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대통령과 재벌 총수의 '약자 코스프레'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대통령과 재벌 총수의 '약자 코스프레' [기자의 눈] 박 대통령, 거리로 나선 위안부 피해자는 안 보이나
박근혜 대통령이 19일 국무회의에서 "오죽하면 이 엄동설한(嚴冬雪寒)에 경제인들과 국민들이 거리로 나섰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한파가 몰아치는 엄혹한 겨울, 길거리에 나선 재벌 총수들에 대한 걱정이다. 오죽하면 두산 박용만 회장님, GS 허창수 회장님을 비롯, 경제단체 수장들이 가정부 있는 따뜻한 집도 박차고 길거리에 나섰을까. 안타까운 게 사실이다. '민생구하기 입법 촉구 천만 서명운동'에 참여하는 총수들도 마찬가지다. 삼성, LG, 한화 총수들은 얼마나 마음이 추울까. 최근 불미스러운 일로 대통령이 사면을 하자마자 다시 수사 선상에 오른 SK 그룹의 총수는 두 배로 마음이 추울 것이다. 너무 걱정된다.

서비스법, 노동4법, 원샷법 등 처리가 나라를 위한 것이라는 그 굳은 신념을 의심하지는 않고 싶다. 대기업 구조조정을 이사회 의결로 할 수 있도록 하는 원샷법에서 10대 대기업을 제외하자는 야당의 주장에 반대하고 있는 박용만 회장의 두산 그룹이 10대 대기업에 속해 있다는 것은 그냥 하나의 우연이다. 야당의 타협책을 걷어 차고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의회 민주주의'를 아무리 설명한다 한들,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 박근혜 대통령이 재계 주도의 1000만인 서명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청와대

기왕 대통령이 거리에 나선 사람들을 걱정하는 차에, 몇몇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해 봐야 하겠다. '오죽하면'이라는 형용사를 붙일 곳은 많다.

체감온도가 영하 22도 아래로 떨어진 이날 오전에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는 6명의 대학생들이 '엄동설한'에 평화의 소녀상을 지키고 있다. 극악한 전쟁 범죄인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의 법적 책임도 명시하지 못하고, 심지어 우리 정부가 나서서 소녀상 이전에 간여하겠다고까지 한 12.28한일협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으면, 거리로 나섰겠나. 오죽하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팔순, 구순의 노구를 이끌고 이 엄동설한에 옛 일본대사관 앞 거리에 나서겠나.

지난해 11월 15일 밤 이야기도 있다. 동장군이 들어설 채비를 하고 있던 터에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 농민은 얼마나 추웠겠나. 당시 체감 온도가 3도였다는데, 이제 고희를 맞은 노인이 물대포까지 뒤집어 썼다면 그 시린 마음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쌀값을 21만 원 선에서 보장하겠다는 대통령의 공약이 무색해졌다. 오죽하면 그들이 거리로 거리로 나섰겠나.

9·15 노사정 대타협을 파기하겠겠다고 나선 한국노총은 또 오죽할까. 일반해고와 취업규칙을 완화하겠다는 정부의 입장에, 노조원의 생계 보장이 어려워질까 노심초사하는 노동자들도 엄동설한에 거리에 나서게 생겼다. 이들이 오죽하면 거리로 나섰겠나.

과문한 기자 이력이지만, 새누리당은 언제나 국회의 존재 의미 운운하며 거리로 나선 사람들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보여왔다. 거리의 '떼법'을 근절하자는 게 집권 여당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박 대통령이 일개 이익집단들과 몇몇 보수단체가 모인 '거리의 운동'에 동참했다. 이를 국민이 나선 것으로 규정하고, 치켜세우고 있다. 만약 노무현 전 대통령이 노동조합의 서명운동에 사인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정상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였겠는가. 아마 보수 종편은 하루 종일 특보를 내보냈을 것이다. 새누리당이 내놓은 말은 준엄한 '자아 비판'이었다. 경제인들을 거리로 나서게 한 것에 대한 반성이었다.

정치적인 해석을 곁들이지 않고서는 이런 박 대통령의 '일탈'이 설명되지 않는다. 박 대통령의 행위와 발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쉽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콘크리트 지지율'을 무기로 국회를 건너 뛰고, 야당 심판론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야당 심판론은 올해 4월 총선을 겨냥하고 있다. 이런 해석이 없다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들의 '약자 코스프레'에 일국의 대통령이 동원돼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박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 과거 사학법 반대 투쟁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들을 이끌고 거리로 뛰쳐 나왔다. 손에 촛불을 들고서 53일간 거리 투쟁을 이끌었다. 지금 박 대통령은 야당 대표가 아니다. 행정부와 국회를 장악한 대통령이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더 강력한 힘을 쥐고 있다. 그런 박 대통령이 약자 흉내를 내고 있는 재벌 총수를 옹호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는 모습은 영 불편해 보인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박세열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