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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민주주의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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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서양 민주주의는 끝났다!" [유라시아 견문] 장칭과의 대화 : 왜 왕도 정치인가? ①
양명정사

陽明精舍(양명정사) 가는 길은 멀고 설었다. 항공망이 촘촘하고, 고속철과 고속도로가 뻥뻥 뚫린 대륙이지만 시골에는 간이역과 오솔길이 여전했다. 버스를 몇 차례 갈아탄 끝에야 다다른 곳은 구이저우(貴州) 성의 구이양(貴陽)하고도 롱창(龍場). 명나라의 大儒(대유) 왕양명의 흔적이 역력한 마을이다.

주희의 신유학을 혁신했던 개신(改新) 유학, 양명학이 발원한 장소인 것이다. 물론 500년 전 왕양명을 추모하기 위해 험한 길을 마다한 것은 아니다. 관심은 동시대, 그리고 미래를 향해 있다. 주자학과 양명학에 이어 또 한 번의 유교 혁신을 궁리하고 있는 당대의 민간 유학자 장칭(蔣慶)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또한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타지에서 활동하다가 낙향하여 양명정사를 꾸린 것이 2001년이다. 수양과 강학을 병행하는 현대판 書院(서원)이라 하겠다.

장칭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미국이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구내 서점에서 중국의 유교 부흥에 관한 신간을 접했다. '유교 헌정'에 관한 그의 논의를 영어로 먼저 접한 것이다. 매우 인상적이었으나 소략하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가 출간한 중국어 원서들을 몽땅 구하기로 했다.

미국 명문 대학이 구축해둔 글로벌 지식망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미국과 중국은 물론 홍콩에 있는 책까지 죄다 수집해 주었다. 며칠을 몰입해 읽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독창적이고 독보적이었다. 좀처럼 접해보지 못한 정치 이론이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나 선생을 직접 만나게 되는 것이다. 설렜다.

그는 1953년생이다. 문화 대혁명으로 하방했다, 개혁 개방으로 대학 공부를 할 수 있었다. 1978년 충칭에 있는 서남정법(西南政法)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다. 1982년부터는 같은 학과의 교수가 된다. 1988년부터 2001년까지는 개혁 개방을 상징하는 도시 선전의 행정학원 교수로도 있었다. 2001년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차린 민간 학당이 바로 양명정사이다.

학술에 주력하던 그가 논객으로 주목받게 된 계기가 있었다. 1989년 6.4 천안문 사태이다.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가 잔인하게 진압당하면서 5.4 정신의 복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5.4의 핵심 정신이 바로 '민주'(와 과학)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칭은 전혀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대만(타이완)의 신유가 잡지에 발표한 논설이 '중국 대륙 유학 부흥의 현실 의의 및 당면 문제'였다. '5.4'와 '문혁', '6.4'를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하여 서구 민주에 대한 낭만적 열정이 중국 정치를 거듭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관점을 제출한 것이다. 장차 중국 정치의 출로를 유학의 부흥에서 구한 선언적 문헌이었다.

그 후 자기 발언에 책임이라도 지는 양 30년 가까이 유교 헌정의 제도 입안에 주력해 왔다. 일각의 비판처럼 그는 '유교 근본주의자'인가, 아니면 시세를 앞서간 선각자인가? 어느 쪽이든 그와의 대화는 충분히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 헛걸음이 아니었다.

▲ 왕양명 기념비. ⓒ이병한

정치 유학

이병한 : 흔히 선생님을 '대륙 신유가'로 분류합니다. 그간 신유가라 하면 대만과 홍콩, 미국 등 대륙 밖의 학자들이 많았는데요. 대륙의 신유가라면 어떤 차별점이 있을지요?

장칭 : 정치 유학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대만의 신유가들도 정치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정치를 논하는 유학'일 뿐이지, '정 치유학'은 아닙니다. 정치 유학의 핵심은 유학에 바탕을 둔 제도 건설에 있습니다. 그러나 대만의 정치는 서방의 민주정입니다. 대만의 30년 민주화 과정에 유가의 목소리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날이 서구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 문화에서 가장 동떨어진 민주진보당(민진당)이 집권도 하지 않습니까? 괜히 '대만 독립'이 불거지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진보당은 문화적으로 비중국적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서방의 정치이지 동방의 정치가 아닙니다. 신유가들이 아니라 반(反)유가들이 대만 민주를 이끌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적 정치 제도를 따를 뿐, 유가적 정치 제도를 탐구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정치인의 자질과 덕목을 따지는 '심성 유학'이 있을 뿐입니다.

이병한 : 심성 유학의 측면에서 평가해줄 지점은 없습니까?

장칭 : 심성 유학은 본질상 덕행 수양입니다. 수신(修身)과 공부(工夫, 쿵푸)이지요. 그런데 대만과 홍콩의 신유가들은 심성 유학을 '쿵푸'가 아니라 '이성(reason)'의 영역으로 축소시켰습니다. 유독 칸트 전공자가 많은 것도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유학을 서구의 철학이라는 사변적인 학문의 하나로 강등시킨 것입니다.

중국 유학은 서방 철학처럼 '신의 뜻'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내 안의 天性(천성)을 갈고 닦아 人性(인성)을 밝히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논리의 구축이 아니라, 수행을 통하여 덕을 쌓고 聖人(성인)에 이르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렇게 보자면 대만의 신유가들은 명백하게 서구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과나 사학과 등 특정 학과의 전문가로 자족하는 것이지요. 대학에서 연구하고 강의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도 어색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유학은 분과 학문이 아닙니다. 공자는 사상가, 교육가, 사학자, 경학가, 문헌학자이자 정치가, 외교가, 종교가, 법률가이며, 예학자이고 음악가였습니다. 아니 공자는 그 어느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유학자'였을 뿐입니다. 大儒(대유)의 전통은 항시 그러했습니다.

이병한 : 그래서 쿵푸학(工夫學)의 재건을 주장하시는 것이지요? 그 중에서도 저는 '어린이 독경(讀經) 운동'이 인상적이더군요. 어린 친구들이 사서삼경을 합창하는 운동을 주도하셨습니다.

장칭 : 경전은 본래 소리 내어 읽는 것입니다. 성대를 울려서 내 몸을 공명시키는 것입니다. 소리 내어 읽기는 함께 읽기, 더불어 읽기이기도 합니다. 내 몸과 남의 몸, 서로의 몸을 경으로 단련시킴으로써 도덕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경이 본디 (음)악이었던 까닭입니다. 함께 노래하며 도덕적 학습 공동체를 형성해 갔던 것이죠. 혼자서 아무리 논리적 이성을 연마한다 한들 덕성을 갖춘 대장부, 군자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입니까? 저는 응당 쿵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병한 : 유학을 공리공담이라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한국에서는 '공자 왈, 맹자 왈' 하면, 뜬구름 잡는 흰소리를 말하거든요. 정치 유학의 현실적 근거가 있을까요?

장칭 : 정치 유학은 공자의 <春秋(춘추)>에 바탕을 두고 창립한 학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도개혁, 즉 '改制立法(개제입법)'을 가장 중시합니다. 쿵푸학으로 사람의 도덕 생명을 바로 세우고, 정치 유학으로 王道(왕도) 정치를 재건하는 것입니다. 서방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예외적으로 정치 실천을 강조하지요.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개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유학과 꽤 흡사한 구석이 있습니다. 유학의 관심 또한 세계의 개조에 있기 때문입니다. 유학은 줄곧 사회와 정치에서 도덕적 이상을 구현하는 실천학문이었습니다.

이병한 : 실제로 근대 유럽의 정치 혁명을 '맹자의 충격'으로 접근하는 연구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易姓革命(역성 혁명)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맹자>의 번역이 유럽의 정치적 각성을 촉발했다는 것인데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사무라이의 사대부화'라고 이해하는 관점이 제출되고 있듯이, 20세기 서구의 공산당원들을 '유럽의 사대부'로 이해하는 독법이 등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칭 : 재미난 비유입니다. 하지만 차이점 또한 분명했습니다. 유가는 계급 혁명, 폭력 혁명을 극구 반대합니다. 覇道(패도)의 정치니까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왕도 정치에 근거하여 세계를 개조하고자 합니다. 德(덕)으로 사람을 감화시키고, 仁(인)으로 천하를 다스려야 합니다. 왕도 정치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20세기의 공산주의자들이 폭력 혁명을 옹호했던 것은 '역사의 필연성'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헤겔의 역사 이성과 마르크스의 과학적 유물사관은 폭력 혁명과 무관치 않습니다.

이상적인 세계상 역시 다릅니다. 유가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조화를 탐구했지, 지배/피지배 없는 유토피아를 몽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민주 정치에 배울 측면이 있습니다. 냉전의 승패가 말해주듯 그들이 제도적 개혁에는 더 능했거든요. 정치 제도적 실천이란 혁명적 열정보다는 합리적 이성의 설계에 바탕을 두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改制立法(개제입법)에 더 근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理(리)와 勢(세)

▲ 중국의 유학자 장칭. ⓒ이병한
이병한 : 그럼에도 정치 유학이란 결국 중국적인 사상이고 정치 아닙니까? 넓게 잡아도 중화 세계에 한정되는 게 아닐지요? 보편성이 있을까요?

장칭 :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 유학은 결코 협애한 문화 민족주의가 아닙니다. 더 좋은 정치, 가장 좋은 정치를 추구하는 보편주의입니다. 물론 저의 사고는 중국의 역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보편적입니다. 중국성과 보편성의 종합을 지향합니다.

본디 왕도 정치란 천하의 이념이지 특정 국가의 이념이 아닙니다. 초월적이며 항구적인 道(도)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도'는 역사의 흐름과 세계의 변화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변하는 것은 오로지 勢(세)일 뿐입니다. 다만 이 보편적인 '도' 또한 필연적으로 특수한 역사와 문화와 결합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야 구체적인 제도로 결실을 맺을 수 있으니까요. 그것이 바로 法(법)입니다. 즉 '법'은 나라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아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도'는 동일한 것입니다.

제가 정치 유학을 주창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난 20세기 중국 정치의 파탄 때문입니다. 혁명에 혁명을 거듭하며 너무나 큰 사회적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정체성의 위기가 가장 심각합니다. 주체성을 지키려다 정체성을 상실한 역설이 일어났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좌/우를 막론하고 서방의 정치를 추구한 것입니다.

정작 중국을 무대로 한 정치에 유학의 理(리)와 문명의 '根'(근)이 결여되었던 것입니다. 중국 문화를 상실한 정치가 100년을 휩쓴 것이지요. '天下爲公'(천하위공)을 사표로 삼았던 쑨원만 해도 달랐어요. 그러나 5.4 이후가 문제입니다. 좌/우 모두 중화 문명의 독특성과 중국 역사의 개별성을 무시하고 서방 민주에 함몰되었던 것입니다.

이병한 : 그래서 6.4도 5.4의 연속으로 이해하시죠? 5.4-문혁-6.4를 동일한 흐름으로 판단하시는 건데요. 좌/우의 편차는 있으되, 탈중국적 정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일관되었다는 독법입니다. 매우 독특하면서도 논쟁적인 시각입니다.

장칭 : 1919년 5.4 신청년들과 1989년 천안문의 대학생들이 지향했던 바가 무엇이었을까요? '과학'과 '민주'를 달성한 중국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중국과 세계의 일체화, 동질화였을 것입니다. 그 결과 지구상에 다시는 '중국 문명'을 발견할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5.4와 6.4의 실현이란 곧 중국의 서구화가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역사의 진보입니까?

이병한 : 그래서 서방의 민주에 반대하시는 겁니까? 중국 문명의 수호를 위해서?

장칭 : 이 또한 국수주의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와 비슷한 발상을 했던 이가 서방에도 있습니다. 에드먼드 버크 같은 사상가가 대표적이죠. 그는 계몽주의의 대척점에서 인류의 문명과 역사, 종교의 다양성과 존엄성을 수호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그를 가리켜 계몽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라고 성토했지요.

20세기 중국의 비극은 버크와 같은 진정으로 깊이 있는 보수주의자가 없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저마다 혁명파이고 개조파였어요. 자유주의든,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기본 성질은 동일합니다. 모두 강렬한 근대주의와 세계주의 경향을 지닙니다. 그래서 자유 민주이든 사회 민주든 인류 역사 발전의 필연적 추세라고 주장합니다. 각자가 인류 최후의 문명을 자부하지요. 그래서 역사 발전의 풍부한 가능성을 무시하고 문명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병한 : 20세기 중국의 주류가 혁명파였다는 점은 수긍합니다. 하지만 천편일률이었는지는 단언할 수 없는 것 같아요. 亂世(난세)에 出世(출세)를 거두고 在野(재야)로 침잠했던 유림들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한반도에서도 식민 시기와 냉전기 '민간 유림'들의 문집을 살피면 귀중한 사상 자원을 발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한글이 아니라 한문으로 글을 썼을 지도 모릅니다. '國文(국문)적 근대'가 아니라 '漢文(한문)적 근대'라고 할까요? 물론 여기서 한문이란 중국의 문자가 아니라, 중화 세계의 보편 문자를 뜻합니다. 조선도, 일본도, 베트남도 공유했던 기록 수단이자 사유 도구였으니까요. 이들은 '중화 문명의 근대화'를 도모하지 않았을까요?

장칭 : 공감합니다. 100년의 대란으로도 중화 문명의 맥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유가의 '도'는 여전히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도'에 입각해서 현대인의 민주 정치에 대한 숭배와 미신을 타파해 가야 합니다. 물론 극도로 어려운 과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공자의 '王道(왕도)'도 맹자의 '仁政(인정)'도 당시에는 그만큼이나 지난했던 과제였습니다. 동시대인들의 상식을 넘어서야 합니다. 複古更化(복고경화), 역사로부터 미래를 구해야 합니다.

이병한 : 진보사관을 숙명사관으로 표현하시죠?

장칭 : 유가들은 인류 역사의 정세(定勢)를 믿지 않습니다. 진보 역시 종말만큼이나 숙명적인 시각이지요. 끊임없는 변화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未來(미래)는 未知(미지), 일체의 가능성에 열려 있습니다. 유가의 사관이 훨씬 더 개방적이지 않습니까? 저는 민주 정치가 천하를 통일한 현상 또한 一世(일세)를 더 지속할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일세를 풍미했다 해서 천세만세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이병한 : 일세란 한 세대인가요? 혹은 한 세기입니까?

장칭 : 西勢東漸(서세동점)의 한 시대를 뜻합니다.

이병한 : 민주 정치도 '서세'의 산물이라는 뜻입니까?

장칭 : 그렇습니다. 理(리)가 아니라 勢(세)의 결과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민주주의는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나마 가장 덜 나쁜 정치 제도'라고 말했습니다. 바른 말인가요? 서방의 經世(경세) 경험이 얼마나 됩니까? 관료제와 행정의 역사가 얼마나 되나요? 게다가 적은 인구에 작은 나라들이지 않습니까? 언제 유가의 왕도 정치를 해봤습니까?

어디까지나 그들의 역사적 맥락에서 나온 발언입니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신정 정치 아래 있었으니, 민주 정치가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었겠죠. 그래서 유럽 밖의 정치 전통은 모조리 신정 정치에 빗대어 살필 의사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인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동방인들도 고분고분 따라야 합니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병한 : 왜 그렇습니까?

장칭 : 유가는 반드시 理(리)를 勢(세)보다 더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유가의 책무는 원리를 세워서 추세를 바꾸어 가는 것(立理轉勢)이지, 이치를 어겨가며 세력을 따르는 것(曲理就勢)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曲學阿世(곡학아세)는 금물입니다. 유가는 결점이 많은 민주 정치를 차선으로, 차악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왕도 정치의 '리'를 통하여 민주 정치의 '세'를 바꾸어낼 것을 사명으로 삼습니다.

역사적으로 늘 그랬습니다. 춘추전국 때 어땠습니까? 공맹이 시류와 조류를 쫓았습니까? 아닙니다. 공자는 王道(왕도)를 논하고, 맹자는 仁政(인정)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대의 시세였던 법가는 유가를 구닥다리(是古非今)라고 맹렬히 비판했지만, 천세만세의 대세가 된 것은 역시 유가였습니다.

이병한 : 20세기 초, 캉유웨이나 박은식의 大同(대동) 또한 그 유가 전통의 계보에 속할 것 같습니다.

장칭 : 역사적으로 진정 가치 있는 사상은 종종 동시대와 불화합니다. 사상의 본질은 비판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민주주의에 비판성이 있습니까? 민주주의야말로 현대 정치를 보호하고 수호하는 보수적 사상입니다. 시세를 따르는 정치일 뿐이죠.

이병한 : 현재 西勢(서세)가 기울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장칭 : 세를 따지는 것(問勢)은 세를 따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역사적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을 때에는 '리'를 밝히고, 세우고, 지켜야(明理、立理、守理)하기 때문입니다. 왕도와 인정과 덕치와 대동을 실행할 수 없는 난세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일단 역사적 조건이 무르익으면 '以理待勢'에서 '以理造勢'로, 최종적으로는 '以理轉勢'에 이를 것입니다.

이병한 : 선생님은 스스로를 어느 단계에 위치시키고 계신가요? 중국을 미국과 더불어 G2라고 부르는 판이니, 세를 기다리던 때(以理待勢), 즉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시기는 확실히 지난 것 같습니다. 세를 만들어가는 시기(以理造勢)입니까, 아니면 세를 바꾸는 시기(以理轉勢)입니까?

장칭 : 세가 바뀌고 있습니다.

이병한 : 민주 정치가 저물고 왕도 정치가 다시 일어난다는 말씀일까요?

장칭 : 민주 정치를 받아 안아서 왕도 정치가 더 完美(완미)해진다는 뜻입니다.

政道(정도)와 治道(치도)

이병한 : 왕도 정치의 미덕이 무엇입니까?

장칭 : 왕도 정치의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주 정치의 폐해부터 짚어야 합니다. 민주 정치의 최대 병폐는 '民意(민의)의 독재'에 있습니다. 권력의 원천을 국민의 의사에만 맡기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병한 : 인민주권론을 부정하시는 건가요?

장칭 : 그렇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권력의 합법성이 인민에게만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인민주권 유일론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병한 : 권력이 국민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 양명정사 강학. ⓒ이병한

중국 유학자 장칭과의 인터뷰는 2016년 2월 24일(수요일) 계속 이어집니다. (☞관련 기사 : 왜 왕도 정치인가? ② "인민 주권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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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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