시신에 다가가지 못한다. 남편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고 직후 원자로의 불을 끄기 위해―너무나 어처구니없다. 6000도의 원자로 불을 어떻게 끌 수 있다고 소방대원이 출동하게 되었는지―동원된 소방대원 바실리 이그나텐코의 아내 류드밀라 이그나텐고의 증언이다. 그는 임신한 몸으로 모스크바의 병원에 격리된 남편을 찾아갔다. 그리고 남편이 죽을 때까지 곁에서 돌보았다. 그의 증언이다.

하루에 20번, 30번씩 대소변을 받았다. 피와 점액이 뒤섞여 나왔다. 손발의 피부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온 몸이 물집으로 뒤덮였다. 남편이 머리를 움직이면 베개에 머리카락이 한 줌씩 떨어지곤 했다. (…) 나는 천조각을 매일 갈았지만, 저녁때면 피로 흠뻑 젖었다. (…) 폐와 간의 조각이 목구멍으로 타고 올라와 숨을 못 쉬었다. 손에 붕대를 감아 입 속에 있는 것을 다 긁어냈다. 말로 할 수가 없다! 글로도 남길 수 없다! 견뎌낼 수도…….

남편은 결국 죽었다. 발이 부어서 신발을 신길 수 없었다(그래서 아내의 꿈에 남편은 계속 맨발로 나타난다). 발이 아니라 폭탄이었다. 피와 상처로 뒤덮인 몸이었다. 시신의 방사선 수치가 너무 높아 폴리에틸렌 비닐로 시신을 싸고, 밀폐된 아연 관에 넣은 뒤, 1.5미터 두께의 콘크리트 벽을 싸서 묻었다. 유사 이래 없었던, 기괴한 무덤이었다.

사랑

그리고 아기가 태어났다. 간이 딱딱했고, 심장이 정상이 아니었다. 4시간 뒤에 죽었다. 아내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다. 그 사랑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임신한 아기에게 어떤 피해가 미칠 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기가 죽었다. 뱃속의 아기는 그의 몸으로 흡수된 방사선을 받아들인 것이리라.

딸이 나를, 살렸다. 그렇게 작은 아이가 딸이 나를 지켜줬다. 사랑으로, 사랑으로 죽이는 게 가능한가? 이런 사랑으로! 사랑과 죽음은 왜 나란히 있을까?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누가 알려줄까? 무덤에 가면 무릎을 꿇는다.

남편이 죽어가는 동안 그에게 병원의 누군가가 말한다. "잊지 마세요.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남편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 전염도가 높은 방사성 물질일 뿐"이라고. 사랑하는 존재를 방사능 덩어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 인간의 사랑이 맞닥뜨린 유례없는 한 양상이다.

벨라루스의 한 엄마의 이야기다. 원래 이주할 예정이었으나 나라에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이주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눌러 앉았다. 그 때, 사랑에 빠져 있었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온 몸의 구멍이 다 막힌 딸아이가 태어났다. 항문도, 잠지도 없다. 신장은 한쪽뿐이다. 4년 동안 네 번 수술을 했다. 4년 내내 병원에서 살았고, 겨우 항문과 질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30분마다 소변을 손으로 눌러서 짜내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치료는 첩첩산중이다. 내 아이가 실험용 모르모트가 되어도 좋으니 서양 어디 나라에서 데려가 수술 좀 시켜달라고 온 나라로 편지를 보낸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러나 이 모든 고통보다 큰 것이 있다. 딸아이가 이렇게 된 것이 바로 '우리의 사랑' 때문이라는 자책감이다. 그는 남편이 키스만 해 와도 벌벌 떤다. 임산부들, 새끼 밴 옆집 개, 둥지 속 황새를 보아도 공포와 놀라움, 기쁨과 정체모를 복수심으로 복잡한 감정이 된다.

한 아내가 있다. 남편이 체르노빌에서 트럭으로 모래와 콘크리트를 운반하는 일에 종사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고, 의사의 중절 권유에도 기어코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죽은 채 태어났다. 손가락도 두 개 모자란 계집아이였다.

사랑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 사랑의 감정에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는 것, 사랑 때문에 2세에게 끔찍한 고통을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체르노빌 이후의 세계다.

그러나 이것은 체르노빌에 한정된, 방사능으로 인하여 생겨난, 특별한 상황인가. 지금, 우리는 다들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은가. 오염된 세계에서 아이에게 전가될 기형과 장애에 대한 공포, 아이의 세대에게 전가될 이 세계의 야만과 비참, 그래서 우리는 자발적으로든 비자발적으로든 아이 낳는 일을, 이 세계를 이어가게 만드는 일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에 대한 공포, 과연 지금 우리에겐 존재하지 않는가?

국가

국가는 부패했다. 국가는 사고 당시 도서관에 있는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관한 모든 책, 방사능에 관한 책, 심지어 과학자 뢴트겐에 관한 책까지 치웠다. 소요와 혼란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KGB는 모든 전화를 도청했다.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핵물리학실장이 벨라루스의 총책임자인 1등서기관에게 보고를 하는 와중에 '원자로'라는 단어가 나오니 곧장 전화가 끊겨버린다.

국가는 오염된 육류를 수백만 톤이나 사료와 소시지로 사용했다. 오염된 송아지가 팔리는 것을 방관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혼란과 공황 상태이다. 당 간부들의 일관된 행태가 있다. 튀지 않을 것, 개인이 져야 할 책임은 굳이 지지 않을 것, 핵보다 상부의 진노를 두려워 할 것. 그 속에서 모든 고통은 바로 현장의 군인, 기술자, 광부들에게 전가된다. 언론은 원자로 냉각 작업에 동원된 헬기 조종사들을 '체르노빌의 매', '하늘의 영웅'으로 치켜세운다. 시간당 1800뢴트겐의 끔직한 방사능에 피폭되면서, 헬기 내부 온도 60도를 견디며 정신이 희미해질 정도까지 비행하던 조종사들이 있었다. 모래 먼지 때문에 하늘이 캄캄하지만, 헬기의 창문을 열고 직접 아래를 보면서 납과 백운석과 모래를 투하했다. 하루에도 열 번이 넘게 원자로 위로 비행한다. 그들은 대부분 죽거나 장애인이 되었다.

저녁에 아내와 영화 구경을 가려고 약속이 되어 있는 로켓 연료 전문가를 입고 있던 티셔츠 차림 그대로 공장에서 호송하여 체르노빌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원자로 지붕으로 올려 보낸다. 로봇도 오작동을 일으키거나 터져버린 원자로 지붕을 청소하게 한다. 일이 고통스러우니 다들 술을 마시지 않으면 견뎌낼 수가 없다. 미친 듯 토론하고 싸우고 더러 주먹질을 한다. 그리고 술에 취해서 잠든다. 그들은 언론에서는 영웅이었고, 해체 작업 현장에서는 막장의 노동자들이었고, 일과 후 그들끼리 있을 때에는 광기의 철학자이자 주정뱅이였고, 집으로 돌아간 뒤에는 장애인이 되었고 끝내 죽었다.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핵에너지연구실장이었던 바실리 네스테렌코라는 이가 나온다. 드물게 훌륭한 사람이다. 실상을 알리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그에게 관료들이 말한다. "교수님, 왜 그렇게 과민 반응 하세요? 벨라루스 국민 걱정하는 사람이 교수님 한 사람 뿐이라고 생각하세요?"라고. 오염된 지역의 트랙터 기사가 마스크조차 없이 일하고 있다. 이미 보급된 마스크를 담당자가 나눠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질책한다. 그러자 곧장 되받아친다. "교수님이야 비판 같은 거 쉽죠. 잘리더라도 다른 직장 구하면 되니깐. 그런데 저는 그렇게 안 돼요."

벨라루스 중앙위원회 대표부 간부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요오드를 복용했다. 자기네들은 현지답사를 갈 때 방독면과 방호복을 다 차려입었다. 원자로 바로 밑 지하에서 냉각 장치를 설치하기 위해 동원된 광부들은 치사량을 훨씬 넘는 피폭을 당하면서도 거의 맨몸으로 일하고 있는데도.

가장 용서가 안 되는 대목은 이런 것이다.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 외곽에는 당 간부들만을 위해 특별한 농장이 있었다. 거기에는 오염되지 않은 지역에서 수송된 사료와 풀로 그들과 가족이 먹을 소를 따로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바실리 네스테렌코는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만다.

유치원 아이들이 아직 대피를 못하고 있는데 농장 대표가 트럭 두 대에 세간을 다 싣고 떠나려 한다. 부하가 '이건 좀 아니지 않으냐'며 대든다. 농장 대표의 말이 이렇다. 집안에 있는 온갖 물건과 잼과 절임이 든 병까지 다 싣고 가려면 차 두 대로도 모자란다는 거다. 그리고는 다음날 유유히 떠난다. 이 장면을 지켜본 다큐멘터리 감독 세르게이 구린이 말한다.

악의 메커니즘은 세상이 파멸해도 돌아갈 것이다. 내가 알게 된 사실이다. 지금과 똑같이 서로 헐뜯고, 상사 앞에서 아부하고, 집에 있는 텔레비전과 모피 코트를 지켜낼 것이다.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사람은 지금과 똑같을 것이다. 영원히…….

나는 재앙이 우리를 새롭게 거듭날 계기가 되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이 책을 읽으며 접었다. 그의 말대로 악의 메커니즘은 세상이 파멸하는 그 순간까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체르노빌 사고를 소련 체제가 키운 재앙으로 규정하려는 이들이 있다. 주로 서방 측 지식인들이다. 10분이면 될 결정을 내리는데 몇 주가 걸리는 비효율, 머리부터 발끝가지 썩어 문드러진 총체적인 부패상. 그러나 재앙 앞에서 그들은 얼마나 다를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의 행태를 지켜보지 않았던가.

저들을 비난할 것 하나도 없다. 이것이 국가의 솔직한 원래 모습이 아닌가. 원자력은 그 자체로 중앙 집권적 전체주의 국가 시스템이 그대로 녹아있는 한 상징이다. 그리고 그 사회의 온갖 반민주주의적 제도와 양상들의 결정체다. 그러므로 원자력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은 세상을 변혁하려는 싸움과 전적으로 합치된다.

헌신

"1000뢴트겐도 러시아인을 무너뜨리지 못하리." 해체 작업에 동원된 이들이 부르던 노래다. 그들은 끌려왔고, 끔찍한 질병에 걸려 죽어가지만, 대부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솔직하게 '뭔가 영웅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이도 있다. 자신의 인간성을 시험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굶주림과 살육을 딛고 끝내 파시스트를 이겨낸,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이 있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불타고 있는 핵연료가 원자로 지하 수조에 있는 물과 닿아 2차 폭발이 일어날 뻔한, 유럽 전체가 영구적으로 거주 불능 지역이 될 수도 있었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 순간에 누군가가 수조에 들어가 수조 속 물을 빼내야 하는 일을 해야 했다. 물론, 끔찍하게 죽어갈 각오를 하고서. 이 일에 자원한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영웅적으로 죽었다. 그것은 완전히 신화 속의 행위였다.

아무런 대가 없이 혈액과 골수를 내놓은 수천 명의 사람들, 스스로 자원해서 해체 작업자들이 입었던 방사능 덩어리인 작업복을 빨래해주던 여대생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헌신의 실체는 무엇인가. 아직 애가 없어서, 아직 신혼이라서 가지 않겠다는 헬기 조종사 후배를 두고 "남자도 아니다, 양심도 없다"고 야단치던 선배 조종사는 아홉 번의 수술과 두 번의 뇌출혈 끝에 후배 조종사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한 해체 작업자는 공장에 복귀해서 일하지만, 슬슬 몸이 고장 나기 시작하고 지속적으로 고통스럽다. 공장 지도원은 "계속 아프면 자를 거야"라고 위협한다. 그는 외롭다. "나는 체르노빌에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 다녀왔고, 그래서 아프다"고 이야기하면 지도원은 "나는 너 거기에 보낸 적 없어"라고 싸늘하게 외면한다. 이것이 그들이 체르노빌에 바친 헌신의 솔직한 실체이다.

국가는 이렇게 말했다. '죽어라, 의미를 주마.' 그들은 국가를 사랑했고, 사회주의적 인간학을 문자 그대로 믿었다. 그러나 이 믿음이 깨어져버린 이들, 국가와 이념에 대한 헌신이 완전한 허위임을 깨달은 이들, 이를테면 사고 조사와 수습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소련의 세계적인 핵물리학자 발레리 레가소프 같은 이는 자살했다.

죽어가는 이들은 한결 같이 이렇게 말한다. '나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했다'고. 그들도 국가, 이념, 영웅, 이런 따위가 다 헛것이며 거짓부렁이라는 것을 잘 안다. 다만 그들은 '누군가는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 일을 바로 누구도 아닌 자신들이 했다는 것에서 그들이 겪었던 고통의 의미를 부여했다. 거룩하다. 그러나 슬프고 안타깝다.

이 상황을 누가 만들었는가? 자본가, 지식인, 관료, 언론인, 거기에 빌붙은 작자들. 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뇌까리는 '국가', '국익'이라는 도깨비 같은 헛소리, 개소리들. 원자력은 우리가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들여다 놓고, 빼도 박도 할 수 없도록 기정사실로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우리에게 떠넘겼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아이들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아직 안 했다. 아이들 이야기다.

사고가 난 지 사흘째 되던 날, 원자로 바로 인근에 있는 프리피아트 주민이 소개(疏開)당했다. 딸아이는 눈물범벅이 되었다. 고양이를 데려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문짝을 갖고 가려 했다. 그 집안에는 가족이 죽고 관이 들어올 때까지 시신을 문짝에 누이는 풍습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문짝에서 누워 관을 기다렸다. 문짝에는 자기가 자라난 기록도, 딸아이가 자라난 기록도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가져가지 못했고, 2년 뒤 그 집에 숨어들어가 경찰의 발포 위협을 견디며 오토바이에 싣고 가져왔다.

딸의 온몸에 새카만 점이 올라왔다. 딸은 죽기 싫다고 했다. 요리사의 흰옷만 봐도 흥분했다. 병원에서 아내는 "저렇게 힘들어하느니,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어.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라고 울부짖었고, 딸은 죽었다. 이제는 딸을 문짝 위에 뉘었다.

오염된 지역에 사는 아이들은 애늙은이가 되어 있다. 웃기는 연극을 보여줘도 웃지 않는다. 보다 못한 선생님이 연극 관계자들에게 말한다. "그러지 마세요. 우리 아이들은 안 웃어요. 자면서 울기만 할 뿐이에요"라고. 바깥을 못나가게 하니, 집에만 있다. 텔레비전과 책뿐이다. 벨라루스의 숲은 아름답고 열매로 가득 차 있지만,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창문이라도 깨면 선생님들이 기뻐할 정도다. 더러 '길을 걷다가 누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프다고 호소하는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이 레닌그라드로 이송당할 때, 기차에 실린 그들을 보며 어른들은 성호를 긋고 눈물을 흘리지만, 그들이 지나가면 소독하고 청소한다. 그들이 식당에라도 들어갈라치면 다른 이들과 격리시켜버린다. 의사는 그들의 소지품과 옷을 봉지에 넣게 하고 그것을 모두 묻어버린다. 그것을 모두 지켜본 아이들은 그때부터 '죽는 것을 기다렸다'고 고백한다. 아이들은 죽음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다. 한 아이는 죽음을 '오래 오래 잠자고 안 깨는 것'이라고 말한다. 곧 죽게 될 어떤 아이는 "나는 밤마다 나는 법을 배워요. 내가 곧 죽을 걸 모르는 줄 알아요? 이 놀이가 싫지만 어쩔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연습이다.

여자 아이들이 말한다. "못 생긴 애를 낳아도 걜 사랑할 거야." 아이들은 이미 기형아 출산을 생각하고 있고, 자기네들끼리는 그런 이야기들을 나눈다.

한 아이가 백혈병에 걸렸다. 아버지는 해체 작업자였던 것이다. 고통 속에 신음하지만, "난 그래도 아빠가 아주 좋아요"라고 한다. 나는 이 책을 두 번 정독했는데, 이 대목에서 딱 한 번 울었다. 이제, 아이들의 육성을 몇 마디만 들어보자.

병원에 입원했어요. 정말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엄마한테 부탁했어요. "엄마, 나 못 참겠어요. 그냥 죽여주세요." (알료사 벨스키, 9세)

할머니가 우리를 지하실에 가뒀어요. 그러면서 무릎 꿇고 기도했어요. 우리한테도 말세니까 기도하라고 했어요. 우리가 죄지어서 하나님이 벌준다고 했어요. 오빠는 여덟 살이었고 나는 여섯 살이었어요.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생각해봤어요. 오빠는 산딸기 잼이 든 병을 깨뜨렸어요. 나는 새로 산 원피스가 울타리에 껴서 찢어졌는데, 엄마한테 말 안 하고 옷장에다 숨겼어요. (아냐 보구시, 10세)

나는 열 두 살이에요. 나는 집에만 있어요. 나는 장애인이에요. 우리 반 애들이 내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걸 알아냈을 때, 내 옆에 안 앉으려 했어요. 나한테 닿을까봐 무서워했어요. … 의사 선생님께서 그러시는데요, 우리 아빠가 체르노빌에서 일해서 내가 아픈 거래요. 그래도 난 아빠가 아주 좋아요. (바냐 코바로프, 12세)

철학, 그리고 공부

체르노빌을 다녀온 사람은 누구든 철학자가 된다. 체르노빌은 이 시대를 우리의 삶 전체를 총체적으로 돌아볼 것을 요구한다. '우리 인생이 불붙은 성냥개비 같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한 벨라루스의 정치인은 말한다.

후쿠시마에서 체르노빌을 능가하는 사고가 터졌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 폭탄의 168기에 해당하는 방사능 물질이 유출되었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유출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책에 나오는 대로, 오염된 구역 내에 사는 아이들이 좀처럼 웃지 않는 것, 남자건 여자건 술에 취해 돌아다니는 것과 비슷한 이유가 엎드려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이후로부터, 두려움이 사랑을 대신할 것이다. 사람들은 잡담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지금 지구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권태'라는 행성 속에 살고 있다. 권태의 다른 이름은 물론 공포이다. 이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삶이 다른 삶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영원하리라는 것을, 인생의 불멸의 의미를 잃었다.

내가 사는 곳 60킬로미터 밖 부산시 기장군에 가동한 지 33년 된 고리 1호기를 비롯하여 다섯 기의 원자로가 있다. 그리고 8년 안으로 총 10기의 원자로가 가동되게 된다. 내가 사는 곳은 곧 세계 최대의 원전 밀집 지역이 될 것이다. 농축된 우라늄 1밀리그램만으로 두 명의 노동자가 끔찍한 피폭으로 죽었고, 350미터 이내 주민들이 피난했고, 31만 명의 시민이 자택에서 대기했다. 일본 도카이무라 사고 때의 일이다. 1밀리그램이다. 10기의 원자로 중에서 어느 한곳에서만 사고가 나도 이 책에 나온 모든 상황은 곧장 나의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원전 사고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체르노빌의 방식대로, 이 세상이, 미래가 조금씩, 이미 분칠되어 가고 있다는 것. 나는 이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전쟁의 시대를 우리는 살았다. 그 전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고, 말로 표현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방사능의 전쟁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 왔는지 가늠할 수 없다. 원자의 안정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힘을 인간은 원자를 쪼갬으로써 불러냈다. 우리는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거인을 불러냈지만, 이 거인을 어떻게 다시 집어넣을지 모른다.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려 버렸다. 그러므로 이것은 철학적인 문제이다. 인간은 원자를 쪼갤 권리가 있는가.

우리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겪으며 전혀 다른 시대로 왔다. '여기까지 왔으니 별 수 없잖아', 이딴 소리를 하는 인간과 나는 상종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한계를 아는 것이 윤리다. 총체성에 대한 점검을 하지 않는 지성이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이후,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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